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하지 않아도 괜찮아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 꿈이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던 그 순간부터 책을 내는 것은 마음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던 아득하지만 뜨거운 소망이었다.
스무 살 즈음이었나. 꼭 유명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다. 야무진 그 다짐의 이유는 유명한 사람이 되어서 이름이 널리 알려져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줄 사람들이 많아졌을 때 내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나름대로는) 꽤 많은 발걸음들을 걸어 서른셋의 가을에 도달했다. 많이도 넘어졌지만 늘 넘어진 횟수보다 딱 한번 더 일어나면서 여기까지 왔다. 안타깝게도(?) 당찼던 스무 살의 포부와는 다르게 아직 유명한 사람이 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 거창한 이유의 뒤에 숨어서 평생의 꿈을 유보해왔다.
앞에 3자가 달린 나이가 되면 본인이 하고 싶은 일쯤은 확실히 아는 어른이 되어 그 일을 누구보다 뛰어나게 해내고 능력을 인정받는, 어떤 상황에서도 해답을 알기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그런 커리어 우먼이 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서른도 진-작에 지나버렸지만 열여섯에도, 스물셋에도, 스물일곱과 스물아홉에도 했던 지겹게도 반복하는 같은 물음에 대한 해답을 여전히 찾지 못했다.
대체 난 무슨 일을 하며 살고 싶은 걸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가장 즐겁게 그리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것쯤은 알지만 대안을 (아마도 아직) 찾지 못해서 마음속에 매일 사직서를 품고 출근하는 그런 월세 살이 송파구 주민 33살 ‘일반인’ 김 모 씨이다. 세계적인 ‘유명한 사람’ 스티브 잡스 씨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만약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그래도 오늘 하려는 것을 하게 될까?라고 물어 여러 날 동안 그 답이 ‘아니오’라고 나온다면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고 했는데…
직장인들이 가장 우울해진다는 일요일 저녁이었다.
일 년에 며칠 없는 선선한 바람이 부는 참으로 아름다운 가을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문득 무서운, 그러나 어쩌면 현실적인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나는 평생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더 어렸던 날의 내가 어떤 모습의 삶을 “유명한 사람”의 삶으로 정의했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사실은 ‘무슨 일을 하면서 살고 싶은 걸까?’ 이 질문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어렵고 답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는 평생 같은 고민을 끊임없이 하면서 살 운명일지도 모른다. 평생 해답은 모르는 채로.
글쎄, 잘 모르겠다.
그냥 날씨가 좋아서, 살짝 생각해본다. 무엇을 하고 싶은 지 모르면 어떠냐고, 그리고 거창하지 않으면 어떠냐고. 다행인 것은 이런 마음이 더 이상의 큰 포부는 없기 때문에의 자기 합리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유명하지 않은 삶들도 각자의 아름다운 색깔을 가지고 빛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각자의 애잔하고 따뜻한 스토리를 안고서, 다른 평범한 삶들에 서로 의지하고 기대면서, 그러나 독립적인 본인만의 색깔을 가지고 다채롭게 어우러져 빛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리라. 이제는 그 색깔들 속에 튀지는 않지만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삶의 아름다움을 알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아득한 언젠가의 이후로 가슴속 뜨거운 소망을 묵인하고 미루지 않겠다고 생각해본다. 인생만큼이나 고민 많고 다듬어지지 않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날 것의 내 문장들에 대해서도 욕심부리지 않고, 다만 스스로에게 그리고 내 인생에 와준 많지 않지만 소중한 이들에게 나눌 수 있는 한 숨 돌릴 작은 공간이 되었으면 바라본다.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다.
가장 평범한 직장인의 삶으로 돌아가기 몇 시간 전 일요일 밤에, 높아진 가을 하늘 총총한 별을 뒤로하고, 참으로 오랜만에 가슴에 문장들을 안고 걸었다. 따뜻한 문장들을 가슴에 담고 있을 때, 그 문장을 얼른 풀어내고 싶어 발걸음이 빨라지는 때에 나는 가장 빛나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