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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km를 달려가 전하고 온 말

노르망디, 그리고 시댁 사람들


우리, 이번 주말에는 노르망디에 가자.


재택근무를 끝내고 한숨을 돌리던 남편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왜 이 말을 입 밖으로 내어놓기가 어려웠는지 모르겠다.


작년 여름 출산 이후로 아기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컸다. 프랑스에서 아기의 삼칠일도, 한 달도, 외부인과의 출입을 제한하는 자의적이고도 타의적인 분위기에 의해 조용히 지나보냈다. 한때는 병원에서 바로 양가 부모님께 아기를 보여드리는 상상도 했었지만 현재까지는 노르망디에 사시는 시아버지, 시어머니만 아기를 보실 수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프랑스와 한국 간 마음대로 오갈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주변에도 몇 개월이 지나 심지어 돌이 다 되어가도록 한국 부모님께 아기를 보여드리지 못한 가족들도 꽤 되었다. 나 역시 그럴수록 매초 매분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으려 애쓰며 내 곁의 작은 인간의 순간순간을 기록해나갔다. 아기의 성장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가족들과 랜선으로 나누며 아쉬움을 달래보았다.


곧 있으면 뛰어다니겠구나. 곧 있으면 엄마, 아빠 소리 하겠구나.


가족들이 가볍게 던지는 이 말들 속에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있다는 걸 내가 못 알아챌 리는 없다. 뒤집어 읽으면 “뛰어다닐 때까지는 볼 수 있을까. 엄마, 아빠를 넘어서 가족들을 불러주는 말들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머지않아 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으니 견딘다. 아기인 시기를 조금 지나쳐 보내더라도, 언젠간 만나서 아기를 실컷 보여주면 풀릴 묵직한 마음들.


그런데 아기가 꼬물거리는 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나의 생각의 끝자락이 머문 곳은 남편이었다. 항상 큰 감정의 기복 없이 그 자리에 있는 나무 같은 사람. 요리조리 콕콕 찔러서 묻지 않으면 먼저 무얼 하자는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사람. 프랑스에 있으면서도 다른 가족들이나 친척들에게 아기를 보여주지 않는 상황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는 사람. 그는 정말 괜찮은 걸까.


이쯤에서 남편 쪽의 가족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아버지는 오남매 중의 장남이시다. 오남매 모두 자녀들을 여럿 두었기에, 남편은 어릴 적부터 두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많은 사촌들과 복작이는 유년기를 보냈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할아버지, 할머니, 친척들과 프랑스 방방곡곡 캠핑을 다녔다고 한다. 호숫가에서 퍼덕퍼덕 뛰는 물고기를 잡는 이야기를 할 때에는 어찌나 생동감이 넘치던지. GPS가 없던 시절 지도를 잘 보는 눈을 가져서 할아버지에게 인정받아 조수석에 앉아서 다닌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말 할 때는 또 어떻고... 유년기 추억 이야기를 해줄 때마다 그의 눈은 항상 반짝였고 그 추억은 모두 하나하나가 알알이 빛났다.


그건 마치 내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어떤 단단한 구심점 같았다. 남은 생을 살아나가는 행복의 근원이자 오아시스였다.


그가 슬픔에 잠기기 시작한 것은 우리가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우리의 관계가 꿈틀대기 시작하던 2011년경이었다. 미국에서 만난 우리의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한국행을 택한 남편은 당시 90세셨던 할아버지에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인사를 드렸다. 할아버지는 손자가 마침내 사랑을 찾았으니 따라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해주시며 남편이 어디에 있든 자신은 행복할 거라고 하셨다.


할아버지의 건강은 점점 안 좋아지셨다. 그해, 서울의 어느 버스 안에서 부고를 듣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던 그를 제대로 위로해주지 못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처럼 따르던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프랑스에서 지키지 못하고 내 옆을 택했었던 남자에게 내가 어떤 위로를 할 수 있었을까. 나는 너무나 어렸고, 얕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적이 없었고... 또 어떤 말로도 그런 상황을 위로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사랑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슬픔이 먼저 찾아왔고, 이후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도 건드리기 어려운 하나의 아픔이 되었다.


