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그라운드 텍스트클럽 08 <고통이 고통에게> 리뷰
공공그라운드 "텍스트클럽"은 텍스트를 매개로 텍스트 안팎의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텍스트클럽의 관객, ‘텍스트클러버’는 창작물과 창작자를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며, 창작자의 생각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텍스트를 '읽는' 일방향의 경험이 '읽고 나누는' 쌍방향의 입체적 경험으로 전환되기를 기대합니다.
글 | 우주
사진 | 공공그라운드
“기억의 시작. 매번 다른 시작. 알지 못하는 처음. 알 수 없는 마지막. 아무 데도 없지만 사랑할 수 있고. 아무 데도 없지만 시 쓸 수 있고. 아무 데도 없지만 있을 수 있고. 아무 데도 없지만 사라질 수 있고. (...) 아무 데도 없지만 걱정이 있고. 아무 데도 없지만 슬픔이 있고. 아무 데도 없지만 기쁨이 있고. 아무 데도 없지만 비밀이 있고. 아무 데도 없지만 나는 서 있다. 지금. 아무 데도 아닌 곳에.”
- 유진목 <거짓의 조금> p.70
솔직하고 담담한 어투로 고통을 이야기하는 유진목 시인님과 함께 여덟 번째 텍스트클럽의 문을 열었습니다. 작가님의 솔직함은 어디에서 오는지, 지금은 고통을 어떻게 다루고 계신지, 텍스트클러버는 각자 어떤 방식으로 괴로움에 대처하고 있는지 나누어 보았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레퍼런스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았던 텍스트클럽의 현장을 전해드립니다.
유희경 (이하 ‘희경'): 궁금합니다. 여러분은 이 책을 어떻게 읽으셨을까요. 아무것도 지적하지 않고,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고, 보여주거나 말하지도 않고, 어쩌면 돌멩이 같이 가만히 있는 이 책을 보면서 이게 유진목이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유진목이 보고 싶어지면, 만나고 싶어지면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하거나, 애써 그를 찾아가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유진목은 제 친구고, 친구의 고통을 보면서 ‘친구가 보고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이상했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 책을 통해 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있게 살고 있는 이 친구의 ‘멋있음’이 아닐까. 이 무수한 고통의 끝에서 멋있게, 버티고 있는 사람이 유진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은 멋있음과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솔직하게 고통을 드러낼 수 있었나요?
유진목 (이하 ‘진목’): 초여름쯤에 <코스모폴리탄>이라는 잡지 화보를 찍은 적이 있어요. 그때 머리를 정리해주시는 분께서 ‘흰머리 가려드릴까요?’ 여쭤보시더라고요. ‘꼭 가려야 하는게 아니라면 그냥 두어도 될까요’ 라고 여쭤봤더니 그래도 된다고 하셔서 흰 머리가 있는 채로 사진을 찍었어요.
저는 고통이라는게 가려야 할 것이냐, 말아야 할 것이냐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항상. 고통은 신체의 일부, 피부 같은 것이죠. 어느 날은 멍이 들기도 하고, 어느 날은 스크래치가 나기도 하고, 뾰루지가 나기도 하고, 흰 머리가 나기도 하는데. 그걸 가릴 것인가 말 것인가, 했을 때 저는 가리지 않는 쪽이에요. 그렇게 함으로써 그 모습이, 그날 그날의 나의 상태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쪽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책을 쓸 때에도 그것을 가릴 것인가에 대해서 전혀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희경: 고통을 마주하고, 텍스트로 옮겨놓는 건 작가로서 당연한 일인 것 같은데, 이걸 옮겨놓는다고 해서 해소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고통을 다루는 방법이 궁금합니다. 극복일지 받아들임일지 모르겠으나 고통에 휘둘리지 않은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제가 읽었을 때는 고통과 더불어 살고, 큰 노력없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읽히기도 하던데, 그것을 유진목 시인만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진목: 저는 고통에 굴복합니다. 납작 엎드립니다. 고통스러운 일이 찾아오면 제가 제 자신을 주체하지 못해요. 저 자신을 망가트리는 수준으로 고통에 굴복합니다. 지난 2년 가까이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냈고, 그 와중에 정신차리고 보니 책 세 권이 나와있는 거에요. 제가 얼마나 책임감이 강한 사람인가를 다시 한번 깨달았죠. (웃음)
희경: 고통에 굴복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나요? 고통인채로 떼굴떼굴 구르는 건가요?
