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발레를 시작하다.
발레는 내 논문 학기를 버티게 해 주었던 취미다. 일 년 정도를 배웠고, 그 후 일 년 정도를 쉬었다. 쉴 때도 많이 아쉬웠다. 쉬었던 이유는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아마 화실 운영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그 후 필라테스, 요가를 깔작 댔는데 발레를 할 때만큼의 에너지와 즐거움은 얻지 못했다. 특히 필라테스는 나에게 맞지 않는 운동이었다. 필라테스에서는 동작을 하는 내내 지루했다.
여하튼, 발레를 다시 시작하기까지는 고민이 많았다. 내가 지금 취미 활동을 할 수 있는 처지인가 싶어서. 여러 이유들이 있지만 ‘취미를 시작할만한 여유가 있는가’가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발레를 시작하지 않아도 일은 하겠지만 ‘발레에 시간을 투자했을 때 나는 얼마나 일에 집중할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취미활동을 함으로써 나의 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를.
이전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일주일에 두 번 발레를 다녔을 때, 나는 논문을 견딜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시기라 발레가 없으면 어떻게 견뎠을까 싶다. 발레를 다녀온 저녁은 항상 에너지가 넘쳤다. 그리고 발레 동작이 조금씩 늘 때마다 쾌감을 느꼈다. 팔을 움직일 때는 미세하게 등근육을 쓰고, 다리 동작을 할 때는 엉덩이와 복부 근육을 사용하면서 나름 정리가 되어가는 나의 몸상태도 마음에 들었다(물론 프로필 사진을 찍을 만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논문에서 해방된 채로 오롯이 몸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게 너무나 좋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발레를 시작하기로 했다. 모든 일이 안 풀리는 것 같은 요즘,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릴 구멍이 필요했다. 하루 종일 멍하게 땅굴을 파느니 환기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집 근처 발레 학원에 상담을 받고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오늘 바로 수업을 들을 수 있냐고 물었다.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정말 정말 오랜만에 발레 옷들을 챙겨서 학원으로 갔다. 겨울이 다 되어가는 요즘이라 발레를 가는 길은 어두웠지만 경쾌한 발걸음으로 거리를 걸었다.
수업은 낯설고 버거웠다. 새로운 발레 학원에서 새로운 선생님과 하는 수업 때문이라기보다는 발레 동작들이 너무 낯설었다. 분명 듣고 배웠던 용어와 동작들인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앙드당, 앙네르, 크로아제, 에파세 등 단어들이 너무나 생소하게 다가왔다. 나는 결국 거울에 비친 다른 수강생을 보며 동작을 따라가기에 바빴다. 다른 수강생을 보며 따라 했기에 내 모습은 거의 확인하지 못했다. 아마 엉망진창이었으리라.
하지만 즐거웠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수업이 지나갔다. 엉망진창의 몸짓이었을지라도 슬쩍 흐르는 땀이 열심히 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어주었다. 비록 거울 속에 비친 내 몸짓이 하찮게 보여도 괜찮다. 발레를 우아하게 잘하고 싶다는 욕심보다는 내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겐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작업을 하면서 매번 완벽하고 싶어서 애쓰기 때문에 다른 것들에서는 그러고 싶지 않다.
못 해도 괜찮다.
어차피 나는 발레리나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