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너머로
영화를 보고는 30분간 찾아다녔다.
합정 롯데시네마 K열 중앙에 앉아 있던 새끼를 찾아서.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는 팔을 자기 머리만큼 높이 드는 과잉된 동작으로 영화 내내 팝콘을 쳐먹으며 영화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시야를 가리고 정신을 산만하게 하여 내 인생을 통째로 망친 것만 같은 그 새끼를.
만나면 주변에 소화기라도 들고 대가리를 깨버리려고.
아니면 차라리 내 대가리를 깼어야 했을까.
영화관에서 절대 보지 말아야 하는 영화를 보러 갔던 어리석음을 후회하며.
집에서 혼자 맞이하고 싶다. 애도의 시간은. 기대하던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고, 가장 아름답던 환상이 산산이 흩어져버리는 그 시간은 홀로 오롯하게 마주하고 싶다. 그랬어야 행복했을텐데. 이 영화를 집에서 혼자 보지 못한 것은 지난 10년간 가장 한스러운 일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경험이 필연적인 것이었다면? 그도 영화 내내 이 불쾌한 경험을 견디지 못해 그토록 산만했던 것이라면?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모두가 다들 그렇게 자신에게 소화되기 어려운 경험에 대해 아주 많이 화가 나있었던 것이라면?
그렇다면 이 영화는 우리들의 삶과 직결되는 일에 성공한 것이다. 질문을 던지는 정도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스크린의 안팎으로 하나의 짙은 흐름이 되어 넘실거리고 있었다.
세상이 자신들의 무대라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환각버섯의 꿈에 도취되어 있던 히피들이 만들어낸 바로 그 미디어 세상의 환상에 배신당하고 절망하여 1994년의 커트 코베인은 자기 자신의 대가리를 깼다. 5년 뒤 '파이트 클럽'의 타일러 더든도 자신의 대가리를 열심히 깨던 중에 그 커다란 분노가 성토하던 목소리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한다.
"우리 모두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언젠가는 백만장자, 영화배우, 록스타가 될 것이라 믿고 자란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아. 우리는 서서히 그 사실을 깨닫게 되지. 그리고 우리는 지금 존나 빡쳐 있어."
마릴린 맨슨의 평생을 이어온 광대짓은 바로 이 사실을 고발하기 위해서였다. 미디어가 만들어낸 환상,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 아니라 진실이니 믿고 따라오기만 하면 멋진 미래를 약속하겠다는 그 거짓 예언에 기대를 걸었다가 철저히 배신당한 이들의 저 지옥 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처절한 분노의 구토감을 전성기의 맨슨은 대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또한 알고 있던 바는, 환상을 고발하고 있는 그 자신도 환상이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결국 그는 마녀를 십자가에 매달아 화형시키는 이가 그 다음의 십자가에 매달리게 될 희생양이라는 사실을, 그 연쇄되는 폭력의 구조를 르네 지라르처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Tourniquet과 같은 곡에서는 직접적으로 노래한다. "당신들의 증오를 나에게 쏟아부어. 내 머리를 당신들의 제물로 삼아. 난 당신들의 지혈대잖아."라고.
오늘날의 우리는 어떤 때 가장 분개하는가?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리라고 믿었던 환상이 깨지게 되었을 때다. 그러면 환상을 깬 이를 찾아 그 대가리를 똑같이 깨려고 찾아다닌다.
그러나 그런 실체를 찾지 못할 때,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몰라 온몸에 차오른 열기로 다만 그 자리에서 들썩거리며 몽유병환자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연신 팝콘이나 입에 물릴 뿐이다. 그러지 않으면 저도 모를 욕설이, 어쩌면 울음이 튀어나올 것 같기에.
이 영화가 제공하는 경험의 양상이다.
레이디 가가는 최고의 캐스팅이었다. 형편없고, 매력적이지 않으며, 뮤지컬의 장면들은 하품이 나온다. 그러면서 바로 그 상태를 집요하게 들이민다. 타일러 더든이 다시 말한다.
"너는 그저 노래하고 춤추는 세상의 쓰레기일 뿐이야."
할리 퀸은 자신과 함께 뮤지컬을 펼치는 조커 또한 정확하게 이 지점으로 수렴시킨다. 질리도록 지겨운 환상들 속에서 조커의 운명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아서도 직감한다.
영화는 전작을 더욱 심화해서, 아서 플렉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를 우리가 헷갈리지 않도록 할리 퀸이라는 장치를 써서 친절하게 다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아서의 엄마와 할리 퀸은 동일한 대상물이다. 그녀들은 환상을 모시는 무녀. 아서에게 환상을 적극 받아들여 신앙하도록 만들며, 그렇게 아서를 거듭 환상에 붙들어매는 저주의 무녀들이다. 곧, 아서라는 존재 그 자체를 실은 가장 부정하고 있는, 아서의 가장 큰 배반자들이다.
