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상담자의 진실"
당신은 당신도 모르는 새에 가스라이터다.
친절한 상담자를 꿈꾸고 있거나, 친절한 상담자를 참된 상담자상으로 전제하여 청하고 있다면.
여기에서의 친절함이란 모나지 않고 순둥순둥하며 엄마가 설거지를 하라고 부를 때 환하게 대답하면서 달려나가는 그 눈웃음 띤 유순한 표정을 주변에 전방위로 뿌리고 다니는 어떤 모습의 속성을 뜻할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착한아이 콤플렉스에서 발로했을 가능성은 높다. 이 콤플렉스의 핵심적인 문제점은 무엇일까?
바로 자기 자신을 내적인 은밀함 속에서 높은 위상의 존재로 위치시킨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거의 반드시 '착하다'는 속성을 계급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유교사회인 한국에서는 이러한 경향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논쟁이나 대립상황에서 상대에게 이기기 위해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선한 존재인지를 부각시키려고 한다. 능력이 안되는 이들일수록 그들의 자기소개서는 무수한 선행의 훈장들로 가득 치장된다.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 친절함이란 속성은 바로 이런 생존경쟁에 지나치게 경도된 입장을 반영한다. 콤플렉스라는 것 자체가 애초 다양한 생존의 문제에 직면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친절함에 대한 추구는 '권위'로 생존경쟁에 승리하고자 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우리는 어떤 이가 친절한 태도를 보일 때 그를 우리보다 더 상위의 존재로 자주 간주하곤 한다. 인격적으로 더 높은 수준에 있다거나, 경제적 풍요로움이 있기에 유한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 환상이 작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환상을 역으로 활용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자신이 친절함을 표방하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을 상위의 존재로 보며 권위를 양도해줄 것이라 획책하게 된 이들이다. 가스라이터라고 부른다.
가스라이터의 핵심은 지배가 아니다. 지배는 권위의 결과일 뿐, 그들이 상대로부터 가장 얻어내고자 하는 것은 바로 권위다. 상대가 자발적으로 자신에게 권위를 넘겨주게 될 때 이들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최상위의 계급,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올라선 것만 같은 승리의 도취감이다.
이 권위의 쾌락을 얻기 위해 상담을 배우려는 이들, 또 상담자로 활동하는 이들의 수는 결코 적지 않다. 그리고 반드시 초심상담자는 이 권위의 쾌락이 주는 유혹에 도전받게도 된다. 공감이니 수용이니를 남발하며 내담자에게 가장 친절한 상담자로 기능하려는 자신의 모습이 권위에 중독된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배워가며 상담자는 성장해간다.
곧, 상담자는 '친절한 상담자'의 모습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상담자가 되어 간다.
오히려 상담자의 '진짜 친절함'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지점은 온순한 외연과 말씨 그리고 선함을 표방한 도덕주의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상담자의 진짜 친절함은 거울의 그것을 닮아 있다. 거울이야말로 우리에게 정말로 친절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거울은 왜 우리의 모습을 가감없이 비추고 있는가?
우리를 무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것,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기에 거울은 우리를 가감없이 정직하게 비춘다.
또한 거울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 때까지 자상한 엄마처럼 기다리겠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거울은 우리를 자기 아래의 존재처럼 하대하지 않는다. 그 반대다. 거울은 우리가 우리에게 다가온 사실들을 마주볼 수 있는 성숙한 힘이 있는 존재로서 우리를 대한다.
이것은 핵심이다.
우리가 실은 내심 누군가를 우리 밑에 있는 존재로 내려다보거나 무시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를 친절하게 대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친절한 상담자'는 내담자를 자기 아래로 전제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음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아는 자신이 내담자를 교육해주거나, 인내해주거나, 인도해줌으로써 내담자가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게 돕는다는 식이다. 모든 가스라이터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의 내용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의지가 자기 자신마저도 감쪽같이 속여, 자신은 절대 가스라이터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것이 요즘 사회적으로 만연한 가식과 위선의 기제다. 가식과 위선 속에 있는 이는 자신을 정말로 선한 존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 절대적으로 굳어진 신념이 역으로 그들이 가식과 위선의 행사자들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준다. 정말로 선한 이라면 자신을 끝없이 의심해볼 것이기 때문이다.
상담자는 바로 이러한 의심의 덕목을 끊임없이 연습하며 실천해나가는 이들이다. 그들은 소크라테스의 후예들이다. 가장 정직한 사실이 발견될 때까지 상담자들은 모든 것을 의심한다. 타인은 물론이거니와 그 자신마저도 속이려 하지 않는 이들만이 상담자로 성장한다.
때문에 상담자가 되는 과정에는 언제나 아픔이 따른다. 거울 속에 비친 그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은 쉽지만은 않다. 그렇기에 상담자는 내담자 앞에 자신이 거울로 서게 될 때 내담자 또한 그런 아픔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나 상담자가 상담자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상담자는 내담자를 아프게 하지 않으려는 친절한 이가 아니라, 내담자의 필연적인 그 아픔을 옆에서 함께하려는 친밀한 이다.
상담자가 내담자를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다. 아프게 할 수도 없다. 상담자가 내담자를 구원할 수도 또 추락시킬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권위에 대한 환상이다. 신적 부모의 권위에 대한 환상이 상담자에게 투영된 경우다.