아직도 내가 아쉬운 건 이미 고령이셨지만 남편의 친할아버지를 한 번도 뵙지 못했다는 거다. 우리 집에는 노르망디 스타일의 다인용 나무 테이블이 하나 있다. 나무 만지는 일을 좋아하셨던 그의 할아버지가 남편에게 만들어주셨던 물건이다. 남편은 그렇게 할아버지를 기억하며 살아간다.  


이곳에서 저물어가는 해를 함께 보며, 평생을 사셨을 것이리라.


모리스 할아버지와 마리 할머니.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노르망디 바닷가 마을에서 처음으로 만나 결혼을 하고 오남매를 키우셨다. 물질적으로는 넉넉하지 않은 삶이셨을지 몰라도 사랑으로 가족을 꾸려나가셨다.


두 분 모두 음식을 직접 만들어 해 드시는 걸 좋아하셨다. 레시피를 하나 정하면 그걸 수십 번씩 고쳐 만들어가며 입맛에 맞는 가족 레시피들을 완성해나가셨다. 노르망디 바닷가에 사시던 할머니 댁에 초대받아 갔을 적 손수 만들어 내오셨던 생선 파테는 내가 한 번 맛보고도 아직까지 그리운 할머니의 손맛이 되었다. 구십 평생 할아버지와 떨어져본 적이 없던 할머니는 가족들 곁에서 3년을 더 지내시다가 할아버지의 곁으로 떠나셨다. 손자이지만 아들같이 아꼈던 남편에게는 레시피 책이 유산으로 돌아왔다. 마지막에 할머니를 뵐 수 있었다는 건 내게도 소중한 기억이 되었다. 남편에게 소중한 사람을 실제로 볼 수 있었다는 데서 오는 감사함이었다.


사촌만 20명에 달하는 대가족적 환경에서 살아오다보니 재미난 일도 많았다고 한다. 프랑스 시댁하면 요즘 흔하게 떠오르는 이미지의 북적이는 느낌의 가족 분위기는, 그러나 내게는 남편에게 말로만 듣던 그의 ‘과거’에 가까웠다.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사실상 다 같이 모일 일이 잘 없었다는 시댁의 친척들이 우리 결혼식에 모였을 때는 나도 '현재' 그들과 함께라는 사실에 얼마나 큰 기쁨을 느꼈는지 모른다.


한번 보자 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프랑스 여기저기, 다른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쉽지는 않다. 그래서 시부모님 이외에는 아직 실제로 아기를 데리고 다른 가족이나 친척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처음 만날 때 외동이 아니었던 남편이, 외동처럼 생활하고 있었던 것은 말하기 어려운 또다른 이유다.


남편에겐 3살 위 친형, 기욤이 있었다. 기욤은 유기농과 자연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프랑스 청년이었다. 요즘 프랑스에서 한창 힙한 사업으로 여겨지는 유기농 채소 구독 배달 사업도 그때 당시 막 일을 구상하고 시작하던 그였다. 그러나 프랑스식 지지부진한 행정처리는 몇 년간 도통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기욤이 자리를 잡기를 바라며 프러포즈를 기다리던 여자친구가 있었다. 10년 사귄 여자친구였던 그녀마저 웬 농부 일을 하려고 하냐며, 회사에 들어가 보통의 일을 하라고 하기까지 했었다. 나 역시 그 당시에는 걱정되는 마음에 비슷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인고의 기다림 끝, 마침내 사업 허가가 나와 형은 일을 막 시작하며 바빠지게 되었다. 밭에서 작물을 살펴보러 다니던 그가, 하루아침에 급작스럽고 안타깝게 먼저 먼 길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생각할 시간을 가진다며 따로 지내고 있던 여자 친구가 소식을 듣고 달려와 쓰러지듯 오열하며 울었다고 한다. 그의 떠나감은 주변 사람들에게 깊은 충격과 아픔으로 남았다. 사랑한다는 말은 아껴두는 것이 아니더라.


