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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May 12. 2024

영원의 숲 #10

"이정표"




  너무 빨리 고이고 너무 빨리 썩는다.


  익기도 전에 열리고 익기도 전에 떨어진다.


  힙한 것의 말로란 결국 그러했다.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는 유사엄마들의 조력으로 풍족한 많은 자원을 얻어버리고, 불감증의 지루는 일찌감치 찾아오며, 더는 삶의 과정이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뭘 해야 할지 멍하니 졸린 눈으로 응시하다가, 세간의 이슈가 되는 주제어나 나무위키에서 뒤지고, 관성적으로 유튜브 함바집에서 정신적 끼니를 때우며, 무신사에서 몇 번 입지도 않을 새로운 옷이나 사잴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탈출구란 새로운 콘텐츠가 유일한 것만도 같다.


  더 그럴듯해보이는 것은 이제 자신이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콘텐터가 되는 것이다.


  "나는 남들과 다르다."


  남들과 다르게 힙할 수 있다면, 만성적인 우울과 불감증에 빠져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기대된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인가를 향하려는 자유의 의도가 아니라, 무엇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 도피의 의도였던 것이다.


  실은 우리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지금 이런 방식의 삶은 아주 완만한 자살의 형태라는 것을.


  콘텐츠는 내용이다. 막힌 삶은 언제나 자신을 채워줄 새로운 내용을 소비하려고 한다.


  누구보다 더 빨리, 더 많은 새로운 콘텐츠를 향유하며, 또 그 내용물들을 짜깁기해 마치 자신만의 독자적인 콘텐츠처럼 만들어내는 일에 성공한다면, 바로 그렇게 자신이 자신을 위해 '새로운 정신적 마약'을 계속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면 자신의 삶의 정체가 해소될 것이라고 어떤 이들은 믿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힙스터들은 자신의 짜깁기 작업을 위해 소설, 음악, 영화 등 동서고금의 온갖 콘텐츠들을 수집한다. 정보망의 발달로 이 일을 하기에 편리해진 시대다.


  편리한 것은 도구다. 그러나 그 편리성의 힘에 깊이 의존하게 되어버린 이들은 도구와 자신을 동일시하게도 된다. 정보의 힘일 뿐인데, 자기를 그 정보와 등치한다. 책을 많이 보유한 이가 그 책들의 양만큼 자신이 똑똑하다고 믿는 경우와 정확하게 동일하다.


  자신이 동서고금의 지혜의 통합자라고 자임하게 되는 과대망상의 일은 이래서 일어난다.


  이 경우, 자신은 가장 힙한 것, 힙스터 중의 힙스터, 일종의 콘텐츠의 왕 같은 입장을 형성하게 된다.


  자신이 신봉하는 "콘텐츠는 고통받는 인간을 구원한다."라는 전제 속에서, 이제 콘텐츠의 왕처럼 여겨지는 자기 자신을 인간의 구원자처럼 믿게 되는 일 역시도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오늘날의 '메시아병'은 분명 이러한 콘텐츠 소비의 문제와 매우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자신이 인류를 이끄는 선지자라도 된 것처럼 행세하는 연예인과 개인방송인, 기획자, 작가들의 모습을 보면 하나같이 다 '구루'의 모습들이다.


  확실한 것은, 메시아병은 그 자신이 가장 메시아를 바라고 있는 이에게서 발병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메시아적 입장이 됨으로써 치유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실은 병의 말기로 들어선 것이다.


  콘텐츠를 신적인 것으로 예찬하며, 인류는 이야기를 통해 그 자신을 후대로 전하며 영원할 수 있다는 둥의 말을 늘어놓고 있다면, 콘텐츠라는 것은 이미 컬트종교가 된 것이다.


  세속의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을 참칭하는 일, 이것은 정신적 병 중에서 가장 심각한 성질의 병이다. 그 삶이 최대치로 정신건강을 잃어 추락한 말기의 증세다.


