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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May 17. 2024

영원의 숲 #15

"근거 있는 자신감의 길"




  길이란 것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이런 얘기부터 해보자.


  1960년대 자유주의의 영웅적 도취감으로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장미빛 환상으로 뇌를 흠뻑 물들인 히피들이 만든 세상에서 태어난 커트 코베인은 끝내 장총으로 그의 머리를 날려 그 세상을 떠났다.


  68혁명이 한 일이라고는 폴 리쾨르를 쓰레기통에 쳐박은 것뿐이다.


  왼쪽의 전공투와 오른쪽의 미시마 유키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현실이라면 지옥이다. 야스다 강당에서도, 아사마 산장에서도, 이치가야 자위대본부에서도 그런 지옥이 펼쳐졌다. 지옥의 자아도취 파티.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폐쇄적인 사회를 바꾸겠다고 나선 단카이 세대는 결국 가장 꽉 막히고 경직된 사회의 주인이 되었다. 억압받는다고 생각하던 이가 억압하는 쪽으로 성공적인 자리이동을 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여전히 자유의 투사이자 젊은 저항정신이라는 정체성을 지속하고자 한다.


  베이비붐 세대인 히피들도, 단카이도, 586도 이런 면에서 매우 닮아있다.


  베이비붐 세대의 특성이라면 역시 근자감일 것이다. 재생을 꿈꾸는 시대정신에 입각해, 뭘 해도 다 자신들에게 우호적이며 자신들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무럭무럭 배양되었다. 심지어 이 위대한 유산은 자신들이 받은 방식을 답습하여 세습되기에 이르렀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21세기 히피들의 세상을 마주하고 있다.


  20세기의 히피들은 달세계로 떠나며 인류의 미래가 여기에 있다고 환희했고, 21세기의 히피들은 온라인세계로 떠나며 동일한 환희감에 젖어들었다.


  우주가 아무 것도 없이 텅비어 있다는 사실과 함께 장미꽃은 시들었듯이, SNS 역시도 그저 근본적으로 텅비어 공허한 것이라는 사실 또한 일찌감치 발각되었을 것이다.


  결국 근자감은 방향성을 잃었을 때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에게 알려졌다.


  방향성이 중요한 이유도 분명하다. 출발점인 근거가 없는 것이 근자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목적을 향해 갈 수 있는 방향성이라도 분명해야 추동의 동력이 생겨날 수 있다. 베이비붐 세대가 늘 목적지향적인 이념을 필요로 하는 이유다.


  애초부터 근거[출발지]도 없었으며, 방향성[목적지]도 잃게 된 이들은 자신을 말 그대로 길을 잃은 미아처럼 경험할 것이다. 가장 자신들을 향한 관심의 호혜 속에서 살아왔으면서 누구보다 소외감을 경험하는 베이비붐 세대의 역설은 이렇게 생겨났다.


  길잃은 미아처럼 자신을 경험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다 왕이 되기를 꿈꾼다.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복지와 번영을 제공할 수 있게 된다면,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은 소외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처럼 가장 외로운 이들이 왕을 꿈꾸는 법이다.


  그렇게 근자감 속에서 살아오다가 끝내 길을 잃게 된 이들은, 권력과 지위 특히나 경제적 부를 얻는 일에 매진했다. 자신의 계급을 더욱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일이 이들의 당위를 형성했다.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다 책임지며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왕이 되기 위해서라는 이념을 걸고.


  바로 이런 방식으로 독재하는 왕은 출현했던 것이다.


  자신이 다른 이를 '감히' 책임지고, 행복하게 '감히' 만들어   있다는  기획은, 언제나 자신이 가장 높은 자임을 상정하는 최대치로 오만한 독재의 발상인 까닭이다.


  그렇게 히피가 왕이 되고, 독재에 저항하던 젊은 투사가 독재자가 되는 일에는 조금의 모순도 없었다. 그것은 동일한 행동원리로 일어난 일이다. 근자감이라는 것을 의존하고 있으면 누구나 이러한 트랙으로 가게 된다.


