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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ekparis Dec 20. 2018

스위스에서의 다섯 번째 크리스마스


무엇이든 처음이 주는 의미가 유독 크게 다가와 특별한 기억으로 자리 잡는 순간이 있다. 대부분의 첫사랑, 첫 키스, 첫 직장, 첫걸음마 등이 그러하듯이.


내가 아홉 살 때였나.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무심코 베란다로 나갔다가 괜한 호기심에 들여다본 쇼핑백에서 예쁘게 포장된 선물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어린아이의 촉이 발동한 순간. 의문을 품기에 충분한 나이었나 보다. 혹시, 제발 아니길 바라는 의혹과 부정의 마음을 꽁꽁 숨긴 채 이윽고 잠든 척을 해가며 버틴 크리스마스 전 날 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빠의 손에 들린 내가 본 그 포장지를 보자마자 내 동심이 무너지던 그날 밤. 산타 할아버지가 우리 아빠였다니. 그동안 내가 속았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탓에 애써 잠든 척하던 실눈이 온 힘을 다해 질끈 감겼던 밤. 아홉 살이면 꽤나 오랫동안 속은 건가? 어쨌든 그 이후로는 크리스마스가 시큰둥해져서 케이크 사다가 가족들과 함께 초 불고 끄는 연례 행사의 날로 전락해버렸다. 동심 파괴의 씁쓸한 결말.


거리에서 쉽게 보이는 크리스마스하면 떠오르는 빨간 열매
테라스에 놓을 조명 장식을 두고 심각하신 할머니들.


반면, 유럽에서의 첫 크리스마스는 전혀 달랐다. 마치 피터팬의 네버랜드로 초대된 기분이었달까.

22살 겨울, 가장 친한 친구 두 명과 즉흥적으로 떠난 영국 런던. 그저 ‘크리스마스 시즌이겠네’하며 갔다가 ‘이래서 크리스마스 시즌이구나’ 감탄했던 기억들로 가득한 그 해 나의 첫 유럽 크리스마스. 거리 곳곳, 가게마다 크리스마스 장식은 물론 어느 순간부터 찾아들었어야 했던 캐럴이 저절로 울려 퍼지던 런던. 게다가 각종 아이템들 및 먹거리를 판매하는 크리스마스 마켓은 내게 별천지 같았다.


사실 한국에서의 크리스마스는 크리스천을 제외하고는 그저 아이들의 기쁨이자 커플들의 설렘일 뿐, 온 국민이 다 함께 즐기는 문화는 아니니까. 어쩌면 그렇기에 더더욱 별천지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이후 프랑스에서 결혼을 하고, 스위스에서 삶을 이어나가며 해가 갈수록 느끼는 건 유럽에서의 크리스마스는 우리의 명절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제는 애가 둘이나 있으니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실감할 수밖에. 종교를 떠나 그저 불 밝힌 집집마다의 풍경이 좋고, 아이들의 들뜬 마음에 기쁘고, 모두가 조금은 더 미소 짓는 거리의 풍경이 좋다.



별이 쏟아 내리는 듯한 취리히의 거리 풍경.
과하다 싶을 정도의 크리스마스 분위기 물씬 풍기는 쇼윈도.
크리스마스 호황을 준비하는 장난감 가게의 쇼윈도.
꽃집들은 저마다 겨울 느낌 가득한 나무와 꽃, 열매들로 가득 채웠다.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의 소시지 냄새.



매년 빠지지 않고 찾는 크리스마스 마켓.

도시 곳곳에 크고 작은 크리스마스 마켓들이 열린다. 여러 국가의 여러 마켓들을 다녀봤지만 그중 가장 으뜸이라 생각되는 곳이 취리히다. 너무 심하게 북적이지도, 테러 위험도 적으면서 깔끔하게 예쁜 곳.





어린 시절 앨범을 들여다보면 누구나 한 장쯤은 갖고 있을법한 산타 할아버지와 찍은 어린이집 혹은 유치원 시절 사진. 지금 보면 누가 봐도 젊은 아르바이트생 혹은 터무니없는 변장이었지만 그때는 어찌나 실제 같았던지. 아무튼 이곳 스위스에서도 세인트 니콜라스(Saint Nicolas)가 등장했다.


첫째 아이가 다니는 숲 학교의 바비큐 시간. 한창 준비해 간 소시지를 먹으며 모닥불 앞에 앉아있는 도중에 캐럴 가사 그대로 종소리를 울리며 등장한 세인트 니콜라스. 덕분에 이 날 이후로 첫째 아이의 착한 일 횟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


이제는 농장에 직구하러 갈 차례다. 플라스틱 모형 트리 대신 향기 폴폴 나는 전나무를 직접 집에 들여 트리 장식을 한다. 매년 찾아가는 단골 농장.




사이즈와 비용을 알아본 뒤 원하는 나무를 골라 밑동을 예쁘게 잘라 그물망에 넣어 차에 싣는 작업까지 순식간에 진행된다.





그렇게 올해도 우리 집에 찾아온 전나무 한 그루. 그물을 벗길 때의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매년 한 두 개씩 구매해 온 오너먼트들이 모이니 어느새 제법 된다. 아이들도 제 손으로 오너먼트들을 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찌나 감회가 새롭던지. 한 해가 다르게 쑥쑥 큰다. 온 가족이 달려들어 한 시간 넘게 공들인 올해의 트리가 완성됐다. 나는 풍겨오는 전나무 향이 좋아 자꾸만 주변을 서성이고, 아이들은 자신의 키보다도 두 배가 넘는 트리를 올려다보며 오너먼트 구경에 한창이다. 그야말로 소소하고도 확실한 행복의 순간.



아인지델른 수도원 앞 크리스마스 마켓
루체른 크리스마스 마켓
주말에는 각종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다니느라 바쁘다.
선물과 카드도 잊지 않고 준비했다.


이제 정말 코앞으로 다가온 크리스마스.

내일이면 남편은 3주 휴가에 들어가고, 다음날엔 시부모님과 친정 식구들이 도착한다. 그야말로 제대로 된 명절의 시작이다. 매일매일 크리스마스 캘린더 속 당일 날짜에 해당하는 숫자의 상자를 열어 초콜릿을 먹으며 기다리는 우리 아이들도 당장 다음 주면 산타 할아버지가 온다는 사실에 제대로 잔뜩 신이 난 상태다.

부디 내 아이들은 나보다 더욱 오래도록 속아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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