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나를 울린 드라마의 여성들에게 배우다
난 여전히 드라마가 참 좋다. 여유시간이면 어김없이 스마트폰이나 패드를 들고 소파에 누워 드라마를 시청한다. 그리고 드라마의 인물들이 펼치는 마음의 세계로 빠져든다. 영화나 다른 매체보다 호흡이 길고 이야기의 연속성이 있는 드라마는 인물들의 사연을 정교하게 묘사하기에 좋은 장르다. 긴 호흡 속에 인물들의 행동과 심리가 비교적 잘 드러나기에 상담심리사로서 마음의 일에 관심이 많은 내겐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그러다 닮고 싶은 인물을 만났을 때는 행복감마저 느낀다.
2023년엔 나를 행복하게 한 드라마 속 인물이 세 명이나 있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정의한 여성들'이다. JTBC <닥터 차정숙>의 정숙(엄정화), 넷플릭스 시리즈의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들레(이이담), 그리고 JTBC <신성한, 이혼>의 서진(한혜진)이 이들이다. 이들을 만나면서 나 스스로도 당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싶어 상담소를 찾는 내담자들에게도 소개하고 싶은 이 세 여성. 이들이 스스로를 정의한 과정을 다시금 돌아본다.
차정숙 : 가부장제와 선 긋고, 나를 찾다
JTBC <닥터 차정숙>의 정숙은 의사면허가 있지만, 주부로서 20년 넘게 가족에게 헌신하며 살아온 인물이다. 아이들을 키우고 남편을 내조하며, 시어머니까지 모시는 정숙은 드라마 초반엔 이런 자신의 삶을 의미 있다 여긴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인해 간이식 수술까지 받게 되는데, 가족들은 그녀를 걱정하기보다는 그녀의 빈자리를 불편해할 뿐이다. 정숙이 퇴원해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자신들이 편해졌음을 더 반긴다.
이에 '가족에게 나는 무엇이었을까?'를 질문하던 정숙은 마침내 깨닫는다. 자신이 가부장 사회에서 규정한 도구화된 여성의 자리에 놓여있었음을 말이다. 그리고 의사로서 수련을 시작하며 삶의 주체가 되고자 한다. 하지만, 변화를 시작한 초반 정숙은 남편에게 허락을 구하고 아이들에게는 끊임없이 미안해한다.
이런 정숙의 모습은 여성에게 내면화되어 있는 '내 안의 가부장'을 떠올리게 했다. 시드라 레비 스톤이 책 <내 안의 가부장>에서 언급한 '내 안의 가부장'은 오랜 가부장제 문화 속에서 여성 스스로가 내면화한 가부장제의 메시지들을 뜻한다. 이런 메시지 때문에 많은 여성이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에 누군가의 승인을 받으려 하고 이를 실천하면서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정숙은 이 '내 안의 가부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을 보여준다. 비록 남편의 외도라는 충격적인 일을 겪은 후이긴 하지만, 정숙은 "시어머니와 남편과의 상의는 필요 없다"며 독립을 선언한다. 정숙을 좋아하는 로이킴(민우혁)이 조언할 때도 "제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저 스스로 찾아볼게요"라고 말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해 간다. 그리고 마침내 드라마 말미 정숙은 자신의 만의 색을 담은 가정의학과 의원을 개원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게 된다.
정숙은 이렇게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며 행복해지는 법을 잘 보여주었다. 여기저기 '미안해'하며 살고 있는 현실의 많은 여성에게 귀감이 되어 주었으리라 믿는다.
민들레 : 엄마를 버리고, 나 자신이 되다
한 사람을 그 자신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뿌리 깊게 박힌 가부장제만이 아니다. 때로는 부모나 가까운 이들, 그러니까 원가족(내가 태어난 가족)이 내 삶을 막아서기도 한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들레는 자신을 침해하는 엄마를 버리고 자신을 찾은 매우 용기 있는 여성이었다.
인정받는 간호사 들레는 열심히 일하지만, 표정이 없다. 실수 없이 환자들을 대하지만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그녀에겐 도박에 빠진 엄마가 있다. 들레는 엄마의 빚을 대신 갚아주며 빠져나오지 못하는 늪 속에서 헤맨다. 그런 그녀는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여환(장률)에게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한다. '금수저' 여환에게 "자신을 만나는 건 똥 밟는 것"이라며 모질게 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들레의 세계를 이해하고 존중하려고 애쓰는 여환의 모습에 들레는 조금씩 마음을 연다. 그리고 마침내 "엄마를 버려라. 내 환자들이라면 이렇게 말해줬을 것"이라는 여환의 조언을 실천해 낸다.
