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sson In Storytelling #7
※ 영화 <기생충>(2019), <살인의 추억>(2003), <마더>(2009), <설국열차>(2013), <빈폴>(2019)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이토록 평범한 이들의 걷잡을 수 없는 좌충우돌을 그리고 있기에, 광대가 없음에도 희극이, 악인이 없음에도 비극이 한데 마구 뒤엉켜 계단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선인도 악인도 없는 희비극. 역사적인 영화로 기억될 <기생충>에 대해 봉준호 감독 자신은 위와 같이 명쾌하게 요약합니다. 실제로 <기생충>에 등장하는 10명의 주요 인물들은 절대적인 선인이나 악인이 아닙니다. 이런 설정을 위해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의 각본을 극도로 정교하게 설계하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어떻게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는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설계된 것인지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절대적 선인이나 악인을 만들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제가 길을 걷다가, 괜히 그래도 될 것 같아서 빵을 훔쳤습니다. 그러면 저는 나쁜 놈이죠. 그런데 만약 누나와 일곱 명의 조카가 굶고 있는데 저는 동전 한 푼 없어요. 이때 빵을 훔치면 저는 여전히 나쁜 놈이긴 하지만, 아까보다는 덜(?) 나쁜 놈이라고 할 수 있겠죠. 비록 사회의 룰을 어겼지만 그건 개인의 만족이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행동이었으니까요.
숨 쉴 구멍을 만들어 주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인상을 전달하는 것. 행동의 이유(Excuse)를 만드는 것. 이것이 절대적인 선인이나 악인을 만들지 않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것을 익스큐즈라고 부른다면, 봉준호 감독은 익스큐즈 만들기의 달인이고, <기생충>은 익스큐즈가 구축되고 서로 잘 맞물려 돌아가는 섬세하고 거대한 기계처럼 보입니다.
영화가 시작하면 기우의 친구 민혁이 기우의 집에 찾아옵니다. 그리고 뜬금없이 수석을 전하죠. 수석을 보고는 기우가 말합니다. "이거 되게 상징적인 거네." 아무 이유도 없이 기우는 수석이 상징적이라고 말합니다.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 걸까요.
봉준호 감독은 기우가 수석을 보고 상징적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관객들도 수석이 상징적이라고 생각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수석은 미심쩍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기우가 수석을 상징적인 무엇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수석은 마치 이후에 벌어질 모든 비극을 불러들이는 것처럼, 기우가 그 비극의 문을 처음 열 수 있도록 돕는 것처럼 보입니다.
폭우가 내려 기우의 집이 물에 잠긴 비극적인 날, 수석은 물속에서 기우에게로 떠오릅니다. 기우는 수석이 자기한테 들러붙는다고 말하죠. 수석은 자꾸 기우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석은 그 자체의 미스터리함으로 비극에 대한 혐의를 기우와 조금이나마 나눠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익스큐즈입니다. 기우가 절대적인 악인이 되지 않도록 만드는 익스큐즈이죠.
다른 익스큐즈들도 있습니다. 기우네 가족의 계략으로 가정부 문광은 쫓겨나게 되는데, 이때 문광은 선량한 피해자로 남는 것이 아니라 그 또한 기우네 가족과 똑같이 기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마냥 피해자는 아닌 위치에 서게 됩니다.
또한 지하실에 살고 있던 문광의 남편, 근세의 말을 들어보면 대만카스테라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했다가 사채까지 썼다는 식의 설정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극 중 송강호가 연기했던 기택도 대만카스테라 사업을 했다가 망해서 지금 이 집에 기생하려고 빨대를 꽂은 거거든요. 그러니까 봉준호 감독은 '대만카스테라'라는 소재를 '평범한 소시민이 건드렸다가 경제적, 사회적으로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망한 사례'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기택과 근세가 동익의 집에 기생하게 된 이유가 도박이나 알코올 중독, 혹은 그들이 단지 악한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경제적 실패 이후 사회에서 두 번째 기회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기생하게 된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어요. 기택과 근세를 절대적인 악인의 수렁에 빠지지 않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이선균이 연기하는 동익의 선 타령 역시 익스큐즈입니다. 동익은 선을 넘는 행동을 무척 싫어하는 인물입니다. 기택에 대해서는 선을 넘을락 말락 하지만 절대 선을 넘지는 않는다고 평가하죠. 그런데 기택의 냄새는 다릅니다. 냄새는 기택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선을 넘습니다. 이때 냄새는 기택이 살아온 가난한 역사입니다. 씻어도 씻어도 없어지지 않는 그의 본질이에요. 봉준호 감독은 기택의 악한 의지가 아니라, 자의적으로 통제가 불가능한 냄새라는 것을 통해 동익의 심기를 건드리도록 설정해 놓았습니다.
