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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May 14. 2024

깨달음에 관한 불편한 진실, 어쩌면 위로 #4

"존재의 법칙"




  영성책을 많이 읽고, 기도나 명상을 많이 하고, 집에 이런저런 오컬트 소품들을 많이 소유하게 되면, 또 그러한 소비재들에 익숙해져서 자신의 입에서도 그럴듯한 고급언어들을 자연스레 발화할 수 있게 된다면, (나아가 이제 개량한복이나 티벳민속의상 같은 것을 걸치고 다니기까지 한다면) 우리는 깨달음에 조금 더 다가간 것인가?


  일찌감치 달마대사는 거기에 아무 것도 쌓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은 두 가지의 의미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그러한 것들로는 깨달음에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깨달음 자체가 무엇인가를 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난 학술적 전통 속에서 선불교가 가장 비판받았던 부분은 역사성의 부재다.


  특히나 유교주의적 민족사관이 중시되는 한국사회에서 역사성의 부재라는 말은 "너 무조건 나쁜 놈."이라는 함의를 곧잘 담고 있다.


  통속적으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을 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존재를 잃은 인간에게는 현재가 없다고.


  존재는 언제 잃어지는가, 또는 어떻게 잃어지는가?


  역사에 매몰되었을 때 그 일이 일어난다.


  그래서 선불교에는 역사성이 부재한다는 비판은 오히려 선불교가 어떻게 깨달음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가에 대한 반증이 된다.


  여기에서 확장될 수 있는 또 하나의 비판이 있다. 그것은 선불교가 개인주의적인 것이라는 비판이다. 이러한 비판을 감행하는 이들은 사실 교묘한 환원의 의도를 은폐하고 있다.


  논의의 프레임을 '공동체주의 대 개인주의'인 것처럼 작위적으로 잡아감으로써, '역사'와 '깨달음'을 동등한 평행선상에 위치시키려고 하는 의도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이 깨달음을 끌어내리려고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일단 깨달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고, 자신이 아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역사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왜 좋은가?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것 같아서다. 최소한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는 것만 같다.


  그것도 주체적인 자신의 노력으로 쌓아간 것들을 통해 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깨달음은 그 반대다. 주체적인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노력을 하면 할수록 결코 닿을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이제 선불교에는 역사성이 부재한다는 말을 다시 이해해볼 수 있다.


  깨달음에는 자신의 노력으로 쌓아간 역사가 부재한다, 이 말은 어떠한가.


  역사는 언제나 노력하는 의지의 주체를 상정한다. 깨달음은 그러한 주체의 환상이 사라지는 것이다.


  주체는 발전한다고 가정된다. 역사가 발전한다고 가정되기 때문이고, 주체는 항시 역사적 주체라서다.


  그러나 이 가정에 도전해보자.


  역사는 정말로 발전했는가?


  인간의 삶은 다만 반복될 뿐, 발전한 것은 그것을 역사라는 이름으로 서술하는 언어적 수사학이 아닐 것인가?


  조악하고 거칠게 드는 예로, 역사는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발전해나간다는 역사변증법을 살펴보자. 마치 그런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언어로 그러한 의도를 담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장 잘하는 일은 지나간 일에 대한 유려한 소설쓰기다.


  오히려 정반합의 과정으로 발전해온 것은 언어다.


  '짧다'라는 표현이 있어야 '길다'라는 표현이 성립될 수 있는 언어의 상대적 특성은 그러한 발전방식을 시사한다. '길다'가 더 가치있으려면 '짧다'가 더 많아야 한다. 그래야 '길다'가 빛이 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언어는 그 가치증진에 있어 반드시 '적'을 필요로 한다.


  정치공학자인 칼 슈미트가 정치에는 반드시 적이 있어야 성공적이라고 말했을 때, 이는 같은 의도를 담고 있는 진술이다.


  적이 있어야만 내가 성장할 수 있으며, 대립하는 외적이 있어야 우리 민족이 발전한다는 견해는 이러한 언어의 특성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성립된 생각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언어와 삶 사이에 분열이 생겨난다.


  삶의 특성은 자연스러움이다. 흐르는 물과 같다. 그래서 삶은 싸우고 싶어하지 않는다. 대립을 싫어한다. 반대되는 대극을 연금술의 항아리 안에 넣어 지지고 볶고 삶는 뜨거운 과정은 진실로 선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언어는 계속 적을 만들어 싸우려고 한다. 아니 계속 싸우라고 명령한다. 그래야 우리가 발전할 수 있다며.