진목: 고통이라는 단어가 추상적이긴 한데, 사람이 고통을 겪으면 몸이 고통을 신체화 시켜요. 그래서 감정이 아니라 몸이 아프기 시작해요. 저는 매일 20시간을 잤어요. 하루에 4시간씩 깨어있었어요. 내가 의도적으로 스무 시간을 자려고 해도 사람은 그렇게 잘 수가 없거든요. 그런 생활을 2년 가까이 했어요.
(힘들었겠네요). 네, 많이 힘들었어요. 낮에 깨면 좋은데 꼭 밤에 깨요. 새벽 두 세 시에 깨서 동 트는 걸 보고 자는거에요. 그 시간에는 누군가에게 전화 걸고 싶어도 걸 수가 없어요. 혼자 우는거에요, 베란다에서.
그렇게 2년을 보내고, ‘선생님, 저는 사람에게 살의를 느낍니다’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1년 반 가까이 되는 긴 상담이 시작됐죠. 상담, 도수치료를 열심히 받아서 지금의 상태가 되었고요. 이렇게 바깥 활동도 하고, 요즘은 7시간 자면 눈이 떠져요. 지금은 고통을 대할 기력이 없어요. 2년 동안 한꺼번에 쓴 것 같아요. 만약에 시간이 흘러 기력이 더 보충되면 어떤 일에 화가 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텍스트클럽의 묘미는 텍스트클러버의 사연입니다. 행사에 참여하기 전, 주제와 관련된 사연을 받고 그 중 몇 가지를 행사 당일에 함께 읽습니다. 사연이 선정된 분은 사연에 대한 작가님의 코멘트와 특별한 선물을 받아 가실 수 있습니다. 작가와 독자가 고루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택한 텍스트클럽만의 시그니처 파트입니다. 이번에는 사연 당첨자를 위한 선물로 유진목 ‘감독님'의 단편영화 <접몽> 관람 기회를 준비해주셨습니다. 최근 몇 달 간 김신록, 전석찬 배우와 함께 행복하게 작업했던 영화였습니다. 무대 위에 올려두었던 옷 역시 특별한 사연이 깃들어있는 옷으로, 텍스트클러버를 위한 선물이었습니다.
희경: 고통이 끝난 다음 사막과 같은 시간을, 유진목 시인이 요즘 매일 골몰해요. 이 시간을 내가 어떻게 보낼 것인가. 그 방법으로 영화 찍기를 선택했다고 알고 있어요. 그건 고통을 견디는 시간인가요? 고통을 보내고 난 다음의 시간인가요?
진목: 대학 졸업 후에 영화 일, 샘터사를 거쳐 영화 스크립터로 6년쯤 일했어요. 1년에 8개월은 지방에서 단체 생활을 하는, 매일 아침 6시부터 새벽 1-2시까지, 매일 일정이 정해져있는 날을 보낸거죠. 그리고 제주도에 가서 2년을 살았는데 그때는 너무 좋았어요. 너무 힘들게 일을 하다가 저에게 쉼과 같은 시간이 주어져서 좋았고. 그때는 등단 후라서 맹렬하게 글을 쓰면서 2년을 보냈어요.