기택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가만히 있었는데 괜히 동익이 자신을 혐오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동익에게 냄새는 그저 악취이고 피하고 싶은 것, 시도 때도 없이 선을 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익의 입장에서는 기택을 혐오한 것이 아니라 단지 냄새를 혐오한 것뿐이고, 기택의 입장에서는 동익이 냄새를 혐오한 것이 곧 자기 자신을 혐오한 것이 됩니다.
봉준호 감독은 우리가 숨을 쉬는 한 냄새를 맡지 않을 수 없다는 점, 우리는 언제나 타인의 냄새를 맡는다는 점, 그리고 냄새라는 것이 타인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으면서 아무런 근거 없이 타인을 혐오할 계기가 되기도 한다는 점, 그러면서도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우리 스스로에게는 씻을 수 없는 인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동익과 기택, 두 인물이 빚어내는 비극의 이유로서, 두 사람의 행동에 대한 익스큐즈로서 절묘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각본에서 빛이 나는군요.
그리고 마침내 벌어지는 마지막 기택의 살인은 차곡차곡 모아 왔던 익스큐즈들이 폭발하는 사건입니다. 폭우로 미세먼지가 없어졌다며 좋아하는 연교와 폭우가 내려도 물 한 방울 새지 않는 고급 텐트를 가진 동익의 아들 다송, 반대로 폭우에 침수당한 기택의 반지하 집. 기택에게 지하철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동익, 그 말을 자식들과 함께 듣는 기택. 자식 앞에서 부부관계를 하는 동익과 연교, 반대로 아내 충숙에게 대놓고 무시당하는 기택. 기택과 같은 사업을 했다가 망한 근세, 그런 근세의 냄새를 맡고 얼굴을 찌푸리며 코를 막는 동익. 기택의 살인은 분명 우발적이었으나 봉준호 감독은 기택의 살인에 대한 익스큐즈를 치밀하게 하나씩 쌓아 올립니다.
한편, 봉준호 감독은 절대적 선인을 만들지 않기 위한 익스큐즈도 만듭니다. 머리를 다친 기우를 업고 가는 인물은 다혜인데, 다혜가 절대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기우를 챙기는 것은 아닙니다. 다혜와 기우의 은밀한 관계를 만든 것은 이 때문입니다. 다혜가 기우를 도와야만 하는 감정적 근거를 만들어 준 것이죠.
또한 충숙은 '부자인데 착하다'는 말을 듣고는 '부자라서 착하다'라고 대꾸하는데, 이는 착하다는 속성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돈에서 나온다는, 그러니까 절대적 선인이란 없고 경제적 상황과 위치에 따라 선과 악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각본의 장치입니다. 선인은 없다는 익스큐즈인 셈이죠. 결국 <기생충>의 인물들은 선인도 악인도 아니고, 그저 각자의 입장에서 각자의 성격대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각자의 입장에서 이기적이었던 움직임들이 점점 그들을 비극으로 이끌게 됩니다.
봉준호 감독은 악인으로 가는 길목을 모두 차단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악인이 아니라면 이미 발생한 비극의 책임은 누가 지게 될까요?
땅에서 자란 나무가 썩었습니다. 나무가 잘못되었든지 땅이 잘못된 것이지요. 만약 나무에 특별한 잘못이 없다면 나무가 자란 토양과 환경에 잘못이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악인으로 가는 샛길을 모두 막아놓고 봉준호 감독이 책임의 화살을 조준하고 있는 빈 과녁. 시스템입니다. 모든 사람이 절대적인 악인의 혐의에서 벗어나면 그 혐의를 지는 것은 그 사람들을 둘러싼 환경, 사회, 문화일 것입니다. 봉준호는 비극의 책임에 대한 화살을 우리가 당연한 듯 여기고 있는 시스템에 겨냥하고 있습니다.
