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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Oct 15. 2019

3년 반 만에 한국에 갔다.

Photo by Silas Köhler on Unsplash



1년은 대학교 졸업을 하느라, 또 1년은 취업을 하느라, 또 1년 반은 입사하고 적응하느라 바빠서... 무엇보다 공황 장애 약을 끊은 후로 비행기를 탄 적이 없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한국 가는 걸 미룬 게 3년 반이 넘었다. 올해엔 도저히 미룰 수 없겠다 싶어 이번 연도 초에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일단 티켓을 미리 끊어 놓으면 어떻게든 가지겠지 하는 마음에서였다. 비행기 예약을 한 2월부터 출국 날인 8월 말까지 불안했다가 편안했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바뀌었다. 오랜만에 탄 비행기는 좌석이 더 좋아져 있었다. 평소 먹는 약 중 가장 강한 수면제를 8시간에 한 번씩 총 두 번 먹고 약기운에 취해 몽롱한 상태로 한국에 도착했다. 시간이 어떻게 흐른 건지 모르겠다. 다만 착륙에 가까워져 오며 인천 근처 섬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가슴이 설레고 벅차올랐다. 다시 비행기를 탔다는 기쁨과 다시 한국을 오다니 하는 안도감이랄까.


오랜만에 만난 아빠는 아무 말 없이 한 손으로 날 꼭 안았다. 혼자 외국에 오래 살면서 내 뿌리와 단절된 느낌을 많이 받았었다. 나는 어디서 툭 떨어진 것 같은. 호들갑 떨지 않고 감정을 누른 채 날 맞이해주는 가족들을 보자 '아 나에게도 가족이 있었지. 나와 닮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 들어 잠시 울컥했다. 위염으로 한 달여를 제대로 먹지 못해서 그런지 부모님은 날 보고 충격을 받으셨다. 몇 년 만에 체중계에 올라가 보니 난 전혀 몰랐는데 살이 좀 많이 빠져있긴 했다. 집에 오자마자 저녁으로 뼈다귀 해장국을 먹었다. 오래간만에 엄마가 해 준 반찬에 밥을 먹으니 평소보다 음식이 많이 들어갔다. 물론 다음 날 길에서 전부 토해내긴 했지만. 그 후로도 한국에서 지내는 한 달 내내 부모님은 나를 먹이겠다며 이것저것 음식을 사 먹이고, 해 먹였다. 덕분에 출국할 때쯤엔 3-4kg나 몸무게가 늘었다. 매일같이 친 골프 덕에 근육도 붙어 근 몇 년간 몸상태가 제일 좋았다.


한국에 들어오기 전까지 원수 같던 오빠와는 시간을 가장 많이 보냈다. 예상 밖이었다. 10대 시절 전부를 해외에서 보낸 오빠는 가족들과 교류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방학에 잠깐 들어올 때에도 여느 유학생들처럼 친구들을 만나러 다니기 바빴고, 가족들과는 데면데면했다. 이번 한 달 동안 같이 매일 운동을 하고 쇼핑도 다니며 평생 오빠를 봐 온 것보다 오빠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 것 같다. 얘기를 하다 보니 얘도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느냐만, 그래도 우린 서로를 가여워했다.


미국에서 하도 오랫동안 정적인 삶을 살아서인지 오랜만에 간 한국은 정신이 없었다. 그나마 가장 조용한 집에서도 십몇년만에 처음으로 한가운데 모인 가족들은 최대한 같이 시간을 많이 보내려 노력했다. 할 말도 많았고 먹을 음식도 많았다. 같이 할 일도 많았다. 매일매일 스케줄이 있었다. 딱 하루 집에 혼자 있을 날이 있었는데 굉장히 공허했다. 불안하기도 했고. 이렇게 사람들과 부대끼다가 아무도 없는 자취방에 가면 너무 외롭지 않을까 잠시 걱정했다. 다행히 내 기우에 그쳤지만 아직도 그 감정이 생각난다. 엄마, 아빠, 오빠 모두 출근을 하고 나는 거실에 누워있었는데 따뜻한 가을 햇살이 창문을 지나 내 다리를 비췄다. 가을바람이 차가워서인지 문득 쓸쓸해졌다. 아무도 없는 집은 불편하리만큼 조용했고 난 그 정적을 이기지 못하고 티비를 틀었다. 생각해 보면 한국에 있을 때는 항상 이렇게 지냈는데. 학교가 끝나고도, 주말에도, 항상 집에는 나 혼자였다. 고작 몇 주간 가족들 사이에 껴있었던 것뿐인데 어느새 그 행복한 소음에 익숙해졌나 보다.