제주 생활 후에 2년 동안 20시간을 잤어요. 하루에 네 시간만 깨어있으면 하루가 네 시간인 거에요. 요새는 7시간만 자니까 하루에 17시간을 살아있어야 하는 거에요. 갑자기 지금까지 한 번도 계획 없이, 아무 것도 없는 시간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게 된거죠. 그래서 책 세권이 나올 수도 있었던 것인데. 책이 나오니까 저는 할 일이 너무 없고 심심한데, 친구들은 너무 바쁘고... 나에게 주어진 매일 매일의 17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지, 생각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영화를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책 세 권을 마무리 하고 영화 한 편을 찍었습니다.
첫 번째 사연은 ‘관계'에 관한 사연이었습니다. 가까웠던 사람과 별안간 멀어진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인간 관계에서 겪는 어려움, 관계망 속에 있었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는 순간은 거의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고통일텐데, 유진목 시인님은 이 고통을 어떻게 덜어냈는지, 괴로움을 줄이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진목: 연락을 했는데 답이 없다, 이때 정말 괴롭죠. 제가 힘들었을 때, ‘내가 네 친정이다'라고 얘기해주신 분이 계셨어요. 마음을 활짝 열었죠. 그러다가 어떤 일이 생기고 나서, 제가 ‘언니 이제 나랑 연락 안할거야?’라고 문자를 보냈는데 며칠 동안 답이 없는 거에요. 정말 많이 울었어요.
제가 이 사연을 미리 전해받고, 말 해야겠다고 한 것은 ‘관계를 끊으시라’는 대답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었어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고요. 관계를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고민할 필요도 없어요.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거나, 내 기분을 좌지우지 하거나, 내 상태를 조종하려고 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절대로 이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정념’이라고 부르고,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영’이라고 표현해요. 사람들은 정념이 고도로 발달해 있어서 ‘이 사람이 바빠서 깜박했다’와 ‘일부러 연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정확하게 캐치해요. (보통 ‘촉'이라고 하죠.) 그리고 어떤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것을 기가 막히게 알아요. 사람의 정념이라는 것은 가장 고도로 발달된 뇌의 어떤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렇게 나를 조종하려고 하거나, 연락을 끊거나,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 좋을 때는 연락하고 아니면 안하는 사람과는 관계를 끊어버리시고요. 꼭, 아무도 용서하지 마세요. 그리고 용서받을 생각도 하지 마세요.
희경: 관계는 결국 나를 위해 존재하고 그 주도권은 내가 쥐어야 한다는 것이죠. 당하지 마시고 내가 내 주도권을 가져오시면 좋겠다는 이야기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고보면 고통은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네요.
“나의 문제는 삶을 너무 조금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 거울을 볼 때마다 다른 얼굴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새 옷을 산다. 좀 더 밖으로 나가기 위하여 새 옷을 산다. 옷걸이에 걸린 새 옷을 입자고 생각하며 일어나 캄캄한 방에 불을 켠다. 새 옷을 입으려다 다시 침실로 돌아와 불을 끄고 눕는다. 쓸데없이 새 옷을 샀다고 자책한다. 내일은 꼭 새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자. 그러면 돼. 나는 잠이 든다. 새벽에 깨어나 아무에게도 전화할 수 없음을 안다. 베란다에 앉아 그칠 때까지 운다. 아무도 용서하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서 문신을 새긴다. (...) 나는 내가 아닌 모든 것이 되고 싶다.
- 유진목 <거짓의 조금> p.140
두 번째로 가족을 대하는 본인의 양가감정에 대해 고민하는 사연을 나누었습니다. 갈등 때문에 가족과 거리를 두었지만, 여전히 고통스러운 마음을 견디고 줄이려는 노력을 나누어주셨는데, <거짓의 조금>의 ‘나’와도 닮아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고통을 대하는 ‘구체적인 노력’을 떠올려보고, 나름의 해결방안을 함께 고민해보았습니다. 두 시인님의 대화 속에서 찾은 방법은 급작스럽게 찾아오는 고통에 대비해 체력을 길러두는 것, 또는 고통이 생겼을 때 거리를 두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고통은 나만 아는 것이니, 거리두기의 핵심 역시도 중심은 ‘나'여야 한다는 것, 내가 원하는 거리를 찾아보는 것도 중요하겠다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습니다.
