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인물 탐구생활 96] tvN <내 남편과 결혼해 줘>의 지원
'싸우는 법을 몰라서 그렇게 끔찍하게 살았잖아. 모르면 배우면 돼. 양심 같은 거 없는 인간들에게 다 빼앗기는 거 이제 그만해야지.'
tvN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 줘>의 주인공 지원(박민영)은 2013년으로 돌아간 후 이렇게 다짐한다. 그리고 첫 번째 생과는 다르게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대하며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자 노력한다. 조금은 자극적이고, 때로는 막장스러운 설정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할 때도 있지만, 지원이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애쓰는 과정은 꽤나 흥미로웠다.
특히, 2023년까지 살아본 지원은 10년 후의 관점으로 2013년의 자기 자신을 관찰한다. 그러자 이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보게 되고, 이를 통해 많은 것들을 깨달아 간다. 이 과정은 심리학적으로도 꽤 타당해 보였다.
<내 남편과 결혼해 줘>의 지원이 변화할 수 있었던 진짜 이유에 대해 살펴본다.
나 자신에게 매몰되어 있을 때
2023년의 지원은 위암 말기 환자다. 사내 연애 끝에 민환(이이경)과 결혼했지만, 남편과 시어머니의 온갖 구박을 다 받아내며 버티다 결국 큰 병을 얻는다. 하지만 가족들은 생사를 오가는 그녀를 돌보기는커녕 죽기만을 기다린다. 그렇게 외롭게 병원에서 지내다 병원비마저 연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 지원은 남편을 찾아 집에 가지만, 거기서 맞닥뜨린 것은 남편과 자신의 평생 친구 수민(송하윤)의 외도장면이다. 이에 지원은 분노하지만, 남편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이 첫 번째 생에서 지원은 자신을 이용해 온 수민을 '좋은 친구'라 여기고, 민환의 폭력적인 행동에도 저항하지 않는다. 시어머니의 욕설도 그저 받아낼 뿐이다. 회사에서 받는 부당한 대우에도 의문을 달지 않는다.
이는 지원이 5회 스스로 고백하듯 '혼자되는 두려움'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어린 시절 집을 떠나고 아버지까지 여읜 후, 세상에 혼자 남겨진 지원은 "배를 타고 있는 것처럼 울렁거리는 상태"로 지낸다. 사랑하는 이들이 자신의 곁을 모두 떠난 이 경험은 삶에 안정감을 잃게 했을 것이고 이에 지원은 안전하게 지켜줄 누군가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대상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수민과 여성을 자신의 욕구를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는 민환이었던 셈이다.
사실 지원 역시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혼자되지 않기 위해' 지원은 자신의 마음을 애써 모른척하며 이들에게 맞춰주며 지낸다. 이렇게 어떤 감정에 매몰되어 있을 때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보지 못한다. 오직 두려움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살아갈 뿐이다.
거리를 두고 바라보자 보이는 것들
그런 지원이 사망한 후 다시 눈을 뜨고 마주한 세상은 2013년. 처음엔 어리둥절 하지만, 곧 지원은 이것이 자신의 삶을 바로잡을 기회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2023년의 자아로 2013년의 자신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관찰하는 자기'가 발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관찰하는 자기'는 쉽게 말하면 일기를 쓰고 있는 나 자신과 같은 개념이다. 일기를 쓸 때 우리는 일기 속에서 행위하는 나 자신을 관찰한다. 내가 나를 관찰하는 이 힘은 '나는 ~한 사람이야'라는 개념을 점검하게 해 주고, 내가 경험하는 것들의 의미를 발견하게 도와준다. '관찰하는 자기'를 활성화시키는 것은 심리적으로 건강해지고 삶을 보다 충만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다.
이렇게 지원은 10년이라는 거리를 두고 자기 자신과 주변 상황을 관찰한다. 그러자 '홀로 되는 두려움'에 빠져 자신을 둘러싼 온갖 폭력들을 허용해 왔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수민이 자신에게 잘해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양보하게 만들며 이용해 왔음을, 민환이 잘해줄 때는 뭔가 자신에게 얻어내려 할 때뿐이라는 걸 말이다. 지원은 이런 순간들을 이렇게 표현한다.
