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비Bea>
사람은 태어나고 죽는다. 이 법칙을 벗어난 인간은, 적어도 신화나 종교가 아닌 역사의 차원에서는, 없다. 이처럼 탄생-성장-죽음의 당연한 단계를 거쳐야 하는 생물의 한 종에 불과했던 인류는 언젠가부터 특수한 권리를 획득했다. 인권, 혹은 인격이라고도 불리는 이 권리는 아주 긴 시간에 걸쳐 힘겹게 차지한 인류의 포획물일 텐데, 하물며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준 것이라는 겸손을 덧붙이기도 했으니, 인간의 권리는 어떻게든 존중 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 (이렇게 얻은 권리는 누구에게나 동등한 채로 불평등하지만.) 그렇다면 인간의 권리는 언제 주어지고, 완성되는가.
인간의 권리가 주어지는 시기에 대한 고민이 ‘낙태’를 둘러싼 논쟁이라면, 인간의 권리가 완성되는 시기에 대한 고민이 ‘안락사’ 논쟁일 테다. 정치적 논쟁이나 사회적 논의로 쉽게 답을 내리기 힘든 오래된 명제에 뛰어들 때, 인류는 문화와 예술의 힘을 자주 빌린다. 수많은 예술의 방식 중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단연 이야기일 텐데, 그중 어떤 이야기는 작은 무대와 몇몇 인물의 힘을 빌려 그 논쟁 중 하나에 아름다운 주석을 하나 달아놓는다.
연극 <비Bea>를 본다.
죽음의 권리
침대 하나가 있다. 두 사람이 나란히 누우면 가득 찰 만큼 평범한 크기의 침대이지만, 그 침대는 사실상 누군가의 세상 전부다. 스무 살 무렵부터 원인을 모르는 만성 체력 저하 증상을 앓아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 비어트리스, 비Bea(이지혜)의 세상이다. 그녀의 엄마 캐서린(강명주)은 사랑하는 딸을 위해 간병인 레이(김세환)를 고용한다. 엄마와 자신 둘 뿐이던 세상에 레이가 들어오면서 벌어진 틈새를 통해 비는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다른 세상을 목격한 비는 더는 좁은 지금의 세상 속에서만 살아갈 수 없게 되었을 테다. 그녀는 레이에게 부탁한다. ‘엄마에게 줄 편지를 대신 적어줘.’
비는 엄마를 향한 무한한 사랑으로 편지를 시작한다. 즐거운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옮겨 적어주던 레이는 그녀의 본심 앞에서 멈칫하고 만다. 그녀의 세상을 든든히 지켜준 유일한 존재인 사랑하는 엄마에게 비가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나는 이제 죽고 싶다는 것. 그러니 엄마가 나를 죽이고, 자신의 세상을 무너뜨려 달라는 것. 엄마에게 수호자가 아닌 파괴자가 되어주길 부탁하는 비의 마음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잔인한 것이다. 도저히 말로는 할 수 없었고, 그러니 (남의 힘을 빌려서라도) 써야만 했을 테다. 이렇게 쓰인 편지는 부탁이 아닌 단호한 요구이기 때문에 반드시 수신자에게 답장을 받아야 하는 통지서가 된다.
자신을 죽여 달라는 비의 요구는 강력한 존엄성의 주장이다. 자신의 죽음의 시기를 결정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선포하는 행위다. 비의 요구에 대하여 캐서린은 응답해야 한다. 법률가이자 엄마인 캐서린의 답변은 두 갈래다. 하나, 그것은 살인 행위이므로 자신은 그 행위를 결코 수행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은 법과 윤리를 수호할 의무를 가진 변호사로서의 응답이다. 둘,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너를 죽여 달라는 행위는, 엄마인 내게 그보다 끔찍한 일은 없을 것이므로, 나 자신을 위해서 해줄 수 없다는 것. 이것은 엄마인 동시에 존엄을 지닌 한 개인으로서의 응답이다. 죽을 권리와 죽이지 않을 권리. 죽음의 권리를 두고 존엄과 존엄의 아득한 간극이 있다. 이 간극을 줄여가며 두 사람이 마침내 한 침대에 나란히 눕게 되는 지난한 과정을, 이 이야기는 섬세하게 보여준다.
