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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굳찌 Feb 27. 2023

내가 쓴 돈은 나다

나의 영수증 일기 001

미처 정리되지 못하고 남은 것.

내게 그것은 영수증 더미다.


2월이 끝나기 전, 대강대강 하느라 빠져있던 지난 두 달 영수증을 정리했다. 내게 숫자와 제목만 적힌 가계부는 전혀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돈을 번 이후로 늘 꾸준하게 <가계부 쓰기>를 실패해 왔다. 잡지에서 주는 '부록' 가계부, 돈 주고 산 '금전출납부', 먼저 결혼한 친구가 쓰던 가계부 파일, 심지어 유명 인플루언서가 만들었다는 '엑셀 가계부'를 5만원이나 주고 산 적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가계부들은 내 삶의 어떤 것도 개선시키지 못했다. 때문에 나는 더욱 더 가계부를 왜 써야 하는지 모르겠고. 그래서 꾸준히 쓰지를 못한다. 사실 '가계부를 쓴다'는 말도 나는 잘못 됐다고 생각한다.


쓴다고? 뭘? 뭘 썼는데?


가계부에 보면, 날짜와 돈을 표기하는 숫자들, 그리고 그게 뭔지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는 상호나 몇가지 단어밖에 없는데? 그게 쓴거야?


하지만 가계부는 잘못이 없다. 아마도 나는 '문과적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이과적 인간'들은 날짜와 돈, 그리고 카테고리와 제목만을 잔뜩 적어놓고도 무언가를 읽어 낸다. 그 재미없게 생긴 숫자표를 보고 분석한 후에, 돈을 모으기도 하고, 반성도 하고, 삶을 개선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쓰기도 한다.


문과적 인간은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 아무리 꾸준히 쓰려고 해도 써지지 않는다. 이걸 쓴다고 표현하는 자체가 마음에 안든다, 뭐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다. 왜냐고? 숫자 속에서 의미를 잘 발견하지 못한다. 숫자들의 덧셈 뺄셈을 한 후 기껏해야 한다는 소리가, '뭐야? 왜 이렇게 많이 썼어? 미쳤나봐!' 뭐 이정도?


일주일치 가계부를 적기 위해 이과적 인간이 영수증에 적힌 날짜와 금액을 옮겨 적으며 카테고리별로 계산하기를 10분만에 끝낸다면... 나는 1시간, 2시간 동안 정리한다.


그래서 새해들어 '영수증 읽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돈 사용에 내 삶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렇게 문과적 인간은 돈 관리를 삶 관리에 활용한다.






1. 돈까스클럽/ 12월 8일/ 3만6천7백원

나는 이날 ‘국물떡볶이 돈까스’를 먹었다. 한국에 와서 돈까스 집에 갔다가 떡볶이와 돈까스를 같이 먹을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과 탄복을 반복하면서 주문했다. 10,900원이었는데 너무 양이 많아서 갈 때 마다 포장해 온다. 맞다, 여러 번 갔고 여러 번 주문했다. 하나 마음에 들면 그 음식이 살짝 질릴 때 까지 반복해서 먹는 패턴을 가졌다. 대학생 때 발견했던 습관인데 아직까지 가지고 있다.

그러고보니 ‘오렌지 쥬스’ 2개는 0원이다. 서비스였나? 갑자기 좋은 음식점이란 생각이 든다.   


2. 나이스 파크/ 12월 9일/ 3천원

지난 달, 나는 나이스 파크에서 3천원짜리 주차를 했다. 내가 나이스(nice)하게 주차 했는지 낫나이스(not nice)하게 주차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 시공간에 내 차를 맡긴 댓가로 3천원을 주고 내 볼일을 봤다. 바쁜 날이었고 추운 날이었다. 늘상 주차비는 아까운데 이 날 3천원은 가치 있었다.  


3. SS더 프레쉬/ 12월 12일/ 1만9천2백4십원

편의점 이름이 너무 어렵다. 요즘 한국 영어식 상호명에는 ‘더’를 붙이는게 유행인듯 하다. ‘더 좋은’, 더 행복한’, ‘더 나은’에 쓰이는 의미의 ‘더(better, more)’는 아니다. 영어 문법에서 고유한 의미를 나타내는 정관사 ‘the’의 의미로 쓰이는 듯 하다. 그러니까 프레쉬(fresh)한데 고유하게 프레쉬 하다는 뜻인가?

전 국민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전제로 만든 이름인 듯 하다. 영어 공부 열심히 안한 자, 반성할지어다! (접니다 저!)


4. TTT택시/ 12월 16일/ 1만6천5백원

하.. 이 날 대중교통 사치 좀 부린 날이지!