할리 퀸이라는 내면의 아니마적 인물을 만나 그 안내에 따라 아서가 자신의 그림자를 통합하고 조커로서의 진정한 참자기로 거듭나게 된다는 식의 융의 참담한 서사구조를 인용한 영웅신화의 저질스토리가 아니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토드 필립스는 완벽하게 자신의 임무를 해냈다. 이 영화는 영웅신화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이것은 반영웅에 대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철저한 영웅신화의 해체다. 더 이상의 영웅은 없다. 환상은 모조리 다 끝이다. 적어도 환상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되던 것은 장미빛의 낙원이 아니라 잿빛의 지옥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으면 한다. 바로 그러한 엄격성이 이 영화에는 담지되어 있다.
사람들이 신처럼 숭배하던 괴물을 죽인 이는 대신 신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의 대상을 잃은 이들이 그를 목매달 것이다. 환상은 바로 이렇게 희생양을 거듭 요청하는 방식으로 끝없이 지속되고자 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인간은 우상의 동물이라고 말한 이유다.
아서는 이 사실을 영화 내에서 분명히 알아차리게 된다. 전작에서 하나의 우상이 되었지만, 실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사람들은 아무도 아서 그 자신을 보려 하지 않는다. 트라우마와 무력성으로 점철된 아이의 모습을 투사한 환상으로 보거나, 모든 규칙의 파괴자의 모습을 투사한 환상으로 볼 뿐이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우주의 모든 말은 아서를 향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뒤집어씌운 환상에 그렇게 열렬히 독백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 세상의 누구도, 심지어 스포트라이트를 가장 화려하게 받는 무대의 정중앙에 서있다 할지라도, 그 어느 누구도 아서라는 인간에게 관심이 없다. 친교도 환상, 열광도 환상, 사랑도 환상이다. 자신이 보고 있던 환상의 모습으로 아서가 계속 행위해주기만을 요구하며, 그렇지 않을 때 모두는 가차없이 등을 돌린다. 쌓아올려진 것은 벽. 아주 높은 단절의 벽이다.
그 벽 앞에 인간의 맨몸은 내동댕이쳐질 것이고, 누구도 그 자신일 수 없도록 부정될 것이며, 고통받는 이의 역사는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여기 인간의 아들이 또 태어나 만인의 희생양으로 지옥처럼 고통받으리라."
신성한 아들의 탄생을 알리며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내용은 그렇게 아서에게 들렸으리라. 그 노래를 부르며 아서는 절규한다. 그것은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도록 운명지어진 인간의 아들들을 대변하는 단말마의 항의, 돌이킬 수 없는 최후의 심판 앞에서의 어떤 한 구토다.
그리고 그 잔혹한 인간운명을 향해 펼쳐지던 처절한 종교적 또는 존재론적 비탄의 몸짓이야말로 바로 조커였음을 우리는 비로소 눈치챈다.
세상 앞에 조커가 없음을 선언한 아서는 그로 인해 세상의 모든 것을 잃고 난 뒤에야, 그렇게 모든 환상을 다 잃고 난 뒤에야, 환상에 기대하거나 의존하는 일 없이 헐벗은 맨몸의 그 자신으로서 존재의 소리를 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조커의 역설.
조커가 되려고 한 아서는 오히려 조커를 상실함으로써 조커의 의미를 이룬다. 여느 연기나 분장 없이도.
그러나 그것은 더는 조커라는 이름으로 불릴 존재가 아닐 것이다. 그는 그냥 아서 플렉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 종교적 반역자(the rebel)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
콜린 윌슨은 이 종교적 반역자의 모습이 모든 인간에게 담겨 있는 본래적 인간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본성을 눈치채고 그 본성으로 사는 이들을 아웃사이더, 또는 실존주의적 인간이라고도 말한다. 조커는 분명 이 실존주의적 인간에 대한 표현이다. 전작에 이어 본작에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이 실존주의적 인간상을 묘사하는 일에 집중한다. 그리고 완성해낸다.
키르케고르가 강조하듯이, 실존주의적 인간의 반역은 사회적 반역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종교적 반역의 색채를 띤다. 감독은 그 부분을 한층 분명히 했다. 조커는 반사회적 영웅이 아니라, 불가해한 운명적 고통 속에서 종교적 절규를 토해내는 인간실존이다.
영웅신화는 없다. 그러한 조커는 없다. 조커의 의미는 다시 쓰이며, 더욱 깊어진다.
그런 만큼, 세상을 뒤바꾸어줄 파격의 반사회적 영웅을 바라던 이들에게 아서는 배신자가 된다. 로마의 지배와 맞서 싸울 사회적 지도자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거부한 예수가 유대인들에 의해 못박혔듯이. 그렇게 자신의 실존을 또 다른 환상에게 내맡기기를 지속하고자 하던 이들은 이제 새로운 희생양을 찾았다. 영화의 주제의식은 바로 이 비극성 위에 놓여 있다.