  언어에 전적으로 의존해있는 이에게는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온다. 자신은 추방되거나 소외될 것이다. 더는 세상의 주인공이 될 수 없이, 엄마아빠로부터 미움받는 나쁜 아이가 될 것만 같다.


  나쁜 아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나쁜 놈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그렇게 또 자신은 누군가에게 나쁜 놈이 될 것이다.


  이 모순, 삶과 언어 사이의 이 균열이 우리를 늘 힘들게 한다.


  자꾸만 이 지구 위에 나쁜 놈을 더 많이 만들어야만 '우리'가 발전할 수 있다는 이 관점으로 우리는 정말 계속 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기에는 지구가 너무 좁아지지 않았는가?


  정치는 역사를 경영한다.


  정치가 과열인 것은 역사가 더는 갈 수 있는 곳이 없이 막혀서다. 해법이 안보인다. 더는 임의적으로 만들 수 있는 나쁜 놈이 없다.


  그럴수록 어떻게든 작은 흠집 하나라도 찾아내보려는 심판자의 눈길은 더 매서워진다. 제발 누군가가 잘못을 좀 해주었으면, 그러면 그 잘못된 적을 밟고 우리가 더 높은 차원의 미래로 도약할 수 있을텐데!


  이제는 이처럼 적을 구걸하는 형편이다.


  충혈된 눈으로 기어이 적을 찾아내기 위해, 또 그 적에게 기필코 승리하기 위해 치열하게 이루는 노력, 노력, 노력의 시간들이다.


  이런 것이 역사인가?


  그렇다면 이런 것은 없는 것이 낫다.


  자, 선불교는 이처럼 역사성이 부재하며,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놈들이 추구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깨달음은 역사숭배자들에게 주요한 '적'이 되어왔다.


  그러나 하나만 분명하게 정정하도록 하자.


  깨달음은 자기만 아는 것이 아니다.


  무슨 자기와 인류공동체 전체를 동시에 배려하고 돌보는 일이 깨달음이라고 또 다른 역사적 의도를 표방하려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자기도 모르는 것이다.


  그 사실에 정직한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근본사실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자신의 역사라는 것은 성립되는가?


  역사를 구성하는 언어에 의해 주어져서 당연하게 우리가 자신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그 답, 그것은 가상이다.


  아무리 많은 언어가 쌓여있을지라도, 그 언어들은 내가 정말로 누구인지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역사의 언어가 요구하는 그렇게 많은 역할들을 대단히 성실하게 잘 해내고 있으면서, 우리의 가슴은 왜 답답한가?


  왜 무엇인가 근본적인 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은 이 울분은 어디에서 온단 말인가?


  이것은 존재상실의 징후다.


  우리는 존재를 잃은 것이다.


  존재를 잃은 인간에게는 현재가 없어서, 현재가 늘 불만족스럽다.


  현재가 불만족스러운 이유를 가상의 적에게 투사하기도 하지만, 그 적이 사라지거나 자신에게 굴복한다고 현재가 충만해지지는 않는다. 바로 다음의 적을 찾아 나서게 될 것이다.


  우리는 더 정확해보자.


  내 현재가 불만족스러운 것은 어떠한 상대가 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곧잘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도 동일한 생각이 존재한다. 그는 내가 그의 길을 막고 있기 때문에 그의 현재가 불만족스럽다고 생각 중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채택될 수 있는 정직한 관점은 이러하다.


  내가 막고 있어서 그가 못가는 것이 아니고, 그가 막고 있어서 내가 못가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내 삶이 자체적으로 막힌 것이고, 그냥 그의 삶이 자체적으로 막힌 것이다.


  이 방식으로는 더는 갈 수 없다고, 각자의 삶이 각자에게 알리고 있는 중이다.


  정직하다는 것은 대상을 상정하는 상대적인 방식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정직하다는 것은 언어가 만든 대상적 가상현실에 취해있던 눈을 맑게 뜬다는 것이다.


  대상적 눈, 언어적 눈, 역사적 눈이 아니다.


  지금 내 존재의 현실을 정직하게 보는 눈.


  바로 존재의 법칙을 보고자 하는 눈을 뜨는 일이다.