친구네 집에 가는 길이었다. 친구네 집을 가는 길은 험난했다. 초행길이고 춥기도 해서 어렵게 앱을 다운받아 택시를 불렀다. 하지만 어려운 이름을 가진 친구네 아파트로 가는 길은 한국이 오랜만인 나에게만 어려운 것은 아닌 모양이다.


‘아저씨, 더** 퍼스트파크 블리** 아파트 가주세요.’

‘어디라고요? 블랙 아파트?!’

‘..... 아니요, 더** 퍼스트파크 블리** 아파트요!;’

‘뭐? 파크블 아파트?!’


이건 뭐 귀마개 하고 무슨 말 하나 맞추는 게임하는 것도 아니고..

아저씨는 네비게이션에 내가 불러준 아파트 이름을 힘겹게 따라 불러보았지만 네비게이션은 아저씨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기사 아저씨는 결국 본인의 핸드폰을 나에게 가져다 대며 직접 아파트 이름을 부르라고 했다.

하… 아파트 이름 좀 어떻게 해주세요. 뭐든 적당한게 좋은 거 아닐까요?  


5. *인스베이글스/ 12월 22일/ 3천원

오전 시간에 찍힌 커피 영수증. 남편 것이다.

결혼하기 전에 나는 멋진 커리어우먼과 전통적인 현모양처의 삶을 동시에 구가하며 살 것이라고 상상하곤 했다. 남편 출근 전에 일찍 일어나 우아한 모습으로 신선한 과일 서너가지, 기름에 바삭 구운 달걀 후라이, 먹음직스럽게 토스트된 베이글, 각종 크림과 쨈을 종류별로 담아 내놓는 종류의 아내가 될 것이라고. 뭐 상상한 적이 있었다는 것 뿐이다.


아무도 내게 그렇게 가르치진 않았지만 (우리 할머니의 꿈은 내가 판사가 되는 것이었다), 텔레비전을 하도 많이 봐서 갖게 된 꿈인 것 같다.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는 젊은 여자는 화장을 예쁘게 하고 다림질된 예쁜 앞치마를 두르고, 참기름이나 카레 광고에 나와서 웃었다. 그러면 멋진 와이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는 다정한 미소로 맛있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 모습은 행복해 보였거든.


아무튼 남편은 가끔 출근 후에 바쁜 회의를 서너 개 마친 후에야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겨우 마시는 날도 있다. 나는 레트로 음식 광고 모델이 아니라 그런지 아침부터 앞치마를 두르지도 않고, 남편이 차려주는 아침을 먹는 날도 많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다. 누구든 준비된 아침을 먹는 날은 행복한 날이라는 생각이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누가 차려주는 아침을 먹을때 편하고 좋고 행복한 건 사실이잖아?


6. ##마트/ 12월 26일/ 1만5천5백원

‘브라운 돈까쓰 &빨’ 정식 B (홍수 +등심) ????

브라운 돈까스와 ‘이빨’인가? 브라운 돈까스와 ‘씨빨’인가? 뭐지? 험한 말 상상하는 난 쓰레기인가? 반성한다. 하하핫. 그나저나 푸드 코트 돈까스 세트가 너무 비싼 것 아닌가?   


7. GGG 푸드마켓/ 1월1일/ 1만2천7백원

새해에는 거짓말하지 말기??

새해 가장 중요한 목표가 ‘다이어트 및 건강관리’라고 세웠는데… 영수증에 찍힌 날은 1월 1일이고, 그 새해 첫날 주전부리 리스트에는 ‘초콜릿칩쿠기 Large’라고 찍혀있다.

영수증은 특별히 큰 것 샀다고 라지라고 표기해 주는 것도 모자라 ‘Large’라고 원어로 찍어줬다. 너 새해 첫날 초콜릿칩 쿠키 큰 것 샀다고.... 나는 너가 왜 다이어트에 실패했었는지 안다고.

반성한다. 살이 왜 안빠지는지 모르겠다, 살이 찌는 것은 20대가 아니라서 그렇다, 신진대사가 예전만 못하다는 얘기는 이번 달엔 안하기로.


8. XX 숯불갈비/ 1월10일/ 6만3천원

‘내가 언제 숯불갈비를 먹었지?’

하고 들여다 보니 남편 영수증이다. 연초부터 회식을 한다고 궁시렁 거렸던 저녁인 것 같다. 남편은 연말에 회식 못한 사람들과 돼지불고기를 먹었다고 했다. 소박한 회식 같아 보인다.


저녁 회식을 거의 안하는 회사에 다니는 나로서는 저녁 회식을 하는 남편이 부럽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안쓰럽기도 하다. 아무튼 회식 자체는 죄가 없다. 돼지불고기가 큰 부자님 돈으로 먹고 싶을 때는 부럽고, 춥고 나가기 싫은 날에는 안쓰럽고. 지극히 주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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