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살 적 여름은 일 년 중 유일하게 고요한 순간이었다. 특히 8월의 파리는 모두가 휴가를 떠나고 레스토랑 및 상점마저 한 달 가까이 문을 닫는 탓에, 도시 전체가 주인 잃은 빈집이나 다름없었다. 그 와중에 집을 지키고 있던 나와 남편 같은 파리지앵들에겐 비로소 숨통이 탁 트이는 순간이었다.
반면, 스위스는 다르다. 집 나간 주인이 돌아온 기분이랄까. 겨우내 어디 숨어있다 이제 나타났나 싶을 정도로 여름의 스위스는 곳곳에 사람들로 넘쳐난다. 근데 또 그게 어찌나 반가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길고 긴 겨울이 끝난 기쁨에 온기가 더해져서인지 그저 반갑고 활기에 차올라 행복지수가 한없이 상승하는 듯한 순간이다.
스위스 여름의 시작은 체리가 알린다. 내가 거주하는 추크(Zug) 주의 지역 특산물인 체리가 곳곳에 주렁주렁 열리는 탓에 모르려야 모르고 지나칠 수가 없다.
덕분에 이맘때의 우리 집 식탁은 체리로 채워진다. 동네 농장에서 직접 체리를 사다 먹는 직구는 당연한 일상이다. 올해는 특별히 우리 집 뒷마당 체리나무가 7년 만에 첫 열매를 맺었다. 뒷마당에서 난 체리라니. 실로 오랜만에 이색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뒤이어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됐다.
여름은 도시 곳곳, 길거리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어 사람들의 옷차림에 번진다. 오래도록 그래왔듯 도시에 살았으면 맞이했을 당연한 코스였지만, 조그마한 마을에서 맞이하는 코스는 다르다.
옆집, 뒷집 할 것 없이 너도나도 피워대는 바비큐 연기가 퍼져나갈수록 여름이 무르익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집에서뿐만이 아니다. 호수, 숲, 산, 들판 어디든지. 이래도 되나 싶게 자유롭다. 테이블과 그릴은 기본에 땔감마저 준비되어 있는 바비큐 장소들이 많아 여름의 스위스 이미지를 자연보다 바비큐의 나라로 바꿔도 되겠다 싶을정도로. 물론 건조한 날씨에는 바비큐 가능 여부를 나타내는 지도를 확인한 뒤 결정한다. 이 또한 스위스답다. 바비큐 가능 여부 확인 지도라니. 바비큐 냄새와 더불어 우리 집 테라스 풍경 또한 확 달라진다.
그야말로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수영장으로 바뀌는 테라스. 진짜 수영장을 가지고 있는 옆집에 비하면 조촐하지만 이 순간 내 아이들에게 이만한 행복이 또 없다.
햇빛은 뜨거워도 부는 바람 덕에 시원한 그늘 아래서 지켜보는 나 또한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순간이다. 그러다 유난히 더운 날엔 함께 풀에 들어가 아이들과 물장난 치는 재미까지, 완벽하다.
여름의 스위스는 갈 곳과 해야할 것 천지다.
주말마다 빠지지 않고 했던 숲속 산책으로 산림욕하고, 스위스엔 바다가 없으니 해수욕 대신 매일 호수욕으로 꽉 채워지는 일상. 매일 해도 지겹지 않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동네 호수는 긴 여름방학을 맞은 엄마와 아이들에게 필수 요소다. 특히나 엄마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만병통치약에 가깝달까. 호수에서 수영이라니. 생각해본 적 없던 일이었다. 호수 수영은 바다 수영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물 밖에 나온 뒤엔 소금기의 찝찝함과 끈적임 없이 그야말로 깔끔하다. 물속에선 물고기가 나다니는 게 보일 정도로 맑은 물에 경치가 덤으로 선사되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특히나 우리 동네 호수는 스위스에서 수영하기에 가장 깨끗한 호수로 손꼽힌다.
직장인들마저 점심시간에 수영하고 태닝하다 회사로 돌아가는데, 그에 비해 시간 부자인 아이들은 매일 시도 때도 없이 물놀이가 당연했다. 때문에 놀이가 곧 조기교육으로 직결된다. 사실 교율이랄 것도 없이 자연스레 놀면서 터득하게 된다. 초여름까지만 해도 물에 뜨는 것조차 무서워하던 첫째 아이가 여름이 무르익을수록 물에서 나오기를 싫어할 정도로 수영의 재미에 푹 빠졌다. 심지어 스노클링 장비를 착용하고 물고기 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축복받은 환경에서 커가는 이곳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나조차도 부러울 지경이다.
스위스의 여름은 가뜩이나 멋진 경치에 쨍한 날씨가 더해져 그야말로 어디 한 곳 안 이쁜 구석이 없다. 배경이 다 했고, 날씨가 다한 인생 사진들을 여럿 건질 수 있는 시기.
이곳의 여름이 기다려지는 이유 중 또 다른 하나는 겨우내 금지되었던 길들이 열린다는 사실이다. 눈이 다 녹을 때까지 기다리다 6월이 되어서야 도로 위를 달릴 수 있는 곳들. 아찔하고 꾸불꾸불한 산길만큼이나 시선을 사로잡는 풍경, 산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내려가는 온도의 체감 덕분에 일부러라도 한 번은 지나가봐야 할 길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 길을 지날 때마다 아쉬운 감탄사가 쏟아져 나온다. “이 풍경을 사진 속에 다 담는 법을 모르겠어!” 그래서 이윽고 카메라 내려놓고 두 눈에 가득 담기에 전념할 뿐이다.
어디든 초록, 파랑색으로 가득하다.
그닥 자연주의자가 아니었던, 사실 도시찬양자에 가까웠던 내가 점점 자연이 좋아지는 걸 보면 삶의 환경이 일상과 인생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새삼 실감한다.
모두 알다시피 스위스 언어는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망슈어 4개다. 그 중 내가 거주하는 추크(Zug) 주는 독일어권인데 스위스 중심부에 근접해있어 어디든 이동이 수월한 장점이 있다. 때문에 비가 오고 흐린날은 차로 한시간 반을 달려 이탈리아어권으로 향한다. 산 하나를 넘으면 완전 다른 날씨. 터널을 통과하자마자 이럴 수 있나싶게 쨍하고 화창한 날씨와 마주한다. 뿐만 아니라 음식, 풍경, 언어, 도시 분위기 등의 차이가 확연해서 이태리에 온 느낌을 조금이라도 만끽할 수 있다. 때문에 해가 긴 여름에는 세시간을 달려 국경 넘어 이탈리아에 당일치기로 여행하고 오기 좋다. 비현실적이게 이상적인 현실이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하나 더 보태기. 바로 밤하늘이 그 주인공이다.
몇 년 전, 그리스 여행에서 내 인생 처음으로 별똥별과 은하수를 보았다.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싶어 눈에 담으려 애썼던 기억이 무색하게, 현재는 고맙게도 당연한 나의 여름밤이 되었다. 그때만 해도 은하수가 한눈에 보이는, 누워서 별똥별을 구경하는 정원 딸린 스위스에서 살 거란 상상조차 못했는데 말이다. 그래서 적어도 나에겐 스위스니까 가능한 여름이 유독 특별하고 매년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