  이러한 난봉과 그로 인한 자멸이 암시되던 시대에는 늘 요청되던 것이 있다. 모든 정신건강에도 이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근본'이라고도 불리고, '원점'이라고도 불리며, '정통'이라고도 불린다.


  온갖 미식의 콘텐츠를 소비하며 끝없이 뇌의 자극을 추구하다가 지친 이가, 돌아가신 할머니가 해주시던 집밥을 그리워하게 되는 이치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회귀의 낭만이 아니고, 레트로의 복권이 아니며, 보수적 입장이 아니다.


  이런 것들과 변별하기 위해 '신(neo)'이라는 접두어는 '신정통주의' '신실존주의' 등의 형태로 활용되었다.


  새롭게 다시 근본을 발견한다는 의미가 이러한 사조를 설명하는 표현으로 더 적합할 것이다.


  이것은 빛을 잃어 퇴색한 콘텐츠를 극복하기  출현한 새로운 콘텐츠의 방식이 아니다.


  앞서 말했지만 콘텐츠는 내용이다.


  아무리 내용을 새로운 것으로 교체해봤자 형식에 대한 자각이 없다면 길은 늘 막혀 있는 것이다.


  조악한 비유로, 군대라는 형식 속에서 아무리 깔깔이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다리미로 군복에 독창적인 줄을 잡아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 자신이 깔깔이에 가장 힙한 그림을 그려내는 순간이 올 때 TV판 에반게리온의 마지막 장면처럼 중대의 모든 이들에게 따듯한 박수를 받으며 바로 군대를 전역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 이가 있다면 이는 정신병적 증세일 뿐이다.


  새롭게 다시 근본을 발견한다는 것은 이제 내용이 아닌 형식을 돌아본다는 것이다.


  형식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언제나 가장 깊고 섬세한 예술가들이었다. 그들은 형식을 건드린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들은 형식을 가장 존중한다. 형식을 존중하는 이만이 형식을 변혁할 수 있다.


  형식이 경계의 문제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내용(콘텐츠)을 신격화하는 이들은, 경계를 무시하고 복제한 내용들을 짜깁기하며, 그렇게 만들어진 개밥짬뽕에 통합이라는 이름을 붙인 뒤, 자신이 얼마나 형식파괴의 마법을 부렸는지를 자랑하고자 한다. 이런 것을 키치라고 부른다.


  키치는 실제로는 알맹이의 부재, 즉 내용의 부재다. 형식을 무시하기에 그 안의 내용도 필연적으로 비게 된 것이다.


  아무리 많은 내용들을 모아봤자 그것들은 다 흩어질 운명이다.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일과도 같다. 결국에는 지쳐서 다 사라질 것이다. 전술한 것처럼, 이것은 완만한 자살의 형태다.


  오늘날 힙하다는 표현과 키치하다는 표현은 맥락적으로 거의 동의어로 기능한다.


  근본적인 형식을 잃어 서서히 자멸해가는 난봉의 몸짓이다.


  채울수록 더 배고파진다.


  더 많은 자극만을 바라며 끝없이 소진되어간다.


  인간의 근본적인 형식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유용하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 쉽게 답할 수 있다.


  몸이다.


  내 몸은 남과 다를 수밖에 없는 나만의 내용인 것 같지만, 그 이전에 몸은 인간의 공통형식이다.


  새로운 것을 꽃피울 수 있는 감수성은 상상력에서 비롯하며, 상상력은 이 공통형식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한다.


  상상력은 몸에서 온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신체를 이해하는 만큼 그것은 상상력으로 확장되어 여러 사물 및 사상들의 창조로 이어져왔다.


  그렇게 몸이라는 근본형식으로부터 다양한 콘텐츠는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몸은 내용이 아니라는 말을, 몸은 비어있다, 즉 몸은 공하다는 말로 바꾸어 이해해보자.


  몸은 바로 공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공하기에 존재는 지속된다.