단지 <기생충>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봉준호는 선인도 악인도 없는 비극을 설정해놓고 그런 비극의 용의자로 시스템을 지목하는 식의 이야기를 꾸준히 만들어 온 감독입니다. 그의 대표작 <살인의 추억>은 장르적으로 형사물입니다. 장르 문법으로 보자면 클라이맥스에서는 반드시 범인을 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범인을 잡지 못합니다. 진범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스템이에요. 물론 연쇄살인범은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은 연쇄살인범 너머, 정말로 모든 비극을 초래한 것은 당대 한국 사회의 뒤틀린 공기와 부조리한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다음 작 <마더>에서도 그렇습니다. 노골적으로 김혜자를 캐스팅해 전통적 어머니의 상을 깨부숩니다. 우리의 문화적 관념 안에서는, 어머니는 반드시 피해자이고 어머니의 사랑은 지고지순하며 순결하고 아름답습니다. 전통적 어머니의 상은 절대적 선인과 매우 가깝게 위치해 있어요. 그런데 그런 어머니가 살인을 합니다. <마더>는 어머니라는 문화적 고정관념을 악인의 위치로 크게 추락시켜, 어머니에 대한 선인과 악인의 밸런스를 재조정하려는, 혹은 그 재조정의 과정에 장르적 쾌감을 더해보려는 봉준호의 야심이 담겨있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혜자는 살인을 했음에도 용의자로 체포되지 않습니다. 대신 애꿎은 사람이 체포됩니다. 그는 영락없는 사회적 약자. 혜자는 오열하며 그에게 묻습니다. "엄마 없어?" 이때 '엄마'는 한 사람의 누명을 벗겨내기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어떤 동력입니다. 보호막이죠. 그런데 그는 엄마가 없습니다. 시스템에서 낙오된 인물이에요. 봉준호 감독은 '엄마'라는 이미지를 둘러싸고 한바탕 비극을 만들어낸 뒤, 그 비극의 책임을 사실은 아무 책임이 없는, 그러나 그 책임을 거부할 힘이 없는 약자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이때 약자에게 모든 책임을 씌우는 주체는 역시나 시스템입니다.
<설국열차>는 너무나 명백하게 시스템을 겨냥하는 영화죠. 꼬리 칸에 있는 사람들은 혁명을 일으키고 머리 칸을 사수하기 위해 기차의 앞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꼬리 칸의 수장 길리엄과 머리 칸의 수장 윌포드는 공생관계였군요. 기차 안에서 가장 중요한 건 머리 칸으로 가는 것도, 꼬리 칸에 남지 않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기차 내부의 폐쇄된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었죠.
결국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선인과 악인은 기차라는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돌아가는 톱니바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때 선인과 악인의 타이틀은 지워집니다. 그리고 봉준호는 기차의 앞(악인)과 뒤(선인)에만 매몰되어 있던 관객에게 다른 방향, '옆'을 제시합니다. 진짜 문제는 기차 자체, 시스템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봉준호의 모든 영화에서, 선인도 악인도 없는 희비극 속 진짜 악인은 언제나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이렇게 만들면 언뜻 너무 수고로운 것처럼 보입니다. 선인이 아니라면 왜인지, 악인이 아니라면 왜 그러한지 모든 인물의 전사와 익스큐즈를 만들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비극은 반드시 일어나서 관객으로 하여금 진짜 범인은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하니까요. 봉준호 감독은 왜 굳이 이렇게 어렵게 이야기를 만드는 것일까요. 그가 '악인이 없는 희비극'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을 겪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예를 들면 이런 상황이 있습니다. 전쟁이 막 끝난 도시에 한 여인, 일명 '키다리(Bean Pole)'가 살고 있습니다. 그는 친구의 어린 아들을 대신 키워주고 있습니다. 이제 막 3~4살 정도 된 것 같아요. 친구는 아직 군대에 복무하고 있습니다. 키다리도 한때는 군인으로서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뇌진탕으로 의병 제대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그런데 뇌진탕 때문일까요. 키다리는 종종 간질을 일으킵니다. 아이와 놀아주던 순간이었어요. 아이를 안고 있던 키다리에게 간질이 일어납니다. 그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어린아이는 키다리의 품 안에서 숨을 잘 쉬지 못합니다. 결국 아이는 질식사하고, 친구는 제대하여 키다리에게 찾아옵니다. "내 아들은 어딨어?"