  언어를 통해 내가 내 자신을 끌어올리려는 일을 우리는 역사법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존재법칙은 그 반대다. 우리는 힘을 뺀다. 그러면 떨어진다. 그리고 대지에 안착한다. 안심을 얻었고, 자유를 얻었다. 든든하게 마음놓고 살 곳을 얻었다. 언약의 땅이다. 그 거대한 허락 속에 있다.


  처음으로 대지를 밟아보았는데, 이 거대한 뜰에는 적이 없다. 발전해야 할 주체도 없다. 나는 이제 나만의 길을 가는가? 그런 내가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중력과 같은 사실적 보편성이다. 모든 인간이 이 위대한 보편성을 살아간다. 이것은 개성을 무시하는 전체주의의 진술이 아니다. 말했듯이, 모든 인간은 중력의 보편성 속에서 살아간다. 그 중력의 보편성을 향유하는 방식으로서의 구체적 개성이다. 언어로 자신을 끌어올려 중력을 초월할 수 있다는 추상적 정체성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보편성과 개별성은 동일한 이름이 된다. 대립이 아니고, 둘 사이의 통합이 아니다. 같은 사실을 진술하는 다른 표현일 뿐이다.


  더 분명하게는 그것은 절대성이다.


  존재의 법칙은 중력의 법칙처럼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사실법칙이다. 그 어떤 법칙보다도 선행한다. 물고기가 살고 있던 물과 같은 것이며, 물고기가 그 물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면 더는 물고기는 그 전처럼 살 수가 없다. 다른 것은 더는 숭배할 수가 없다. 거짓으로 예찬할 수도 없다. 정말로 자신을 살리고 있는 근본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으므로.


  그렇게 존재의 법칙을 깨달은 이는 이제 명확해진다. 존재의 법칙과 친해져, 그 법칙이 더욱 섬세하고 힘있게 작동한다. 더 깊이 체감해가며 존재 스스로를 더욱 잘 이해해가게 된다.


  이런 것이 분명하다.


  존재는 언어에 따라 감소하거나 증가하지 않는다.


  곧, 존재는 상대적이지 않다.


  존재는 절대적이다.


  "ㅋㅋㅋ 깨달았으니 나는 이제 절대자인 거라구. 후후."


  이제 이런 오컬트 무협지 이세계물의 대사에 대해서는 나는 어떤 변도 하고 싶지 않다. 그 반대를 의미한다고만 말할 것이다.


  그러나 유의미한 점은, 바로 이처럼 그 자신이 전능한 힘과 권위를 가진 절대권력자가 되기를 내심 꿈꾸나 이를 강하게 억압하고 있는 이들이, 자기들의 욕망을 투사하여 오히려 깨달음이 그렇게 이기적이고 나쁜 것이라는 비판을 가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게 올바른 역사의식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역사의 역기능은 이와 같이 억압장치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비단 역사만의 역기능은 아니다. 상대적인 모든 것은 그것이 신적인 것처럼 강조될 때 동일한 역기능을 드러낸다.


  역사, 민족, 공동체, 이런 것들이 신적인 것처럼 강조되던 시절에 깨달음은 애초 그것들의 것이었던 역기능을 혐의로 받아왔다.


  지금은 사면되어 이제 역으로 역사의 앞잡이가 된 경향도 자주 보인다.


  진정한 깨달음은 마르크스주의로 실천된다느니, 가장 차원 높게 깨달은 사람은 진보정치적 성향을 보이게 된다느니, 깨달음이라는 표현은 또 다른 PC의 용어로 변질된듯도 싶다. 즉, 엄마아빠가 좋아하는 '이상적인 착한 아이'가 되려면 쌓아가야 할 그 적재품목으로 화했다는 것이다.


  존재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내가 나로 태어난 이유를 밝히는 일과는 정말로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테레사 수녀의 다음과 같은 말을 정말 좋아한다.


  "인생의 마지막 날이 오면 당신은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살아가는 동안 당신과 사람들 사이에 있었던 일은, 다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일임을."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며, 이런 것이 존재의 법칙이다.


  깨달음은 존재로 전향된 일종의 삶의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인생의 마지막 날 전에 미리 그 사실을 눈치채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며, 또는 오늘을 바로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사는 방식이다.


  애초에 역사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매일매일의 그 마지막 날만이 반복된다.


  매일매일 새롭게 존재를 다시 찾을 기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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