  이 말은 사실적이면서, 그 사실을 새로운 차원에서 비추어준다.


  우리는 몸 안에 어떤 대단한 인격(콘텐츠)을 채울까만을 궁리해왔고, 또 그런 대단한 인격처럼 보이려는 데만 모든 에너지를 소모해왔다.


  그러나 그러한 더 좋은 콘텐츠를 자신의 것으로 얻으려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몸이 있기에 우리 자신의 존재는 정당하고 또 확실했던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절대적 견고성을 체험하는 자리가 영원의 자리다.


  우리는 이 반석 위에서 이런저런 콘텐츠 놀이를 하고 있던 것이다.


  메시아병은 자기를 우상화하는 우상숭배의 증세다. 누가 우상숭배를 하는가? 영원의 자리를 잃은 이가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신봉한다.


  다시 기억해보자.


  몸이라는 근본형식을 잃은 이가 콘텐츠 소비에 중독되고, 영원을 잃은 이가 메시아병에 걸린다.


  근본을 상실했을 때 드러나는 전형적인 증상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콘텐츠에 관한 일 말고는 정말로 뭘 해야 할지를 모르게 된다. 자극소비기계가 되어있는 현실이다.


  그 몸이 향기를 내기도 전에 썩은내와 함께 떨어진다. 삶에 대해 뻔하게 다 아는 척하며, 죽지 못해 사는 지루하고 공허한 삶만이 그 앞에 남겨진다.


  새로운 형식이 아직 출현하지 못한 것이다.


  삶이라고 하는 것을 완전히 다르게 살아가는 방식, 삶을 펼쳐내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완전히 다르게 이해하는 방식이 아직 탐구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새롭다고는 말하지만, 새로운 형식이란 근본의 형식이다.


  인간은 미지를 탐구하기에 유리한 몸의 형식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유리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탐구의 지점이다.


  자신은 왜 이런 형식으로 존재하는가, 자기 자신을 가장 큰 신비로 궁금히 여기는 바로 이 물음을 위해 근본적으로 최적화된 것이 인간의 몸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나날이 새롭게 발견해가는 이들이 새로운 감각으로 살아가게 된다. 마치 그 몸이 새롭게 태어나듯이.


  이것을 미지를 향해 새로워진다고도 표현할 것이고, 근본을 향해 깊어진다고도 표현할 것이다.


  붓다와 같은 이들은 이 새로운 형식을 발달시킨 형식의 선구자들이며, 동시에 근본의 형식을 회복시킨 형식의 복권자들이다.


  그들은 존재의 신비를 향한 가장 깊고 섬세한 예술가들이었던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바로 그렇게 이 우주에서 가장 깊고 섬세한 예술가의 형식을 갖고 있다는 신비한 사실을 그 자신의 삶으로 묘사하던.


  삶은 그 자체로 예술이 될 수 있는가?


  영원의 숲에서는 언제나 이 물음이 숲을 흐르는 부드러운 바람처럼 휘감돈다. 물음은 변주된다.


  할머니의 집밥 같은 것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이북 출신의 할머니가 해주시던 밍밍한 동치미국수와 숙주를 많이 넣은 만두를 싫어했지만, 지금은 평양냉면집에서 그런 것을 몇만 원씩 주고 사먹는다.


  새로운 것을 쫓아 마음이 분주하게 움직여야 하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안심할 수 있으며 몸이 새롭게 되는 공간.


  우리 자신을 새롭게 환기시켜주는 어떠한 근본어림.


  나는 이곳에서 영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미 우리 자신들의 영원의 숲에서 살고 있었다고만 말한다.


  누군가가 예술로 살았던 삶이란 그러한 이정표였다.


  우리의 숲길들에는 그러한 이정표가 반드시 하나쯤은 놓여 있다.


  달을 잊은 것은 황금의 빛을 찾던 여행자일 뿐, 달은 언제라도 숲을 비추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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