계절은 하나씩 지나갔다.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온 듯 보였지만 그게 정말 전 같으랴. 한국어로 ‘일 더하기 일은 귀염이(기요미)’라는 막간의 노랫말이라도 들릴라치면 그의 눈시울은 어느새 붉어지곤 한다. 울지는 않는 슬픔. 내 눈에는 그게 보였다. 프랑스에서 한국 무를 심고 싶은데 품종을 좀 찾아봐달라며 환하게 말을 건네던 기욤을 나도 추억한다. 농사일을 하는데 유용하게 잘 쓸 것 같아 사왔던 제주산 벙거지 모자 선물은, 생전 씌워줄 일 없었던 그 모자는, 동생의 마음을 가득 담은 채로 프랑스에서 형과 함께 잠들어 있다.


그렇구나. 그래서 아직도 프랑스의 가족들에게 다 보여주지 못한 기분이 들었던 거구나. 그동안 가슴 한 구석에 묵직한 것이 눌려있는 것 같다고 느꼈던 이유를 알아낸 것 같았다. 프랑스에 있으면서도 남편이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아기를 다 보여주지 못한 것 같다는 그 기분은 상상이 아닌 현실이었다. 마리 할머니, 모리스 할아버지, 그의 형 기욤... 아직 중요한 사람들에게 아기를 다 소개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졌다.


어린 아기를 그곳에 데리고 가도 되는지에 대한 찰나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아야 했다. 거기는 우리 아이를 보셨다면 너무나 예뻐해 주셨을 가족들이 있는 곳일 뿐이기 때문이다. 고민은 짧았고 말에는 확신을 채웠다.


우리 아기 보여드리러 노르망디 가자.


오랜만에 찾은 마을, 빌라빌


사랑하는 사람이 반짝거리는 대가족의 유년 생활을 보낸 곳. 지금은 그 웃음소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지만 그 인생 첫 번째 챕터에서 행복했던 곳. 그가 나를 모르던 그 때에도 이 마을은 올곧이 그 자리에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을 테다. 왼쪽으로는 도빌, 오른쪽으로는 르아브르를 낀 작은 마을 빌라빌. 사랑하는 가족 구성원들과의 마지막 추억을 함께한 곳이 바로 이 노르망디 바닷가였다!


이곳은 내가 프랑스 생활이 지치고 다 그만두고 싶었던 때에도 언제든 와서 머물다 갈 수 있던 마음의 안식처였다. 시조부모님이 사시던 집이 비게 되어 남편이 관리하게 되었을 때는 거의 주말마다 내려오기도 했다. 그 공간에서 남편이 안식을 취하는 것을 보며, 나도 평화를 찾았던 기억이 난다.


정서적으로 많은 것이 결핍되어 있었던 나를 채워준 남편의 따뜻함은 거슬러 올라가보면 사실은 시조부모님이 물려주신 가장 값비싼 유산이다. 자신들의 생애로 가족들에게 사랑의 존재를 보여주셨고 남편은 그걸 믿으며 자랐다. 그래서 이 마을은 어쩌면 그가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굳건한 믿음과 사랑의 원천이 샘솟는 근원지이다. 슬프지만 아름답고, 힘들지만 비로소 마주할 때 다시 생의 힘을 얻고 오게 해주는 기묘한 마을. 그 유산이 거슬러 흘러내려와 지금 우리의 사랑과 그 결실을 만든 게 아닌지.


출생과 죽음은 맞닿아 있었다. 형은 그새 주변에 라벤더를 무성히 키워놓고, 왔느냐며, 우리를 돌아보며 웃음 지었다. 남편은 이제 그때의 형보다 나이가 많아지고 주름도 어느덧 조금씩 생겼다. 같은 자리에 계시는 할머니, 할아버지, 다른 친척 어르신 분들까지 한 분씩 찾아뵈었다. 그리고 남편 곁을 지키고 서 있던 나도, 이번에는 오랫동안 마음속으로만 간직했던 말을 꺼내보았다.


이 말을 하기 위해 참 오랜 시간이 걸렸고 파리에서 200km 떨어진 이 마을까지 달려왔다.


그를 따뜻한 사람으로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가장 예쁜 천사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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