  이러한 20세기의  아래에서 육된 이들도 마찬가지로 21세기의 왕을 꿈꾸었다. 동일한 방식으로 그들 또한 애초에 근거없던 출발지에서 시작해 방향성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히피들, 임의적으로 우리가 힙스터라고 부를 이들이 자기만의 특별함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들이 이처럼 근본적으로 다 잃어서 실은 텅비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습은 그들의 영토인 SNS를 닮아 있다.


  디지털 노마드라고? 들뢰즈의 리좀이라고?


  그렇지 않고 그냥 길잃은 미아다.


  길잃은 미아가 아무리 언어로 자기를 채색하며 스스로의 언어에 취해 도취에 빠져봤자, 카메라 앞에서 배를 가르는 미시마 유키오가 될 뿐이다. 다자이 오사무라는 더 악성의 도취법도 물론 있다. 할복은 자기만 죽지만,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라는 비극적 자아도취는 자기 대신에 다른 이들만을 끝없이 파멸시키려는 연쇄살인마의 야욕을 품는다. 자기를 부정한다고 하는 자는 실은 인간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이는 필연이다.


  그러나 다자이 오사무는 언젠가의 비오는 날 니체에게 먼지나게 쳐맞을 테니 거기에 맡겨두고 우리는 우리의 얘기만을 하도록 하자.


  나도 언젠가의 비오는 날 노래방에서 머라이어 캐리의 Without You나 셀린 디온의 My Heart Will Go On, 또 휘트니 휴스턴의 The Greatest Love of All을 그들 같은 울림으로 부를 수 있는 날이 올까. 좌석에 흡착된 오랜 먼지들마저도 그 진동으로 휘날리게 하는.


  우리의 디바들이 갖고 있던 것은 단지 고음의 성량이 아니었다.


  그들이 갖고 있던 진실한 것은 바로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그들의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었으며, 그들은 바로 그 근거 위에 서서 노래를 불렀다.


  그 모습은 흡사 웅변과도 같았는데, 아니 그것은 차라리 기도였을 것이다.


  그들은 이 지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소중히 끌어모아, 자신의 몸을 통로로 써서, 그것들을 모두 천상을 향해 직각으로 쏘아올렸다.


  그들은 어떤 신성한 발사대였다.


  대지에 굳게 발을 디디고 하늘을 향해 인간이 대체 무엇인지를 알리고 있던, 그렇게 그들 자신의 몸으로 증거하고 있던.


  그들의 존재 자체가 우렁찬 기도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이러한 말을 듣는다.


  존재의 근거는 언제나 존재 자체라고.


  존재는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직 존재 자체에만 근거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그러니 우리의 디바들이 노래하던 것은 하나의 멜로디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밖에 없을 자신의 존재를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바로 그 귀한 존재 자체의 사실 위에만 서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자신감의 근거가 되는 일.


  이것이야말로 시작부터 근거를 잃은, 그리고 방향성마저 상실한 근거없음의 자리에서도 다시 또, 아니 이제야말로 처음으로 찾을 수 있는 우리의 근거다.


  땅을 출발지로 삼아 하늘을 목적지로 향하는 것이 있다.


  노래하는 이의 모습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인간이 서있는 모습이다.


  바로 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방식 자체가 인간의 근거이자 동시에 방향성이다.


  이처럼 존재를 근거로 삼아 살 때 우리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 생겨난다.


  그것의 이름은 자신이다.


  이제야 우리는 자신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지금 자신의 존재를 근거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으로 사는 자신감(自身感)이 있으니 자신감(自信感)이 생긴다. 스스로를 근거로 할 때 그러한 스스로가 더 신뢰롭게 경험되는 일은 당연한 까닭일 것이다.


  자신의 근거는 존재뿐이고, 그러니 자신감의 근거도 존재뿐이다.


  그 외의 다른 것들에 의존하고 있는 자신감이란 실은 근거없는 것, 그래서 이내 허물어질 소재다. 소영웅주의의 자아도취에 빠진 핑크빛 뇌는 선량한 이나 쓰레기통에 밀어넣어 매도한 뒤 자기가 자유로운 우주의 왕이라며 독재를 거듭하다가, 결국에는 그 끝에서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라는 말만을 공허한 변명처럼 지루하게 반복할 운명이다.