내가 태어나서 본 것들을 생각하면 태어난 것이 좋기도 하다. (...) 나는 가족을 떠난 뒤로 높은 산에 오르고 깊은 바다를 헤엄치고 먼 나라를 여행했다. 누가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지? 엄마가 그랬지. 아빠하고 그랬지. 그것만큼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다른 누구도 해줄 수 없는 것을 내게 주었으니. 하지만 거기까지. 나는 여전히 그들이 보고 싶지 않다.
- 유진목 <거짓의 조금> p.151
희경: 적당한 가족관계는 어떤 거라고 생각하세요? ‘도리’라는 것이 있을까요? 이를테면 부모와 자식 간에는 ‘낳아주고 길러주었다’는 억압이 있잖아요.
진목: 제가 지금 결혼을 했잖아요. 서류 한 장을 동사무소에 제출했는데요. 서로에게 무심한게 좋은 것 같아요. 부모님께 돌봄을 잘 받았다면, 저는 많은 것을 돌려주고 싶을 것 같아요.
어제 손문상 씨가 다리가 아프니 주물러달라고 하는 거에요. 제가 허리 재활 받을 때 손문상 씨가 많이 주물러줬거든요. 그러니까 어제 안주물러줄 수가 없는 거에요. (사람이 정말 못되지 않은 이상 받은 것을 갚게 되어 있네요.) 근데 손문상 씨는 정말 덩치가 커요. 발이 300이거든요. 종아리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데, 너무 아프다고 하는데 인간적인 도리 상 주물러주지 않을 수 없겠더라고요. 인간의 도리는 있는 것 같아요.
어느 정도의 무심함이 좋냐면, 제 남편과 상담 선생님이 같아요. 저희가 부부니까, 상담 선생님이 가끔 남편의 얘기를 하면 제가 모르고 있을 때가 많아요. 제가 ‘아 그래요?’ 하면 선생님이 깜짝 놀라세요. 대체로 부부상담을 오는 분들이 서로의 일을 잘 몰라서 다투고, 서운함을 느끼고, 불화의 원인이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알고 싶지가 않아요. (웃음) 어느 정도는 무심한 것이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손문상 씨도 같은 생각인지는 본인에게 물어봐야겠네요.) 안그래도 어제 손문상 씨가 본인은 계속 아웃풋을 보내고 있는데 돌아오는 인풋이 없다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갑자기 종아리를 주물러 달라고. (웃음)
세 번째 사연에서는 괴로움을 대하는 방식으로서 시 쓰기를 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사연을 통과하며 읽기, 쓰기와 치유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희경: 고통을 줄이는 방식으로 읽고 쓰는 방식을 선택하셨는데, 저는 읽고 쓰는 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치유의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정도의 차이일 뿐이고요. 유진목 시인에게는 읽고 쓰기가 어떤 의미인가요? 시와 영화가 고통에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질문해봅니다.
진목: 저는 산문을 쓸 때는 병이 드는데, 시를 쓸 때는 치유를 받는 것 같아요. 일기는 있었던 일을 쓰는 것이지만, 시는 없었던 일을 쓰기도 해요. 쓸 수 있어요. 내가 신이 되는 거죠. 내가 만든 세계에서, 내가 만든 인물들에게, 내가 부여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하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쓴 시 속에서는 아빠가 항상 내 곁에 있고, 아빠가 나에게 미안하다, 너를 사랑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도 하고.
시는 너무 좋은 세계에요, 저에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타인에게 무엇을 갈구하는 것은 사실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제발 나를 좋아해줘’, ‘조금만 더 좋아해줘’, 이렇게 하는건 너무 비굴하고. 근데 시 속에서는 그 사람이 하염없이 나를 좋아하도록 만들 수 있어요. 시는 논리와 개연성을 뛰어넘어서 창조할 수 있는 멋진 신세계라고 생각해요.
