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깨닫는마음씨 May 16. 2024

깨달음에 관한 불편한 진실, 어쩌면 위로 #5

"실재의 깨달음과 이념의 신비체험"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신념이라 부르고, 보다 집단적인 차원에서는 이념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깨달음과 가장 먼 것이다.


  우리가 신념으로 살아가고 이념적으로 될수록 깨달음과는 점점 멀어진다.


  깨달음에 대한 적지 않은 수의 어떠한 착각은, 깨달음을 일종의 이념실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정확히는 특정한 이념이 전적으로 체화되어 이념적 인격을 형성한 상태를 깨달음이라고 오해하곤 한다.


  그러니 깨달은 사람일수록 (특히 진보적 이념을 갖고) 정치참여에 더 적극적이라는 이상한 말이 나오곤 하는 것이다.


  깨달음의 구현자들로 우리가 대표적으로 꼽는 붓다와 예수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제일 먼저 거부했던 것은 정치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치지도자로 표상되는 것을 가장 바라지 않았으며, 몇 번이나 강조해서 자신들은 위정자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즉, 자신들이 인류를 향해 전하고자 하는 바가 어떠한 이념이 아니고, 자신들은 이념적 리더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경계지었다.


  오해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은 정치무용론이나 "이념은 나쁜 것이다."라는 식의 주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고 싶은 것은 단 하나다.


  깨달음은 이념이 아니다.


  이념과 아무 상관없으며, 이념으로는 닿을 수 없다.


  깨달음을 이념과 연결시키고자 하는 이들은, 깨달음이 가야 할 길을 오히려 이념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이념을 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두어 깨달음을 그 아래 복속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제 깨달음은 이념의 기준으로 평가된다. 특정정당을 지지하면 깨달음의 수준이 높은 것이고, 특정정치체제를 추구하면 진짜 깨달음을 얻은 것이라는 식이다.


  이러한 이들은 자신이 경험한 신비체험 같은 것을 깨달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성을 보이곤 한다.


  이 경우 깨달음이란 이들에게 힘의 소재다. 신비체험의 경험자들은 자신이 특별한 힘을 얻은 것이라고 믿게 된다. 그리고는 그 힘을 이제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일종의 사회적 권력으로 바꾸기 위해 이념화가 시도되는 것이다.


  깨달음을 이념화하거나 깨달음 위에 이념을 위치시키려는 이유는 이처럼 현실에서 자신이 충분히 힘을 갖지 못한 것을 문제라고 여기는 개인이 어떤 마법적인 기회로 힘을 획득하려 하는 열등감 및 그로 인한 권력욕의 문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나 스즈키 선사는 분명하게 말한다.


  깨달음은 신비체험이 아니라고, 어떠한 황홀경(ecstasy)이나 변성(trans)의 상태가 아니라고 부단히 강조한다.


  깨달음은 오히려 그 반대다. 아주 명징하다. 매우 일상적이며 도취가 없다.


  실재에 눈뜬다는 것은 그렇게 투명한 단순성으로 일어난다.


  모든 마음이 온전했고, 이렇게 약한 나도 실은 괜찮았던 것이며, 나의 그 모든 것이 어떤 자상한 것으로부터 용서받고 그 품에 안기게 되는 그런 정서적 카타르시스의 경험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 이념이 만든 결과물들.


  이념에 경도된 의식이 그 고집의 끝에서 자기최면의 언어로 만들어낸 가상현실의 환상이다.


  깨달음은 역으로 그러한 환상에서 깨어나 눈을 뜨는 것이다.


  신비체험을 추구하는 이들은 특정한 몸동작이나 호흡, 주문암송, 글쓰기 등을 반복적으로 한다. 남들에게도 그렇게 시킨다. 이처럼 하나의 행위를 반복적으로 지속하게 함으로써 의도하는 것은 최면이다. 인간은 이럴 때 변성(trans) 상태에 빠져든다.


  변성 상태의 특성은 자신이 평소에 추구하던 환상을 더 구체적인 이미지로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종의 꿈꾸는 상태와도 같다. 자기가 내려놓은 가상의 정답을 자기의 꿈속에서 경험하며, 그것에 실재의 권위를 부여하여 진리처럼 믿어버리는 자기최면은 이렇게 작동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념이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념의 실현과 최면의 구현은 전적으로 동일한 기제다.


  자신이 언어로 꾸며낸 가상현실을 진짜처럼 믿게 만들어 자신의 권력을 증진시키려 할 때 이 기제는 자주 활용된다. 특히 신비체험은 사람들에게 그 가상현실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권위의 장치로 자주 기능한다. 자신이 놀라운 경험을 했다며 어떤 상위의 현실에 대한 권위자처럼 행세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분명하게 말한다.