어쩌면 들레의 이런 모습이 모질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부모도 저마다의 사연과 상처가 있는 사람이기에 안쓰럽기도 하고 그런 부모를 감싸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부모의 언행이 나의 삶을 방해하고 고통 속으로 몰고 간다면 들레처럼 단호한 용기를 낼 필요가 있다. 이는 나를 지키는 방법이기도 하고, 오히려 부모를 위한 길이기도 하다.
들레의 경우, 들레가 더 이상 어머니에게 돈을 주지 않음으로 해서 어머니 역시 도박을 멈추고, 자신의 삶을 돌아볼 기회를 갖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들레가 어머니의 도박 빚을 대신 갚아주는 것은 상대방을 도움으로써 오히려 그를 망치는 '인에이블러'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럴 땐 단호하게 선 긋고 도움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상대방과 나 모두를 구하는 길이 된다. 하지만, 나를 부모에게 속해 있는 존재로 바라보는 효 사상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 이는 무척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들레는 이 어려운 일을 해낸 정말 용감한 여성이었다. 더 손뼉 쳐 주고 싶은 건 엄마를 버리고 간 종착지가 '남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엄마로부터 독립할 수 있게 도와준 여환에게 의지하는 것을 해피엔딩이라 생각했을 것 같다. 하지만 들레는 여환의 품 대신,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떠난다. 여환 역시 이런 들레를 진심으로 응원해 주는데 이 커플은 서로를 소유하거나 구속하지 않으면서 존재 자체로서 사랑하는 법을 잘 보여주었다.
이서진 : 아픔을 수용하고, 나를 긍정하다
<신성한, 이혼>의 서진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스스로를 정의해 낸 여성이었다. 유명 DJ였던 서진은 남편의 학대 속에 지내다 외도를 하고 만다. 외도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고, 대중들의 비난은 서진을 향한다. 서진은 일자리를 잃고, 바깥 외출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 놓인다. 아마도 이런 상황이라면 남편의 폭력을 세상에 알리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진은 다른 선택을 한다. 그저 자신이 해야 할 것들과 하고 싶은 것을 하기로 말이다. 우선 그녀는 아이를 지켜낸다. 자신에게 집착했듯 아이에게도 집착하는 남편으로부터 아이를 구해내기 위해 신성한 변호사(조승우)를 찾아와 법의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자신의 외도가 아이에게 상처가 되었음을 인정하고 아이의 마음을 살피며 진심으로 사과를 한다. 그렇다고 아이를 위해 애써 '괜찮은 척'하며 지내지도 않는다. 자신에게 괜찮냐고 묻는 아이에게 "엄마는 솔직히 아직은 괜찮지 않아"라고 말하며 자신이 아프고 상처받은 상태임을 수용해 낸다. 그리고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세상 속으로 나아가며 아이와 쇼핑을 하게 되고, 마침내 인터넷 방송에 복귀하게 된다.
이렇게 서진은 나의 상처와 고통, 과오를 부인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마주하면서 동시에 내게 가치 있는 것을 하나하나 해나가며 자신을 회복해 간다. 이는 '수용전념치료'에서 말하는 자신을 판단하지 않고 수용하며, 나만의 가치를 향해 나아가는 그 길을 실천하는 모습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의 고통을 판단하지 않고 수용할 수 있을 때, 그 상처로부터 규정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서진은 이를 몸소 실천한 여성이었다.
"남편 죽었어요" (정숙)
"저 엄마 버렸어요." (들레)
<닥터 차정숙>의 정숙이 남편은 뭐 하냐는 동료들의 질문에,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들레가 엄마와 손절한 후 내뱉은 말이다. 나는 이 말들이 여성이 스스로를 정의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한 여성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자로부터 정의되어 온 가부장제의 잔재들을 끊어낼 필요가 있다.
또한 자신이 원가족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인식하되, 원가족의 사정이 곧 나의 사정이 될 수는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내 안의 가부장을 끊어내고, 원가족과 나를 분리해 바라보면서 <신성한, 이혼>의 서진처럼 이것들로 받은 상처와 아픔까지 수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마침내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안녕하세요. 저예요." (서진)
새해에는 보다 많은 여성들이 "이게 나예요"라고 당당히 자신을 정의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 역시 그리될 수 있기를!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