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를 하지만 영화 리뷰는 아닙니다.
어릴 적 난 잠시 외할머니 댁에서 자랐다. 엄마가 우릴 낳고 학업을 이어가게 되면서 둘 모두를 키우기는 여건이 안됐고, 내가 할머니 댁으로 보내진거였다. 거기서 난 걸음마를 뗐고, 하도 잘먹어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토실토실하게 살이 올라있었다고한다. 비록 할머니와 단둘이 보낸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려서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보다 조금 더 자라있던 유년시절의 기억은 선명하다. 밑동이 굵은 나무와 놀이터라 부르기는 민망한, 농구 골대와 시소 정도가 있는 황량한 공터를 모퉁이로 끼고 돌면 나오던 집. 여름에는 거실에 모기장을 치고 누워서 밤이 깊어질때까지 쫑알쫑알거렸고, 겨울에는 노란 장판이 깔려있던 작은방에 이불을 깔고 누워 티비를 봤다. 그때 피자광고에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때처럼!'이라는 카피가 나왔는데 나는 그게 '해리포터'를 가리키는 줄 알고 샐리가 누굴까? 골똘히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랬으니 아마 내가 여섯,일곱살 무렵이던 2000년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어릴 적 나는 할머니 집에 가는 걸 퍽 좋아했다. 할머니가 차려주신 맛있는 밥을 실컷 먹는 것도 좋았고, 위험하고 살갗만 타니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당부하는 할머니 몰래 슈퍼에 가 '미쯔'를 사먹는 것도 스릴있었다. 할머니는 종종 당신이 나를 키우셨던 몇개월동안의 얘기를 들려주곤 하셨다. 통통하고 뽀얗게 예뻐서 시장에 업고 가면 다들 한번씩 쳐다보며 말을 걸고는 했다고. 난 그런것들이 즐거웠다.
언젠가부터 조금씩 더 나이가 차면서, 나는 명절 외에는 그 집에 잘 가지 않게되었다. 대신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셨다. 조금 머리가 큰 나는 그게 싫었다. 할머니는 하루 종일 티비를 보았다. 이따금 당신 옆에 앉은 내게 궁금하지도 않은 드라마의 내용을 설명해주곤 했다. 할머니는 귀가 잘 안들렸고, 그래서 목소리가 컸다. 할머니는 작은 일에도 화를 못이겨 원통해하곤 했다. 자다가 벌떡 벌떡 일어나, 가슴을 두드리며. 난 그런 것들이 싫었다.
2011년 추석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기억이 난다. 설날 이후로 정말 오랫만에 할머니를 봬러 갔다. 언제나 그렇듯이 텔레비전이 켜져있었다. 할머니는 누워있었고, 우리 가족이 온 인기척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할머니의 머리는 엉망으로 엉켜있었고, 어린 아이가 인형 머리로 장난친 것처럼 노란 고무줄로 여기저기 묶여있었다. 할머니는 언니와 나를 못알아봤다. 그리고 수십년 전 이야기를 어제 일처럼 꺼내며 외삼촌을 욕했다. 불과 몇개월만이었다. 할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고 세뱃돈을 받은게. 하루 종일 티비 소리만 허공을 메우는 그 집에 혼자 있으면서, 할머니는 몇 개월만에 딴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 후로 언니는 할머니께 안부전화를 자주 드렸다. 그런데 난 어색했다. 어린 아이처럼 변해버린 할머니와 이야기를 하는게.
몇년 전 할머니와 시장을 갔던게 떠올랐다. 할머니의 친구인듯 보이는 낯선 할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제 할머니를 챙겨야돼. 나이가 들면 아이가 되니까."
하지만 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 지는 알았다. 그 말 그대로 할머니를 챙겨드려야했다. 전화하고, 찾아뵙고, 이야기하면서. 그런데 난 그러지 못했다. 할머니가 정은이는 전화도 없다면서 못됐다고 욕했다고 그랬다. 난 감정에 솔직해진, 그래서 아이가 된 할머니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내가 열여덟살 때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2학기 중간고사가 코앞이던 시기였다. 엄마는 언니에게 학교에 있는 나에게 괜히 알리지 말라했고, 나는 학교가 다 끝나고 독서실에 도착한 저녁에야 그 이야기를 들었다. 장례는 울산에서 치러졌다. 할머니께 아프게 된 후로 외가 친척이 있는 울산으로 거처를 옮겼기 때문이다. 난 시험기간이라 가지 못했다. 다음날 저녁 학교에서 장례식장이라는 사촌오빠의 전화를 받았다. 오빠는 나를 나무랐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울었다. 그 날은 내가 신청한 '독거노인 말벗 되어드리기 봉사' 관련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한 날이었다. 야자 시간에 사람 없는 계단에 앉아서, 나는 내가 하는 행동들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고 끝까지 못됐는지를 생각하며 한참을 울었다.
엄마는 때때로 할머니 얘기를 꺼내곤했다. 혼자 그렇게 외롭게. 너무 불쌍하다고. 나는 그때마다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죄책감은 이따금씩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뭘 잘했다고.
그랬던 내가 <코코>를 보며 할머니를 떠올린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승에서 누군가가 계속 기억만 해준다면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빛나게, 즐겁게, 노래 부르고 춤추며 멋지게 살 수 있는 곳. 끝없는 어둠도, 고통스러운 불구덩이도 아니고 화려하고 총천연색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곳. 할머니가 그 곳에 있다면, 그래서 너무나도 즐겁게 살고 있다면, 내 죄책감이 조금은 덜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난 끝까지 이기적이고 못됐다. 그래도 간절히 바라본다. 할머니가 탭댄스도 추고 기타도 치고 파티도 즐기고 그렇게 신나게 살고 있기를. 평생 잊지않고 기억하고 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