언제까지 조커를 기대할 것인가. 그 기대가 깨지면 다른 누군가의 대가리를 깨려는 일을 얼마나 더 반복하려 하는가. 조커라는 이름의 이 영화를 특정한 방식으로 기대하고 있던 이들을 또한 배신하는 방식을 통해, 영화는 이러한 주제의식을 매우 효과적으로 전하고 있다.
이것은 거의 실존주의의 촉구와도 같다. 평생 환상만을 쫓다가, 그 환상에 배신당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그 자신이 새로운 환상이 되려 했지만, 결국에는 쌓여간 그 환상의 무게에 눌려 파멸할 수밖에 없던 한 인간의 모습을 이 영화는 우리의 보편적인 자화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비극성 속에서 찰나의 빛을 전하고자 한다.
이 영화의 부제인 Folie a Deux의 의미를 상기해보자. 이것은 관계 속에서 정신병적 증세가 공유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조커라는 환상은 아서 혼자서만 만들게 된 것이 아니다. 각자 자신들이 믿던 환상의 배신과 그로 인한 절망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고 우울해진 모두가 그 조커라는 환상을 함께 공유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환상을 증폭시키고 계속 희생양을 찾아 그 환상의 구조를 지속하고자 하는 주체는 바로 관계다. 주체없는 주체라고도 할 것이다. 이 관계야말로 환상 중의 환상이다. 관계 속에서 상대를 만족시키려 하는 일을 떠올려보자. 하면 할수록 상대는 오히려 더 불만족을 표하며 우리는 끝없이 소진되어가기만 할 뿐이다. 현대의 심리상담자들이 관계야말로 모든 고통의 이유라고 입을 모아 말하는 이유다.
관계를 구성하는 것은 행복에 대한 환상적인 기대, 그리고 그 결과로 수반되는 애증의 상태다. 그렇게 관계의 대상만이 우리 삶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으로 평가된 속에서, 우리는 관계의 대상을 만족시키는 일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결정짓는다고 여기게 된다. 곧, 관계의 대상에 맞추어 행위한 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서 정당하게 설 수 있다고 믿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관계의 대상에 대한 의존의 상태며, 관계중독의 상태다. 이러한 상태를 지속함에 따라 가장 빠르게 상실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아서의 모습과 같다. 상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상대에게 맞추려는 행위를 거듭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게 된다.
그러니 관계 속에서의 모든 것은 흡사 아서인지 조커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인 것처럼 헷갈려진다. 무슨 본캐, 부캐의 문제이기라도 한 마냥.
그러나 정말로 다루어야 할 핵심은,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많고 착한 아서가 자신의 그림자인 조커를 통합해야 한다든가, 반대로 조커가 아서의 순수한 측면을 기억해야 한다든가 하는 따위의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둘이 아니라는 것은, 둘 다 아니라는 것이다.
엄마가 만들어낸 아서라는 대상적 역할도 아니고, 할리 퀸이 만들어낸 조커라는 대상적 역할도 아니다.
관계에 의해 그 존재는 규정되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의 운명 앞에 일종의 종교적 반역자로서 통렬하게 호소할 수 있는, 때로는 하늘을 향한 웃음으로 설 수 있는 그 본성으로 살아가는 한 인간이다. 조커의 면모를 띤 인간실존이며, 아서 플렉 그 자신이다. 그러나 그 이름은 엄마의 아들에게 붙여진 그 대상적 역할의 이름이 더는 아니다.
그는 누군가를 웃기며 행복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 그렇게 관계적 대상의 만족도에 의존해 자신을 세우려고 하지 않는, 다만 그 자신으로서의 아서 플렉이다. 그 이름이 아니라 그 존재가 그렇게 대답한다.
가장 신성한 종교적 질문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이다.
이것은 모든 이를 황당하게 하는 가장 농담같은 질문이다. 그래서 조커(Joker)만이 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역으로 말하자면, 이 종교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는 이가 바로 조커다. 종교적 반역자들, 실존주의적 인간은 이 질문으로 살아간다. 자신이 하고 있는 역할들의 이름을 넘어, 그것들로부터 해방되어 자기 자신의 존재를 바로 찾고 싶은 까닭이다.
"나는 누구인가?"
전작에서부터 이어져온 이 물음의 탐구는 이제 본작을 통해 완성된다.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에 아서로부터 그 대답을 들을 것이다.
그 이름이 아니라 그 존재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영혼이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기를, 그렇게 바랐던 것이다.
그토록 성나있던 우리 모두를 위해. 환상 속에서 자신을 잃은 까닭에 애증의 대상을 찾아다니고, 그런 만큼 끝내는 스스로가 더욱 속상하기만 했던 우리 자신을 위해. 환상 너머로, 함께 자유롭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