엄마와 서로의 삶을 나누며 가까이 살아갈 수 없게 된 것은 나도 슬플 때가 있어.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안간힘을 썼어. 엄마를 떠나서 겨우 행복해진 딸의 삶을 엄마가 알게 될 날이 올까?
엄마에게 내가 있어서 좋았던 날들, 힘들었던 날들을 나는 알고 있어.
엄마도 언젠가는 엄마가 없어서 행복해진 나의 삶을 알게 되길 바라.
- 유진목 <거짓의 조금> p.155
희경: 한편 걱정되는 건, 무엇이든 거기에 함몰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도 들어요. 시 쓰기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너무 많은 것을 투영하면 벗어나기 어렵잖아요.
진목: 그렇긴 한데, 쓰고 나면 까먹으니까. 까먹는게 중요하죠. 시에는 정말 큰 치유의 힘이 있고요. 아빠가 <작가의 탄생>을 읽으신 것 같아요. 거기에 ‘내가 너를 사랑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시가 있어요. 제가 듣고 싶어서 쓴 말이에요. 그걸 쓰고 나니까 더이상 아빠가 필요없어졌어요.
저는 그 말 때문에 아빠가 필요했거든요. ‘아빠가 이 말을 나한테 꼭 해줘야 돼’, ‘죽기 전에 반드시 나한테 이 말을 해야 돼’. 이런 생각 때문에 아빠가 필요했어요. 아빠 입장에서는 좀 안된거죠. 내가 아빠를 필요로 해야되는데 시를 씀으로 인해서 아빠가 필요없어진 거에요. 그 시를 씀으로 인해서 너무 홀가분했어요. 그 후에 아빠한테 뜬금없이 카톡이 왔는데, ‘내가 너한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구나. 내가 너를 사랑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왔어요. 그래서 고맙다고 했죠. 시는 정말 힘이 세지 않아요?
사연을 바탕으로 이야기 나눈 후, 현장에서 텍스트클러버 몇 분의 질문으로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지면상 이야기를 간추려 전합니다.
진목: ‘쥬라기 공원’ 느낌이 나는 해링본 자켓, 탐험할 때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만든 체크 자켓, 야상 자켓은 모두 쉐장 디자이너가 만든 옷이에요. 제가 안 입는 옷을 가져온게 아니라, 정말 아끼는 옷을 선물해요. 행운을 팍팍 담아 드릴게요. 이 옷을 입는 날 좋은 일 있으시길 바랍니다.
Q1: 시인님의 ‘용서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많이 와닿았어요. 저는 지금 용서를 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감정이 어렵고 그 부분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데, 용서를 하지도 못하고, 해도 괴로운 상황이에요. 지혜롭게 해결하고 싶은데 어떻게 ‘용서하지 말라’는 생각으로 가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진목: 저한테 큰 잘못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요. 무턱대고 이메일을 보내서 용서를 받고 싶다고 했어요. 제가 그 이메일을 받고 너무 깜짝 놀랐는데요. ‘그렇게 큰 잘못을 해놓고, 이제 내 용서까지 받아서 자기 마음까지 편해지겠다는 건가?’ 그때 생각했어요. 용서는 절대 하면 안된다. 용서하지 말고, 그 사람을 고통 속에 내버려 두어야 한다.
희경: 관계라는 건, 그것을 형성하고 있는 여러 요건이 있잖아요. 애정, 믿음, 내가 사랑받고 싶음 같은 것들. 용서도 포함되고요. 꼼꼼하게 살펴보면 관계의 ‘세팅’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내가 의존하고 있는 건지, 내가 이 사람이 필요하다던지. 이런 것들이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힘든 작업인데, 한번쯤 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진목: 용서는 하면 안돼요. 절대 하지 마세요. 사실 용서는 잊고 싶어서 하고 싶은 거거든요. ‘용서하면 잊을 것이다.’ 잘못 연결된 인과 관계예요. 잊는 것은 용서와 관계가 없어요. 잊어버리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그 사람을 생각하는 텀이 길어지는 것. 그 사람에 대해서 매일 생각하다가, 하루는 까먹었다가, 오랫동안 생각이 안나다가, 이런 식으로 잊으면 되는거죠. 용서와 잊음은 전혀 인과가 없는 것입니다.
