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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망토 영상쟁이 Sep 17. 2018

말레이시아의 슈퍼맨

(feat. 남북정상회담)


  멸망위기에 처한 크립톤 행성을 구하기 위해 슈퍼맨이 출동한다. 그는 오랜 시간동안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지만 행성이 위험에 빠졌을 땐 언제 어디서든지 빨간색 망토를 휘날리며 사건 현장에 도착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선량한 시민을 괴롭히는 악당을 퇴치하거나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작은 사건현장에서도 슈퍼맨을 볼 수 있다. 결국 두 팔 벌려 하늘을 날았던 슈퍼맨은 임무를 완수하고 크립톤 행성을 지켜낸다. 




 영상기자를 준비하면서 나는 면접장에서 매번 카메라를 짊어 진 슈퍼맨이 되겠다고 했다. 크고 작은 사건현장의 중심에 언제나 서고 싶었고 그곳이 어떤 현장이더라도 내가 취재한 영상으로 하여금 시청자들에게 건강한 정보를 제공하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슈퍼맨 영상기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정남 피살사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슈퍼맨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멀었다. 갑작스럽게 출발한 말레이시아 현장. 최소한의 장비만 챙겼고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무기한 출장이었다. 현장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말레이시아로 향했다. 뉴스만 켜면 나왔던 김정남 피살현장의 공항... 카메라를 보자마자 공항 보안요원들이 내 앞을 가로 막아섰고 내일 다시 오라는 말만 계속 되풀이했다. 뒤에서는 우리보다 더 늦게 온 취재진들의 한숨소리도 들려왔다. 핸드폰을 꺼내 손으로 몇 번의 터치만 하면 볼 수 있는 그 피살 현장을 촬영하기 위해 우린 왜 그토록 여기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을까..? 그리고 왜 뒤늦은 한숨을 쉬었을까..?  


입사 3년차. 국민과 전 세계 언론에서 가장 주목하는 말레이시아. 그리고 그 피살 현장 한 가운데 있었던 나.

                                          

  ' 나는 슈퍼맨이 아니었다'


 현장에서 영화 속 주인공을 꿈꾸던 나는 날 수 있는 능력도 없었고 빨간 망토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야했다. 이런 사건발생 현장에서 영상기자의 임무는 짧은 시간 안에 정확한 메시지를 영상으로 담아내는 것이다. 현장은 마냥 영상기자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때문에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현장의 상황을 신속하게 영상으로 담아내야만 한다. 카메라가 반입이 되지 않거나 물리적으로 사용이 불가할 경우에는 부득이하게 핸드폰을 사용했다. 취재기자의 핸드폰과 더불어 현지코디의 핸드폰까지 빌려 다양한 영상을 위해 모두 사용했다.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프르에 있는 유일한 북한식당에서 과연 북한종업원들은 이번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싱크가 필요했다. 현장에 도착해서 최대한 기자 신분을 숨기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했다. 하지만 더운 날씨 탓인지 이마에 땀방울이 흥건하다. 난생 처음 북한 사람들과의 짧은 대화. 그리고 그 북한 종업원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고스란히 리포트로 반영될 생각을 하니 땀구멍이 더 커진다.

                                                   

김정남때문에 요즘 시끄럽죠?” 

                               

 “김정남이 누굽니까? 그런 사람 저희는 모릅니다.”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이걸 리포트에 어떻게 살릴까..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야했다. 처음에 우릴 경계하고 냉소적으로 대답하던 종업원이 차츰 농담도 던진다. 결국 그날 방송에서는 고스란히 종업원의 싱크가 나갔고 저 멀리 있는 한국에서 수고했다는 말도 덤으로 들려왔다.


  말레이시아에서 최대의 난제는 바로 송출이었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던가. 쉽게 획득할 수 없는 영상과 특종이 될 만한 영상을 확보했다고 할지라도 시청자에게 전달할 수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발품을 팔아 취재한 현장의 영상을 방송시간에 맞춰 전송하지 못한다면 현장에 촬영기자가 있는 이유는 퇴색된다. 더욱이 말레이시아의 시간은 1시간 느리다. 19시 40분 뉴스방송시작에 맞추기 위해서는 현지시간으로 최소한 18시에는 송출을 완료해야 했다. 우선 와이파이가 잘 되는 곳을 미리 알아놓았다. 묵고 있던 호텔로비나 근처 카페의 인터넷 속도도 체크해 놓았다. MNG가 없었기 때문에 오후가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매번 발을 동동 굴렀다. 속도가 느리긴하지만 그래도 최후의 보루인 포켓와이파이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위기는 닥쳐오기 마련이다. 북한대사관 앞에서 강철 북한대사를 뙤약볕아래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이제 곧 철수해야 송출을 하고 취재기자의 더빙도 할 수 있는 시간이 됐다. 그때 난데없이 강철북한대사가 대사관 앞에서 곧 기자회견을 한다고 취재진들에게 통보했다. 한국의 방송사뿐만 아니라 해외언론인 로이터, AP통신 등은 MNG를 이용해 송출을 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아보였다. 심지어 어느 곳에서는 라이브까지 진행하려 분주했다. 강철대사의 기자회견이 끝났다. 계획했던 송출시간은 10분 남짓했다. 나의 소중한 포켓와이파이의 속도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호텔로 가는 차안에서 최소한의 편집만 해 포켓와이파이로 송출을 시작했다. 말레이시아. 그리고 달리는 차 안. 속도가 쌩쌩하게 나올 리 만무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차도 밀리기 시작한다. 그때 창 옆으로 보이는 희미한 글자가 보인다.