그러나 상담자에게는 그러한 권위가 없다. 상담자는 내담자를 구원할 수 없다. 다만 내담자가 가는 그 길을 함께 걸어갈 뿐이다. 그래서 상담은 진실로 모험이다. 상담자는 내담자를 통해 인간의 마음이 펼쳐내는 갖은 경험을 모험한다. 결국에는 그 모험의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모험의 과정은 완성된다. 내담자는 자신이 더는 무력한 피해자나 희생자가 아니라 엄연한 삶의 모험가였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며, 그의 오롯한 인간성을 회복한다. 상담자가 파티원으로서 그 모험의 끝을 함께함에 따라 모험을 완수할 수 있게 된 결과다.
우리가 만약 판타지세계에서 모험에 나선다면, 우리는 가식와 위선의 친절함으로 위장한 채 파티원 모두에게 자기의 권위를 행사하려는 대장놀이를 꿈꾸는 이와 모험을 하고 싶을까? 집단상담을 수련할 때, 이러한 '친절한 상담자'를 자처하는 구성원은 가장 먼저 도전받게 된다. 섬세한 집단리더는 공동체에서 자신이 가장 권위를 획득하고자 하는 이 가스라이터를 빠르게 인식하며 그 문제를 직접 다룬다. 그래야만 집단의 치유적 힘이 작동할 수 있는 까닭이다.
소위 '친절한 상담자'는 상담이 상담일 수 있는 그 근본적 힘을 오히려 훼손하고 파괴한다. 상담자의 품위마저도 함께 몰락하게 된다.
이를테면, 자신을 상담자라고 칭하는 많은 가스라이터들은 저렴한 비용, 나아가 무상으로까지도 자신의 '상담활동'을 계속 시도하려 한다. 내담자로부터 권위를 얻어내는 순간의 그 강도높은 쾌락이 뇌에 새겨져 잊히지 않는 까닭이다. 바로 이러한 이들 때문에 상담의 사회적 위상은 다소 저질스럽고 비전문적이며 일종의 미소팔이 오컬트에 가까운 그 무엇처럼 나날이 격하되어 간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가 가스라이터를 부르고 있다고.
자기가 망상하던 자상한 부모의 모습으로 상담자가 존재하기를 바라며, 그러한 상담자의 모습을 찾아 부르는 이들이 많아 상담자는 또한 '친절한 상담자'의 모습을 덮어쓰게도 된다. 수요가 있으니까 공급이 형성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친절하게 자기를 이끌어주는 동시에, 경우에 따라서는 조금 따끔하게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실은 자신을 더 훌륭하게 성장시키기 위한 교육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끝내 감격스럽게 드러날 그 스승-부모-교사로서의 통합적 상담자상이 마치 소년점프의 왕도만화 플롯처럼 설정된다. 다들 자기가 미디어 속 주인공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정신적 아동들이 많아서 생겨난 현상이다.
이런 아동들이 소망하는 것은 분명 가스라이터다. 권위에 선악의 속성을 부여해, 자기를 행복하게 해줄 선한 권위를 행사하면 스승, 자기를 아프게 하는 나쁜 권위를 행사하면 가스라이터라고 자의적으로 구분하고 있지만 언어놀음일 뿐이다. 어떠한 권위에 자신의 삶을 위탁하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하면서도 분명하게 가스라이팅이다.
고도화된 정보화사회에서는 가스라이터의 출현이 필연적이다. 개인은 방대한 정보 앞에 너무나도 무력한 존재로서 스스로를 경험하며, 이제는 그러한 자신이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단해야 한다는 상황이 지나치게 힘겹다. 그러니 '친절한 권위자'가 대신 그 선택의 임무를 맡아 자신의 삶을 이끌어주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만약 진짜 상담자라면 바로 이러한 상황 자체를 다루게 될 것이다.
게임 속에서 낮은 레벨의 플레이어를 훈육하고 이끌어 그를 성장시키는 이가 상담자가 아니라, 게임세계에서 그가 나오도록 돕는 것이 상담자다. 끝없이 업데이트되는 것 같은 게임을 계속 하고 있으니 자신의 존재가 점점 더 무력하고 무가치하게 경험되는 것이다. 게임 밖으로 나와 거울을 보면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게임 속에서 예쁘장하게 꾸민 아바타와 화려한 장비로 빛나던 가상의 모습에 비하면 일견 초라해보일 수 있다. 보기 싫은 모습이다.
그러나 보기 싫을 정도로 결코 부정할 수 없이 그 자리에 든든하게 서있는 것이 바로 내 자신의 존재다.
나는 무너지지 않는다. 어떤 정보로도, 어떤 가상현실의 사건으로도, 또 그 어느 친절한 권위의 농락 속에서도.
나는 친절한 무엇인가가 있어 내 삶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존재의 당연한 근거율로서만 존재한다. 장미가 장미이듯, 나는 나다.
나를 찾고 싶어하는 이들, 그리고 이제 나로서 살고 싶어하는 이들, 상담은 바로 이러한 이들의 필요로 성립된 전통이다. 나를 향한 모험을 떠나고 있는 이들과 함께 상담자는 길을 나선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그 모험길에.
혼란의 어둠 속에서 우리를 이끌어줄 저 친절한 가스등의 불빛이 우리에게는 정말로 필요한가?
모험을 떠나는 이의 새벽길은 이미 저 태양이 밝히고 있다. 진실의 빛으로 환히.
성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며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는 저 인영은 분명 상담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