하루는 가장 친했던 친구네 집에 가 계획에 없던 외박을 하고 왔다. 거실에 이불을 깔고 친구 둘째 아들, 친구, 나, 그리고 친구의 첫째 딸 이렇게 넷이 졸졸이 누웠다. 애들을 먼저 재워 놓고 과자 한 봉지를 꺼내와 최신 영화를 틀었다. 애들이 깰까 볼륨을 2로 낮춰놓고서. 스물한 살 이후로는 둘이 같이 한 첫 외박이라 밤을 그저 흘려보내기 아까웠다. 오랜만에 보는 영화에 한창 집중한 친구에 입에 과자를 넣어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다 보니 2시간 11분이 훌쩍 지났다. 영화가 끝나고 나니 밖은 깜깜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이의 얼굴도 보일락 말락 했다. 등을 돌려 자고 있는 친구 딸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봤을 땐 한 팔로 안을 수 있을 만큼 작았는데 이젠 다 커서 재잘재잘 대는 게 내가 진짜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다는 게 새삼 와 닿았다. 그리고 문득 이 순간이 꿈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 옆에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 둘이 누워있으니 잠이 올 턱이 없었다. 그렇게 아이를 토닥이며, 머리를 하염없이 쓰다듬으며 한참 동안 홀로 깨 있었다.


친구네 집에서 잔 것만큼 행복했던 때는 목욕탕에 갔을 때다. 애당초 2주만 지내기로 한 여정이 갑자기 한 달로 늘어나면서 시간이 많아진 나는 뭘 할까 하다가 미루던 목욕탕을 가기로 했다. 그 맘쯤 공기도 차가워졌다. 오후의 따뜻한 햇살을 만끽하며 학생 때부터 다니던 단골 목욕탕으로 향했다. 내부엔 평일 오후라 그런지 사람이 많이 없고 조용했다. 이가 시릴 만큼 차가운 홍초를 마시며 뜨거운 탕 안에 늘어지게 앉아있으니 지난 몇 년동안 혼자 타지에서 개고생 한 시간들이 모두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물론 4주가 지나자 가족들과 어김없이 말다툼이 시작됐다. 이제 부모님이 내 눈치를 많이 보기도 하고 오빠가 나의 트러블 메이커 역할을 맡아서 집 안엔 불쾌한 텐션이 이미 내가 왔을 때부터 기저에 깔려있었다. 그 긴장감이 나를 가장 힘들게 했다. 가족 모두가 예민함의 끝에 있어서 집 안은 항상 살얼음판을 걷는 듯 아슬아슬하기만 했다. 그때쯤부터 얼른 출국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가족들도, 친구들도 오랜만에 만난 나에게 위화감이 들만큼 잘해줬다. 다들 내 눈치를 보느라 내가 더 불편할 정도였다. 물론 이런 관심이 처음이라 한동안은 나도 그 속에 빠져 살았음은 인정한다. 하지만 내가 오래 지낼수록 편해져서인지 말투는 거칠어지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시작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거리를 둬야 한다는 내 믿음이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출국을 했고,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누군가에겐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떠나버렸으니 더 악화될 일은 없다.) 다시 돌아온 이 곳은 한 번도 떠나지 않은 것처럼 편안했다. 모든 게 제자리에 있었고 나는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온 것처럼 다시 바쁘게 회사를 다니고 있다. 얼른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돌아온 지 고작 10일이 지났을 뿐인데 한국에 다녀온 일이 어느새 꿈처럼 아득하다.


나에게 한국은 추억이다. 그곳에 놓고 온 것이 많다. 사랑하는 사람들도, 감정도, 또 트라우마도. 잊고 싶은 것들과 잊고 싶지 않은 것들이 한데 모여 돌아가는 게 망설여지게 만든다. 그래도 사람들은 내가 얼른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난 나를 위해서 돌아가고 싶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돌아가고 싶지 않다. 언젠가 내가 이 모든 게 견디기 힘들어질 때쯤 (그때가 온다면) 그때는 나의 선택으로 미련 없이 돌아갈 것이다. 아직은 여기서 할 일이 많다.


"이번에 가면 언제 돌아와?"

"기약이 없어. 그러니까 지금 많이 봐 둬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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