죽음의 전령
비와 캐서린, 존엄과 존엄의 갈등 사이에 레이가 있다. 시종일관 수다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실수를 연발하는 레이는 캐서린이 비를 위해 고용한 전문 간병인이다. 고용인 캐서린은 어설퍼 보이는 레이에 대해 의문을 품지만, 비는 오히려 마음 따뜻한 레이를 마음에 들어 한다. 자폐증을 앓고 있는 누나를 돌봐야 했던 일을 계기로 전문 간병인이 된 레이는 비의 피고용인이자 좋은 친구가 되어 그녀의 세상 속에 진입한다.
비는 레이에게 자신의 죽음을 요구하는 편지를 대필해주길 부탁한다. 레이는 죽음을 원하는 비의 선택에 완전히 동의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편지를 써준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비가 죽음의 뜻을 전달한 전령으로 레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레이가 “마음 맹인”이자, 탄생과 죽음 사이 ‘성장’의 단계에서 존엄을 위해 먼저 분투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레이는 자폐증 환자의 가족으로서 상처를 받으며 성장한(누나와 연관된 어떤 사건으로 소년원에 가기도 했으므로) 그는 자폐 스펙트럼의 정의를 가장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자폐는 스스로의 세상에 갇혀 타인의 세상이 존재함을 보지 못하는 일종의 시력의 부재 상태이며, 자신의 세상이 중심이 되어 타인의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의 ‘마음 맹인’이라는 것. 또한 동성애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성적인) 애정을 구별할 수 없는 자신은 그 맹점의 상태에 가장 가깝다는 것.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비도, 캐서린도 마음의 맹인이다. 서로가 서로를 보지 못하는, 일종의 정신적 암전 상태에서 레이는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는데, 그는 타인의 마음에 진실하기 위하여, 자신의 정체성과 존엄성에 친밀해지기 위하여 수다스럽게 노력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존엄을 위한 분투를 경험했던 레이만이 비가 쳐놓은 “공감의 경계” 안과 밖을 오가는 전령이 될 자격을 얻는 것은 당연하다.
죽음으로써 자유로운
살아갈 의미를 잃었을 때 죽음은 삶보다 더 강한 권리가 된다. 성감을 다시 느끼고 싶다는 비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레이가 비의 이불 속에 머리를 파묻고 있을 때, 캐서린은 비의 마음을 읽는다. 이제 성감마저 느낄 수 없다는 비통함. “비는 이제 끝난 거 같아요.” 비가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최상위이자 최후의 감각마저 잃어버렸음을 확인하게 된 캐서린은 더는 비를 침대 위의 작은 세상에 붙잡고 있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비의 탄생과 성장을 함께 했던 엄마 캐서린은 비의 죽음에까지 책임을 다하며, 결국 비의 모든 인간적 존엄을 완성해준다. 마침내 침대를 벗어난 딸은 환호하며 춤추고, 엄마는 침대에 갇혀 절규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죽음은 사랑, 우정, 섹스, 웃음, 눈물 따위의, 살았을 때 가능한 많은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이 오히려 많은 것들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면, 삶보다 나은 죽음도 반드시 있을 것. 두려운 죽음을 회피하는 일은 살아있는 것들의 본능이지만, 살아있는 채로 죽음에 다가서는 일은 용기다. 인간의 본능에 용기를 더할 때 인간은 인간만의 권리를 온전히 가질 수 있다. 한층 더 나아가서, 그 죽음의 용기를 이해해주는 것이 어떤 세계의 존엄에 대한 최선의 존중이 된다.
생명의 탄생은 의도와 우연이 섞여 완성되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우연의 역할은 거대하다. 인간의 출생이 우연에 빚진 것이라면, 탄생부터 주어지는 어떤 개인의 존엄은 사회적 산물인 동시에 우연의 선물이기도 할 것. 엄마와 딸, 우연을 내밀하게 주고받은 존재들은 삶에서 질기게 엮인다. 연극 <비Bea>는 그러한 우연의 선물을 풀어 제자리로 돌려놓는 이야기다. 인간의 권리는 우연한 탄생의 순간에 부여되고, 확실한 죽음의 순간에 확정된다. 우리는 모든 죽음의 선택에 흔쾌히 동의할 수는 없겠으나, 힘겹게 이해할 수는 있다. 어쨌거나 모든 삶의 결말은 죽음이며, 우리도 날마다 우연에 힘입어 죽어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