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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구마 Jun 02. 2024

유쾌해진 사기극

뮤지컬 <심청날다>

한 소녀가 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낳자마자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한다. 태어난 순간부터 불행한 삶이 예고된 듯 보이는 소녀에게 세상은 예외 없이 가혹한 법칙을 들이민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면 막대한 금전적 대가를 치러야 한다. 순수한 소녀는 경제적 능력이 없는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값을 치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이 잔인한 거래 속에는 더 잔혹한 삶의 진실이 깔려있다. 공양미를 바쳐도 아버지가 눈을 뜬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 ‘값을 지불해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수 있다.’ 결과(output)가 보장되지 않는 투입(input)의 유혹은 투자와 사기의 경계에 있다.  <심청전>의 장르는 음울한 사기극과 맞닿아 있다.


고전이 남긴 유산을 사랑하는 어떤 이들은 이제 차라리 유쾌해야 한다고 외친다. 고전을 존경하는 많은 이가 고전을 사랑받게 만들기 위해 이야기를 각색하고, 경쾌하고 화려한 음악을 입히고, 인물에 새로운 성격을 더하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오래된 교훈을 위한 비극보다 자유분방한 희극을 부여하면서 오늘날의 대중에 다가간다. 창작자가 고전의 해학을 넘어 현대적 유쾌함에 대한 깊은 지향성을 가질 때, 다소 무겁고 어둡고 (현대적 관점에서) 답답했던 고전은 다시 태어난다.


국악 크로스오버 밴드 날다의 퓨전국악 뮤지컬 <심청날다>를 본다.

눈먼 심봉사가 갓난아이를 안아 어르고 달랜다. 품에 안긴 아이의 이름은 심청. 세상 모든 것을 주고 싶을 정도 사랑하지만, 세상을 볼 수 없기에 (‘제육볶음’ 외에는) 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미안한, 그의 소중한 딸이다. 심봉사는 딸의 존재로, 그 존재가 주는 힘으로 살아간다. 심봉사에게 심청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이다. 그렇다면 심청의 입장은 어떠한가. 태어나보니 엄마는 이 세상에 없고, 눈먼 아버지와 단둘이 살아가야 하는 가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세상이 그녀에게 부여했던 운명은 아버지를 극진히 모시는 ‘효녀’가 되는 것. 오래 전 심청이라면 그 운명을 덤덤히 맞으며 슬퍼했겠지만, 현대의 심청은 다르다. 그녀는 세상이 이미 부여해놓은 효녀의 환상을 깨고 가수를 꿈꾸는 평범한 소녀가 되기를 원한다.



비록 인물의 개성을 약간 비틀지만 밴드 날다의 <심청날다>가 비행하는(이 표현은 그들이 들려주는 훌륭한 음악의 방향성과 정확히 일치한다) 방향은 고전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심봉사를 위해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지고, 죽은 줄 알았던 심청이 황후가 되어 돌아오고, 심청을 만난 심봉사는 눈을 뜬다. 극의 서사에는 환상적 결말에 이르기 전의 비극적 과정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관객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어떠한 불안과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 공연을 이끄는 배우의 익살로, 훌륭한 밴드의 흥겨운 음악과 소리꾼들의 압도적인 가창으로, 그러니까 다만 유쾌함으로 공연장을 가득 채운다. 공연 내내 아이들이 고래고래 웃으며 떠든다. 어른은 그런 아이들을 보며 다시 웃는다. <심청날다>에는 울음이 없다. 웃음과 박수와 환호만 있다.


결말을 모른 채 과정을 불안해하는 일들이 있다. 결말이 과정을 배신할까 긍긍하는 순간에, 예컨대 판소리 <심청전>을 들으며 가슴 졸이고 눈물 훔쳤던 그 옛날 저잣거리 마당에는 숭고한 비극미가 있었을 테다. 반대로 결말과 상관없이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순간이 있다. 그곳에는 시원한 웃음과 만족이 있다. 국악 크로스오버 밴드 날다의 소리가 들려주는 현대판  <심청전>의 80분이 그렇다. 유쾌함으로 재무장한 현대의 사기극을 만날 때 우리는 기꺼이 속아 넘어가며 웃는다.



p.s. 좋은 공연을 사회에 선물하는 일은 널리 찬양 받아 마땅하다. 메트라이프생명 사회공헌재단과 한국메세나협회에서 주최/주관하는 공연 <심청날다>는 그야말로 ‘The gift’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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