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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May 14. 2024

영원의 숲 #11

"제자리에 앉아서"




  자신이 불안한 것이면서 남을 통제하려고 한다.


  이는 우리의 고질적인 악습관인데, 심지어 그것이 습관이라는 것도 쉬이 자각되지 못하기에 더 치명적이다.


  우리가 어떤 특별한 일이 없을 때 하루 동안 하는 일을 잘 관찰해보면, 무엇인가 통제할 소재를 어떻게든 찾기 위해 분주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연인에게 짜증내거나, 자식에게 간섭하거나, 친구에게 조언하거나, 다 관계의 대상들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들이다.


  인물적 대상이 아니라면, 이제 소재는 게임, 유튜브, 주식, 부동산관리, 자기계발 등과 같은 것이 된다. 머리로 분석하고 정리하며 다양한 정보들을 종합하여 자신이 어떤 상위의 지적 통제권을 얻은 상태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걱정되고 염려되어 그런다고 하는 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사실은 그냥 자신이 불안한 것이다.


  그리고 불안에는 원래 대상이 없다. 이것은 심리학의 우수한 성과다. 어떤 대상이 뭘 잘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자신이 불안해진 것이 아니다.


  우주의 모든 것을 다 통제하는 일에 성공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고집하는 한.


  자신이 완벽하게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일 수 있게 되면, 즉 올바른 사고와 의지로 자신이 완벽하게 자신을 통제할 수 있게 되면 불안이 사라지는가?


  바로 그렇기에 불안해진 것이다.


  통제하려 하는 만큼 불안도 커져간다.


  그래서 마침내는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 될 즈음에 전략적으로 시도하게 된 방편이 바로 상대를 통제하려는 일이다. 상대를 통제함으로써 자기 대신에 상대가 그 자신의 통제권을 잃게 만들면, 자기는 여전히 통제권을 확보하고 있는 것처럼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만적인 회피책이 반복되어 결국 악습관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 습관만 고쳐도, 자기 주변의 아주 많은 것이, 자기 자신을 포함해, 매우 여유로워진다. 행복지수가 3배는 증가할 것으로 기대된다.


  실은 그것보다 더 희망적인데, 자기 자신의 불안을 통제의 전략으로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는 이는, 남들이 보기에 아주 매력적인 이로 보인다. 통상적으로 아주 어렵다고 간주되는 일을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슥슥 해내는 모습은 매우 세련되고 고급진 아름다움으로 비치게 되는 까닭이다.


  웬만해선 상종하고 싶지 않은 이에서, 자주 보고 또 보고 싶은 이로 그 평가가 격상된다. 실제로 이러한 이를 만나면 이유없이 기분이 좋아진다. 그가 환히 열려서 흐르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환히 열려서 흐르는 이것은 영원의 특성이다.


  영원은 시간이 멈춘 것이 아니다.


  동결의 냉담함이 아닌 해빙의 기쁨이다.


  물론 우리는 아주 행복한 순간 속에서 영원을 꿈꿀 때 "아,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계의 시간'이 멈추기를 바라는 것이지, 오히려 '존재의 시간'은 더 풍요롭게 가득 흘러넘치기를 바라는 의도의 표현이다.


  "계속 이 삶을 이러한 기쁨 속에서 살 수 있었으면."


  우리는 바로 이것을 바라고 있던 것이며, 이것은 분명한 영원의 감수성이다.


  그리고 이 감수성을 더욱 꽃피워, 한번 그렇게 진짜로 살 수 있을지를 시도해본 삶의 모험가들이 있었다.


  그들이 했던 일은 단순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제자리에 앉아버리는 일.


  선사들은 좌선(坐禪)을 시작했다.


  '시계의 시간'을 중시하는 양식에서 벗어나, '존재의 시간'을 흐르게 하는 일을 시도했던 것이다.


  '시계의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선형축에 따라 인과론적으로 전개된다. 이것은 언어에 의존한 인간 인식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며, 결국 선사들이 시도했던 것은 언어와 인식의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 일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 위대한 삶의 모험가들을 통해 거룩한 사실이 발견되었다.


  다 영원이었다.


  그들이 앉아버린 그 모든 자리가 다 영원이었고, 가장 온전한 기쁨이 샘솟는 제자리였다.


  어딘가 아주 좁은 문을 지나 아주 먼 길을 걸어가면 그 끝에 아주 작은 영원의 자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오해와 착각이 언어적 인식의 한계 속에서는 팽배했었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던 것이다.


  인식의 한계라는 이 작디작은 원을 제외한 그 바깥의 나머지 삼라만상은 다 영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실은 지금 이 작디작은 원도 본래 영원의 영토였다.


  모든 곳이 영원의 자리였고, 인간의 제자리였다. 당연하게 영원을 누리라고 인간에게 허락된 그 모든 자리였다.


  다만 인간이 자신을 고집하는 작은 인식의 한계에 갇혀, 그 영원의 자리를 스스로 가리고만 있었던 것이다.


  이 삶의 모험가들은 무슨 일을 했는가?


  그들은 언어적 인식 이전에 이미 존재하기를 시도한 것이다.


  이것은 실존주의의 전통에서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잘 알려진 말로도 다시 묘사된다.


  자신이 자신을 고집하는  언어 바깥은  영원이다. 자신이 아니라 삶을 살려고 우리가 바로 시도한다면 이는 매우 빠르게 조우될  있다. 거기에는 분명 가능성이 있다.


  자신보다 삶이 크다. 이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통제하려고 하고, 그 결과 매우 불안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제자리에 바로 앉아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삶 위에 바로 앉아버림으로써, 삶이 우리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그대로 체감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삶이 영원의 색채로 물든다.


  기쁨의 미소가 얼굴을 물들인다.


  우리가 찾던 그것은 언제나 우리가 앉아있던 거기에 있었다.


  그것 위에 당연하게 앉아있었기에, 그것이 보이지 않았던 것뿐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로써 분명하지 않겠는가.


  영원의 숲에는 앉을 자리가 많다.


  (시계의)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앉아서, (존재의) 시간을 가득 누릴 우리의 제자리는 아주 많이 준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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