'왜 그렇게 반성하고 움츠러든 채 살았을까.' (3회)
"요즘 깨달은 게 있거든요. 그동안 남한테만 맞춰 살아서 제 자신을 몰랐던 것 같아요." (4회)
'와 어떻게 까맣게 몰랐지? 좋은 데 가자는 말도 그나마 뭔가를 얻어내려는 수작이었는데.' (7회)
이를 깨달은 지원은 이들에게 단호하게 행동하며 자신을 지켜내기 시작한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 같아 때론 눈물짓기도 하지만, 결코 자기 자신을 지키겠다는 다짐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지원이 마주한 현실은 '여성의 현실'
민환과 수민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상황을 거리를 두고 관찰하면서 지원은 회사 안에도 곳곳에 폭력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툭하면 "여자들은 이래서 안 돼"라며 성차별 발언을 하는 김경욱 과장(김중희), "이렇게 예쁜 여직원이 행사의 꽃이 되어야 한다"는 왕흥인 상무(정재성)가 보이고, 자신이 전과는 다르게 꾸미고 나타나자 남자친구가 회사 직원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마주한다. 열심히 일하면 남자들에게 매력 없다고 욕먹고, 일에 서툴면 이래서 여자들은 안된다고 비난받는 이중구속의 메시지도 감지해 낸다.
나는 드라마 속 지원이 처한 이런 상황이 어쩌면 실제 여성들의 현실이 압축된 버전이 아닐까 싶었다. 드라마처럼 차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은 이제는 많이 줄었다. 하지만, '결혼해서 메롱' 되고 '안 예뻐서 메롱' 됐다는 여자 직원을 품평하는 김 과장의 멘트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암묵적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지원은 이런 현실에도 저항한다. 수민을 제외한 다른 여성 동료들과 연대해 대응하기도 하고, 미래를 알고 있다는 장점을 이용해 왕 상무를 날려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관찰하는 자기를 활성화해 자신과 주변을 새롭게 보고 용기를 내 저항하자, 운명인 줄 알았던 현실도 조금씩 달라진다.
이렇듯 지원은 우리가 스스로를 조금 멀리 떨어져서 관찰할 때 어떤 힘이 생기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관찰하는 자기를 활성화하는 것은 나 자신은 물론, 나를 둘러싼 환경의 모순까지 알아차리게 해 준다. 반면, 2023년의 지원이 그랬듯, 스스로를 관찰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매몰되어 있을 때 우리는 나를 괴롭게 하는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현실의 부조리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관찰하는 자기의 활성화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지금, 무언가 억울하고 어딘지 삶이 훼손되고 있다고 느낀다면 조금 멀리 떨어져서 나 자신과 주변을 관찰해 보자. 일기를 쓰는 내가 되어, 일기 속의 나를 관찰해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주변이 보일 것이다. 그럴 때 나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는 것은 물론, 우리를 둘러싼 차별과 편견, 폭력들을 잘 보게 되고, 이에 저항할 힘을 갖게 되지 않을까. <내 남편과 결혼해 줘>의 지원처럼 말이다.
덧) 이 드라마를 볼 때 역시 스토리에 매몰되거나 빠져들기보다는 조금 거리를 두고 '관찰하면서' 보기를 추천한다. 드라마가 보여주는 여성에 대한 폭력은 현실을 반영하지만, 드라마 자체의 시선 역시 여성을 '대상화'하기 때문이다.
민환을 유혹하는 수민의 몸을 비추는 장면들, 민환과 친구가 여성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심지어 여자 친구의 친구와 잤다는 걸 자랑한다), 여자친구가 예뻐졌다며 민환을 회사의 사원들 모두가 부러워하는 장면 등은 여성을 대상화한 시각이 드러난 부분이었다. 나는 이런 장면들이 이야기 전개상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분들과는 거리를 두고 조금은 비판적인 시각으로 시청하길 바란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