키다리는 친구에게 솔직하게 말합니다. 아이는 죽었어. 친구는 속상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키다리가 간질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거든요. 대신 친구는 그에게 한 가지 요구를 합니다. "나는 아이가 없으면 안 돼. 아이를 대신 낳아줘." 친구는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고자 많은 남성 군인들과 성관계를 맺었습니다. 수많은 낙태가 뒤따랐고 결국 불임의 몸이 되어버렸어요. 친구의 아이를 낳아줄 사람은 키다리밖에 없어 보입니다. 이제 이들에겐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위의 내용은 러시아의 감독, 칸테미르 발라고프의 영화 <빈폴(Bean Pole)>의 중반까지의 줄거리입니다. <빈폴>은 <기생충>처럼, 절대적인 악인을 호출하지 않으면서도 잔혹하고 냉정한 비극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인물들의 익스큐즈를 효과적으로 만들어 놓았고, 그래서 각 인물의 입장을 깊이 생각해보게 되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역시나 <기생충>과 마찬가지로 <빈폴>은 외부의 시스템에 총구를 들이댑니다. <빈폴>의 총구가 향하는 곳은 바로 전쟁이죠.
키다리와 친구 중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가요? 아들을 죽였으니 키다리가 가해자이긴 하군요. 그런데 간질은 그가 통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전쟁을 통해 얻은 병이니, 그가 원하거나 바라던 것도 아니에요. 한편, 친구는 아들을 잃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키다리에게 임신해 아이를 낳아달라고 요구하는 건 지나치게 들립니다. 그러나 친구 역시 잘못한 것이 없죠. 잘못이라면 전쟁에 참여한 것이 잘못입니다. 전쟁에 참여하느라 아이를 돌볼 수 없어 친구에게 맡겼을 뿐이죠. 그렇다면 키다리와 친구 모두 사실은 전쟁의 피해자일 뿐, 진정한 가해자는 전쟁이로군요.
우리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르기 위해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정해진 어떤 종착지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끔찍한 비극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전쟁이나 우리를 둘러싼 시스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느끼면 우리는 찝찝해집니다. 답답해지죠.
그런 느낌. 처연하고 지난하고 답답하고 불행이 가득한 것만 같고, 정답은 보이지 않으면서 어느 하나 쉬운 게 없는 것 같은 느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답답하고 처연해서 기분이 안 좋아질 것만 같은 이런 느낌이, 우리가 뛰어난 영화를 보거나 훌륭한 문학작품을 읽거나 역사적인 사진을 보고 느끼는 '감동'의 정체인지도 모릅니다.
답답하고 서글프지만 그래서 비극을 둘러싼 시스템을 발견하는 느낌, 그래서 현실에 더 가까워지는 느낌, 그래서 세상의 한 단면을 경험한 것 같은 느낌, 그래서 나 또한 세상의 한 단면에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해주는 느낌, 그래서 살아있다는 생의 감각을 되찾아주는 느낌. 우리가 말하는 예술성, 작품성, 혹은 감동의 정체는 바로 이런 느낌입니다.
봉준호와 칸테미르 감독은 이런 감동의 정체를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감동을 구현하는 방법은 우리가 영화라는 픽션을 보면서도 세상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죠. 절대적인 선인이나 악인이 없는 비극을 만들고, 비극의 뒤에는 언제나 불평등한 세계가 있음을 느끼도록 하는 것, 그런 세계 속에서 자신의 삶의 좌표를 더듬어 보게 하는 것. 좋은 영화는 언제나 그렇습니다. 삐걱대는 시스템 속 빠져나오기 힘든 뻘밭에서 넘어지거나 삑사리 내는 사람들의 처연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처연한 모습에 우리의 모습을 대입해 우리의 세상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이 영화는 좀 묘한 거 같아요. 어떤 약자들이 공유하는 서글픔도 있고 약자끼리 주는 상처도 있죠. 미묘하게 얽혀있고, 그게 다 가족이라는 틀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죠. (...) 명확한 악당이나 악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천사 같지도 않고.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못된 사람들이 그냥. 사실 우리들의 모습이 그렇잖아요? (...) 잔상들이, 여운이 남는 영화를 항상 꿈꿉니다.
봉준호 감독이 '선인도 악인도 없는 희비극'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여운이자 잔상들입니다. 그렇다면 이건 이야기를 굳이 어렵게 만드는 방법은 아닌 것 같군요. 선인이나 악인이 등장하는 이야기에 익숙해진 2020년의 우리에게, '선인과 악인이 없는 희비극'은 부조리한 세계에 관한 진한 잔상과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 방식입니다. 이야기를 오랫동안 기억에 남도록 만드는 방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