Q2: 용서에 관한 이야기를 여쭤보고 싶어요. 제가 대학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와서, 엄마와 8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어요. 최근에 엄마가 만나길 원해서 만났는데. 엄마가 계속 저한테 용서를 구했어요. 저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냉혈인간이 된 기분이었어요. 책 후반에 어머니를 용서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는데, 엄마를 용서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진목: 평소에 용서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내가 냉혈한 같다거나 후레자식 같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아요. 저는 용서에 대해서 아예 생각을 안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낭독한 부분,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의 핵심은 ‘엄마가 없어서 행복해진 내 삶을 알게 되길 바란다’고요. 그런데 ‘(엄마가) 과연 알게 될까?’ 이런 의구심은 있어요. 엄마가 없어서 더 행복해진 삶을 알게 된다면 저는 그걸로 만족해요.
희경: 아까 인과관계 얘기를 하셨는데, 용서는 내가 ‘해야지’하고 할 수 있는게 아닌 것 같아요. 어느 순간에 ‘내가 용서했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진목: 어느 날 잊혀지면 되는거고. 그런 건 있어요. '어느 날 엄마가 돌아가셔서 제가 상주가 되었을 때 어떤 마음이 들까'라는 생각을 <교실의 시>라는 산문집에 쓴 적이 있어요. 상상 속에서 그런 생각은 많이 하고, 그때는 제가 도리를 하고 싶어요. 냉혈한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언제 내가 태어나게 해달라고 했나요?
나는 이런 감정들이 오롯이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이라 여긴다. 나무에게도 어떤 감정이 있다면, 나처럼 슬픔이나 기쁨이 들고 나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한자리에 오래 서 있기만 한 것이라면 그걸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게 너무 무서울 것이다.
- 유진목 <거짓의 조금> p.17
‘고통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귀하다는 이야기와 함께 텍스트클럽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진목: 이렇게 많은 분들이 와주실 거라고 생각을 못했어요. 극장이 가득 차있는 걸 보니까 마음이 좋네요. 이 책이 즐거운 이야기도 아니고, 성공을 향해 가는 힘찬 책도 아니잖아요. (웃음)
시간을 내서 같이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나눈 것이 귀하게 느껴져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소명과 관심, 일상인데, 그것이 갈수록 성공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고 있거든요. 실패한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오늘처럼, 실패함으로서 웃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희경: 오늘 행사의 결론은, 결국 주체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고통이라는 건 나의 문제고,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면서 동시에 내가 정리하면 정리되는 문제라고 생각하고요. 유진목 시인의 <거짓의 조금>에서 그런 것을 읽었습니다. 고통은 나를 찾아가는 일.
진목: 그렇죠. 고통은 숨길 필요가 없다!
찬 기운이 돌던 11월 중순. 이번 텍스트클럽에서는 고통이라는 단어가 막연히 무겁고 아프지만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득 담았습니다. 파랑새극장에는 고통을 이야기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있었고, 각자의 고통 속에서 ‘보편’을 발견해내는 장면이 아름다웠습니다. 우리가 서로의 고통을 들어주고, 괴로움을 줄이는 방법을 나누어줄 수 있다면 고통도 언젠가는 떠나보내고, 다시 ‘살아있다'는 감각을 진하게 누릴 수 있지 않을까요? 텍스트클럽에서 나눈 이야기들로 마음이 조금은 따뜻해지셨길 바랍니다.
올해 텍스트클럽은 아홉 번째 행사를 마지막으로 2021년을 마무리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야기와 노래로 가득 채웠던 <목정원의 관객 학교> 현장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모두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