                 

    ‘FREE WIFI’

미친놈마냥 차문을 열고 도로 한복판을 가로질러 카페로 들어갔다.


속도는 꽤나 잘나왔다. 한숨을 돌리고 커피 한잔을 마셨다. 영상기자는 다양하게 준비한 송출장비를 현장상황에 맞게 활용하는 능력 또한 중요하다. 적절한 곳에 적절한 장비를 사용하지 못한다면 시청자들에게 정보전달은커녕 볼 권리를 박탈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어떠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유연하게 대처해야 하는 것 또한 수많은 영상기자의 덕목 중 한가지 일 것이다. 그렇게 말레이시아의 하룻밤도 저물어 갔다.

 



  말레이시아의 취재현장이 하루하루 지날수록 익숙해져갔다. 김정남이 피살된 공항, 북한 대사관의 앞에서의 돌발상황 등 현장이 적응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생각은 말레이시아 경찰청에서의 브리핑을 하기 전 까지였다. 세계 각국의 수많은 취재진 그리고 대한민국 언론사.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브리핑을 앞 둔 말레이시아 경찰청 앞은 인산인해였다. 자신이 먼저 들어가야 하는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카메라를 든 사람의 등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 무리 속에 나도 먼저 들어가겠다고 소리를 치고 있었다. 안전이나 질서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나 좋은 자리에서 더 생생한 앵글로 취재한 모습을 고스란히 시청자에게 전달하려는 영상기자들의 마음은 같았을 것이다. 사실 경찰청 앞의 현장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현장에서 언론사들은 보이지 않는 전쟁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남들이 다 하는 취재 현장이 아닌 단독에 목 메어있는 것은 말레이시아에서도 다름이 없었다. 모니터링을 할 때마다 쏟아지는 ‘단독’ 두 글자에 허무함이 밀려왔던 적도 있었다.

 

   언론사들은 말레이시아 현장에서의 자극적이고 가십거리인 기사에 단독을 붙이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사건의 시의성이나 중요도가 떨어지는 기사에도 단독이 달려 나왔다.


영상기자로서 이러한 상황에서의 역할은 무엇일까. 더 자극적인 현장을 찾아다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더 흥미로운 가십거리 소재를 바탕으로 취재해야 하는 것인지.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촬영기자는 사건현장에서 시청자에게 필요한 장면을 얻기 위해 발품을 팔고 때로는 인내를 갖고 기다리는 기본적인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시청자들은 보도영상에서 영화처럼 드라마틱하거나 웅장한 뉴스를 원하지 않는다. 보도영상은 리얼리티이다. 때문에 오히려 단조롭거나 밋밋한 영상일지라도 사건의 현장과 진실이 담겨 있는 영상을 원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건강한 경쟁’이 아닌 흥미위주나 가십거리의 단독들은 아쉽게 느껴진다.

 



당시 긴장감이 흐르던 남북관계.  말레이시아에서 '김정남 피살' 사건이 일어난지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남북의 관계는 180도 바뀌었다.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2007년 노무현 정부 이후 11년만에 다시 대한민국 대통령이 평양을 2박 3일동안 방문한다. 이에 발맞춰 내외신 취재진들도 평양 땅을 밟으며 국민들에게 가감없이 남북정상회담의 분위기를 전해줄 것이다. 그동안 남북정상 회담이 열리고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지켜보며 국민들은 울고 웃어왔다. 그 현장의 한 가운데 영상기자들이 어떻게 하면 시청자들에게 현장의 분위기를 전해줄 것인가의 대한 깊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영상기자는 지금까지 언제나 크고 작은 사건현장을 달려왔었고 그들이 등장하는 목적 또한 국민에게 올바른 진실을 알리려는데 있었다. 그 현장을 담은 영상은 시청자에게 정보제공 역할을 했고 더불어 선량한 시민을 괴롭히는 악당들을 간접적으로 물리쳐 우리네 삶을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남북정상이 마주하는 이번 회담은 분명 역사에 길이 남는 회담이 될 것이다. 영상기자들의 슈퍼맨과 같은 역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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