  자신만 길을 잃어 힘든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이가 길을 잃어 힘들게 만들고자 하는 이 방식은, 자신이 지금 길을 잃은 미아라는 것을 확인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얼마나 나이를 먹었든, 어떠한 경험을 쌓았든, 무엇을 알고 있는 누구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신이 실은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때서야 길이 보인다.


  길이 필요하다면 존재는 늘 길일 것이다. 그러나 존재는 존재가 아닌 것을 존재처럼 의존하던 악성의 습관을 멈추어야 보이게 된다.


  자신의 여타의 능력과, 경험과, 관계에 근거하여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한, 이 존재라는 근원의 길은 결코 보이지 않는다.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장 보이지 않는 존재의 역설이란 이러한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더라도 있다.


  없어보이지만 반드시 근거가 있다.


  그 희망을 품고 인간은 노래해왔던 것이다. 하늘을 향해.


  이것을 인간의 종교성이라고 부를 것이다. 자신의 근거를 찾아 부르는 인간의 본성이다.


  종교성은 없는 것을 맹신하며 믿는 일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가장 가까이 있으나 다만 보이지 않는 것을 정말로 있는 것으로 확인하고 싶어하는, 그렇게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그 무엇을 다시 찾고 싶어하는 매우 실제적인 방향성에 대한 묘사다.


  그렇게 방향성이 잡히면 이제 미아의 입장은 한결 낫다. 북극성을 보며 걸어가면 된다.


  걸음걸이는 더 안정적인 형상으로 변해가고, 자신의 발소리도 기분좋은 리듬으로 자신의 귀에 들려오게 될 때, 문득 궁금해진다. 뭔가 중요한 사실에 지금이라면 닿을 것만 같다. 왜 자신은 이렇게 걸을 수 있었는가? 걷는 일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보이지 않았지만, 언제나 땅이 있었을 것이다.


  한 번도 자신이 그 위에 있지 않았던 적이 없을 것이다.


  단 한순간도 자신을 버리거나 배신하고 도망간 적이 없는 바로 그런 것이 있었다.


  자신의 삶이란 언제나 그 위에서의 삶이었던 것이며, 그 위에서만 삶이었던 것이다.


  어디로 가든 내가 가는 모든 곳이 길이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으리라.


  어디를 걷든 다 그 위를 걷고 있었기 때문에, 다 그것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렇게 내가 나인 근거가 있었다.


  내가 나라는 그 사실이 있었다.


  그리고 세상은 즉시 빛으로 가득 찬다.


  생생한 존재의 빛으로.


  "빛이 있으라."


  존재는 그렇게 스스로의 빛으로 모든 것을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설령 불운하게도 부모의 환영을 받지 못한 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아주 거대한 이 축복의 빛 속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히피 따위는 되지 않을 것이며, 왕 같은 것은 꿈꿀 필요도 없을 것이다. 특히나 비오는 날 니체에게 노래방 뒷골목으로 끌려나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이 우주의 영원한 기쁨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싶어했을까.


  이 우주에 있어 다른 무엇도 아닌 순수한 기쁨의 원천, 바로 그것으로 인간은 탄생했다.


  존재는 바로 그렇게 인간을 자신의 위에 올려 존재의 대표로 세상에 오게 했다.


  인간은 존재의 자랑.


  그 영원한 기쁨.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우리를 존재하게 한 것의 미소다.


  "너는 나의 영원한 자랑."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한 호흡 한 호흡에, 한 동작 한 동작에, 우리의 세포 전부에 이 말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알게 된다. 반드시 듣게 된다.


  우리가 그렇게 노래하고 있으므로.


  모든 세포를 울려 하늘의 별들을 울리고 있으므로.


  그리고 우리는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미 별 위에 서있던 우리 자신을.


  그렇게 하늘은 땅이 되고 인간이 되었다.


  그 자랑스런 빛으로 가득 찬 것을 이제 자신감이라고 부를 것이다.


  근거가 있어도 완벽히 있는 그 자신감으로 인간은 살아가라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 빛이 어디로든 길이 되게 할테니 자유롭게 걸어가라고.


  우리가 이 영원의 숲으로 대체 어떤 길을 찾으러 왔는가의 그 연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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