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미 4시간전

매일 소개팅했던 여자

불운을 겨루던 시절을 지나 마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12월이었다. 서른한두 살 때였나. 성당 봉사활동으로 언니, 동생 하며

친해진 여자 세 명이 연말 분위기를 내고자 캐주얼한 레스토랑을 찾았다.

이야기는 연애와 결혼으로 흘러갔고 급기야 소개팅 배틀로 과열됐다.

'누가 얼마나 이상한 사람과 소개팅을 했나.'가 배틀의 주제였다.


 첫 번째 도전자! 주머니를 너무 사랑한 남자.

 - 커피를 시키고 기다리는데 카고바지에 낚시 조끼를 입은 수리공 복장의 남자가 다가오는 거야.

  내 자리에 전구가 나갔나? 두리번거리는데 소개팅 남인 거 있지?

- 에이 그 정도는 머 괜찮지 않아?

- 거기서 끝이 아니야. 가방은 없고 주머니에서 계속 뭐가 나오는 거야.

  마지막엔 큼지막한 노트를 바지에서 꺼냈다니까! 친구들이 주머니 없는 옷 좀 입어보자며

 옷가게에 데리고 갔는데 주머니가 없는 옷은 도저히 입을 수가 없었대.


십 년이 훌쩍 지나 생각해 보니 이 남자, 이상하기보다 재미있다. 낚시 조끼를 입고 소개팅에 온 남자.

주머니가 있어야 안정되고 필요한 건 주머니에 모두 수납하는. 도라에몽 같은 남자.


두 번째 도전자! 는 나의 소개팅남이었다.

이상하다기 보다 그 나이엔 좀처럼 어필하기 어려운

‘정자기증' 이슈를 자랑했던 남자.

대학원에 다니는데 여자 교수님이 결혼은 싫고 아이만 같고 싶은데 너의 정자라면 신뢰할 수 있겠다며

기증을 의뢰했다는 이야기를 첫 만남에서 하니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의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에 이끌려 두어 번 더 만났다. 세 번째 만남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택시 안. 라디오에서 새해를 알리는 카운트 다운을 듣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아 이제 소개팅 쉬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꼭 연애를 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안되면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인터뷰하고 맛있는 거 먹는 거지 뭐.

박애주의자 같은 마음으로 들어오는 소개팅을 일처럼 해내던 시기가 있었다.

"결혼하라"는 잔소리에 부응하려고 기회 닿는대로

소개팅을 했었다. 정자기증남을 끝으로 내 소개팅은 장기 휴식에 들어갔지만 어렵사리 ‘크리스마스배 소개팅남 배틀’에 참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승리는 내 것이 아니었다.


세 번째 도전자! 병력을 어필하던 남자.

 친구는 소개팅남이 입을 열기 전엔 완벽했다고 한다. 미슐렝에 빛나는 셰프레스토랑에 멀쩡한 허우대.

경력도 직업도 스마트했다. 단 한 가지 그가 힘들었던 몇 주를 강조했는데 멈추라고 신호를 줘도

그 병이 얼마나 아팠는지 어떻게 극복했는지 너무 상세히, 크게 설명하는 바람에 자리를 뜨고 싶었다고.

그 병은 요로결석이었다. 옆 테이블이 들을세라 설명하는 내내 우리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다.

영광의 우승은 요로결석남에게 돌아갔다.


한참을 웃고 떠들다 우리는 허무해졌다. 누구를 위한 승부였던가. 우리는 과연 짝을 만날 수나 있을까.

결혼은 할 수 있을까? 아니, 하고 싶긴 한 건가. 씁쓸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아니 왜 남자친구 없다고 우리가 풀이 죽어야 하나 읏샤읏샤 하고 헤어졌던 기억이 추억으로 남았다.




 영화 <노팅 힐>에는 친구들이 모여 생일파티를 하던 중 한 조각 남은 브라우니를 놓고

서로 자기가 먹겠다며 다투는 장면이 있다.

마지막 브라우니는 가장 안쓰러운 사람의 몫으로 하자며 각자의 불운을 겨룬다.

재방송을 자주 해주는 이 영화를 우연히 볼 때마다 내 마음은 다른 로맨틱한 신(scene)보다 '

이 장면에서 유독 녹진해진다.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으면서

질병이나 가난, 이혼 같은 서로의 처지를 이야기하고 스스로를 농담의 소재로 삼는다.

근사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에게도 힘든 일은 벌어진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수긍한다.  

여전히 진행 중인 각자 삶의 문제들을 끌어안고 모인 저녁이지만

곁에 친구들, 좋은 대화, 달콤한 브라우니가 있다.


   - 황선우,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 중에서




 마흔을 자축하며 다시 한번 모인 생일파티. 연애보다 사는 고민이 늘었지만

아리랑 고개 넘듯 힘들었던 고비를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는 굳은살이 생겼다.

 "마흔이 되면 어떤 기분일까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덤덤해. 언니들은 어때?"

- 글쎄...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아. 몸이 힘들어진 것 말고는 생각하는 건 비슷해.

- 불혹이 유혹에 흔들려서가 아니라 유혹에 부흥할 체력이 없는 거 아닐까?


 결혼을 제일 늦게 할 것 같았던 나는 서른 중반 다시 한번 본 소개팅으로 남편을 만났고,

체력의 중요성을 느낀 언니는 남자보다 더 중요한 인생 운동을 만나 예전보다 더 활기 있어 보였고,

 마흔의 생일 주인공은 마라톤 크루가 아닌 클럽(크루보다 연령대가 높다고 한다)에 가입해

하프 마라톤을 참가하면서 인생의 과정과도 같았던 소회를 나눴다.  

우정 어린 생각들에 넘쳐흐르고 '나는 왜 안 될까' 하는 생각보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는 모습이 반짝였다.  

성취한 작은 일들을 나누는 친구들을 보니  크리스마스가 금세 올 것만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독의 짝꿍을 찾아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