  한 개인의 신비체험은 체험자 그 자신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권위를 가질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된다고.


  자신이 꿈속에서 왕이 되었다고, 세상에서 왕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망상이다.


  신비체험은 매우 종종 이러한 망상을 발달시킨다. 그래서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이들에게 신비체험은 독이 되곤 한다. 신비체험의 비일상성에 취해 자신이 정말로 대단한 무엇인가를 얻은 특별한 존재라고 의심없이 믿게 됨으로써, 실은 독에 중독되어 있는 것이라는 자각은 아주 힘들어지기 때문에 이것은 치명적이다.


  정리해보자.


  신비체험은 눈을 뜬 채로 꿈을 꾸게 된 것이다. 그렇게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으니 자신이 깨어나있다는 착각이 수반된다. 깨달은 척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자신이 꿈꾼 내용일 뿐이다. 자신이 쓴 소설을 읽고 있는 것과 같다.


  스즈키 선사가 말하듯이, 깨달음은 자기가 만든 픽션을 보는 눈이 아니라, 실재를 보는 눈을 뜬 것이다.


  실재는 아주 단순명료하며 견고하다. 다층적이고 복잡한 텍스트들로 이루어져 있다거나, 어떤 정반합의 대극적 구조 같은 것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그런 것들이 바로 게임메뉴얼처럼 자기가 만들어낸 소설의 내용인 것이다.


  이러한 소설을 왜 썼는가에 대한 이유는 분명하다.


  이념을 이루기 위해서다.


  이념은 꿈속에서밖에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신비체험이라는 꿈 체험을 불러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념이 이루어진 모습으로 그 꿈의 내용을 소설처럼 설계한 것이다.


  이념 또는 신념에 집착하며 매우 고집스러운 이들이 결국에는 신비체험을 하게 된다는 학술적 보고들은 아주 유의미하다.


  자신의 신념이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며 세상 및 사람들과 반목하는 일을 지속하다가, 그렇게 버티고 버티는 긴장된 고통의 끝에서 뇌가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한 화학물질을 분비함으로써 변성 상태가 이루어지며, 마침내 고집을 지속하던 개인은 자신만을 위한 꿈의 영화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가 쓴 각본대로, 자신이 맞다고 우쭈쭈 해주는 내용만이 영원히 상영되는. 


  이념은 이처럼 정신적 마약이며, 신비체험은 뇌내 마약이 작용한 결과다.


  정말로 깨달음의 정반대편에 있는 것이다.


  LSD나 환각버섯을 복용한 뒤 신비체험을 경험한 1960년대의 히피들(그리고 그 워너비들)은 자기들이 깨달았다고 착각하며 각종 이상한 소설들을 많이도 남겼다. 그런 그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는가. 오늘날 드러나는 가장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기득권이 되어 왔다. 결국 그 핵심은 권력욕이었던 것이다.


  자유를 주장하지만, 실상 바라는 것은 권력이었다. 권력이 있어야 자기가 자유로울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리라.


  이처럼 자유를 수단에 의해 조건화함으로써 눈은 더욱 흐려진다.


  깨달음은 자유를 조건화하지 않는다. 자유로 바로 간다. 힘이냐 자유냐는 깨달음의 선택이 아니다. 힘과 자유의 통합 같은 망상의 말장난은 처음부터 거절한다. 깨달음의 눈은 자유만을 바로 본다.


  자유야말로 실재이므로.


  우리는 이념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것이라는 환상을 자주 갖곤 한다. 그러나 이 사실을 기억해보자. 어떤 것을 실현하겠다는 이념은 아직 그것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현실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 뿐이다. 그런 즉, 이념은 결코 추구하는 그것에 도달하지 못할 필연적인 운명 속에 있다.


  하지만 실재를 본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 그 실재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보는 것이다.


  이미 실현된 것을 보는 것이다.


  결국 우리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놓여 있는 셈이다.


  자유로울 것인가, 자유의 이념을 추구할 것인가?


  자신이 원래 처음부터 자유로웠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과, 누군가가 자신의 자유를 가로막고 있다고 착각하며 자신의 뜨거운 신념의 의지로 진정한 자유를 손에 넣겠다는 일과는 달라도 완전히 다른 것이다.


  전자는 실재의 깨달음이고, 후자는 이념의 신비체험이다.


  어느 쪽이든 인간의 삶일 것이다. 그러나 그 경계는 분명하다. 자유는 눈을 뜨고 본 그 분명함 속에 있다.



작가의 이전글 영원의 숲 #1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