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국어에 별 흥미가 없었다. 받아쓰기도 잘하지 못하였고, 특히 수업 중에 소리 내어 읽는 것은 아주 따분해했다. 중고등학교 때 영어, 수학은 과외도 받으면서 나름 집중했지만 국어는 등한시하였다. 우리말 문법은 어렵고 성적도 좋지 않아 단지 문학적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대학에서도 1학년 때 교양 국어가 필수였는데, 필요성조차 이해하지 못했었다. 국어는 학창 시절에 불필요했고 부담스러웠다.
이공계 공돌이란 핑계로 인문학, 글쓰기는 나와 관계가 멀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직장생활 초기에 유일한 글쓰기인 보고서도 기본 형식에 맞추어 작성하고 보고받는 사람의 요구를 맞추는 눈치로 대응하였다. 비문학이지만 업무에 필요한 책은 조금 읽었다. 그런 책도 전체 구성이나 표현까지 세밀히 살피기보다는 내가 필요한 키워드만 뽑아 보는 형태였다. 직장생활 연수가 많아지면서 보고서조차도 내가 작성하지 않고 빨간펜 역할만 하였다. 주로 말로 듣고 의견을 주고 의사 결정을 명확히 하는 정도로 만족하였다. 직원들이 손과 발이 빠르고 표현력이나 정리하는 수준이 나보다 낫다는 생각이 점점 들었다. 나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아예 문서 작업은 손을 놓았다.
2000년대 초 회사에 인문학 열풍이 불었다. 회사에서는 직책자 대상으로 인문학 강의를 매주 수요일 근무 전 한 시간 반 진행하였다. 엄선한 최고의 강사가 직장인을 대상으로 이미 여러 곳에서 검증된 내용을 핵심만 아주 쉽고 재미있는 전하는 한 편의 드라마였었다. 아침 시간 동서양 고전 인문학의 새로운 세상을 나는 만났었다. 셰익스피어 베네치아 상인은 당시 영국이라는 배경과 유대인의 삶을 설명을 한 후,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까지 요약하여 전달하였다. 당시에 관심도 생겼고 좀 더 깊이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만 가졌었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는 2010년대에는 창조의 아이콘 스티브잡스의 “소크라테스와 점심을 함께할 수 있다면 애플이 가진 모든 기술과 바꾸겠다.” 말로 인문학의 중요성이 더 주목받았다. 나는 인문에 재능이 부족하여 창의성과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열등감이 들었다. 마음과 생각은 원하지만, 몸과 능력이 늘 따라 주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작은 글씨는 잘 보이도 않고, 문학 특히 소설은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거의 읽지 않았고 산문이나 시도 내용이 복잡하면 은유나 비유 표현도 이해하지 못하고 기존 생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올해 퇴직 후에는 그동안 의욕적으로 쌓아 두기만 한 읽지 않은 책들도 다 버렸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아쉬움과 욕심도 버리고 나니 가벼운 마음으로 내 수준에 맞게 즐기자는 생각이 들었다. 흑역사도 되돌아보면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문사 주관 글쓰기 상을 받았던 그리고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에 한국 소설 유정, 무정, 탁류, 상록수 등 읽었던 오래된 희미한 기억도 떠 올랐다.
글을 쓴 후 한두 달 정도 지난 후 다시 보면 여전히 부족하지만 내가 쓴 글도 새롭게 읽히고 작고 뿌듯한 마음도 가끔 든다. 일상에서 접하는 사물, 사건 등을 글로 남기면 좋을 것 같다는 자발심도 생기고, 작가들은 글로 어떻게 전개하고 표현했는지 관심도 생겼다.
학창 시절 그때 낙서한 교과서와 공책이 있으면 다시 훑어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최근에 EBS의 평생학교에서 ‘나의 두 번째 교과서’ 방송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았다. 국어 편에는 읽기, 독서, 소설, 시, 글쓰기 등에 대해 성인 대상 기초 강의였었다. 그 동안 못 깨우치고 잊고 있었던 필요, 관점, 관심, 가치 등에 대해 문학 작품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학창시절, 직장생활 다 보내고, 나는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나의 글공부를 지속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 중이다. 우선 일상에서 접하는 영역에 다른 생각도 해보고 글로 남기고 용기를 내어 공유도 시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