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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Jun 24. 2020

1900

19.08.13. 스반홀름 59일차(덴마크100일차)

수백 여년의 이름과 이야기가 새겨져 있는 이 저택의 지붕 속을 깨끗이 쓸고 닦으며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새겨넣고 있다.




유성우가 쏟아지던 밤이 지나갔다. 예지씨와의 마지막 밤, 우리는 깜깜한 마을 잔디에 누워 우주로부터 떨어지는 부스러기들의 향연을 봤다. 몇십 년 만에 돌아온 유성우 축제를 북유럽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보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지면의 냉기를 느끼며 매트 위에 누워 땅과 하늘의 구분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캄캄한 허공, 무중력의 우주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번쩍이는 빛은 사방팔방 전조도 없이 빠르게 켜졌다가 긴 꼬리를 남기며 사라졌다. 도망가는 빛을 부여잡듯 이미 사라진 꼬리의 흔적을 좇았다. 몽글몽글 부옇게 남은 연기가 무언가 타올랐음을, 존재했음을 말해주었다. 마음이 저려왔다. 우린 아직 여기에 살아있다. 어쩐지 그런 문장이 가만히 떠올랐다.



두 달간 함께 지냈던 문&유곤 커플이 차례로 일상으로 돌아갔다. 다정한 예지씨는 우리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들과도 각별히 잘 지냈고 굿바이 커피에 무려 다섯 개의 케이크가 올랐다. 간단히 디저트를 만들어 보내는 이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굿바이 커피 문화가 빛을 발했다. 풍성한 디저트 한 상만으로도 그가 짧은 시간 얼마나 알차게 잘 지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이 곳이 아니었더라면, 이 시간이 아니었더라면 어쩌면 영영 만나지 못했을 우리는 긴 포옹으로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다른 시간 다른 곳에서 만나도 여전히 다정할 우리를 떠올리며 서로의 여정을 응원했다.




이른 아침 큰 배낭을 짊어지고 마을을 나서는 예지씨를 배웅하고 페인팅을 시작했다. 리프트를 타고 공중으로 올라가 창문틀을 청소하고 오일과 페인트를 순서대로 칠했다. 처음 쇠얀이 조종하는 리프트를 타고 5층 높이의 메인 빌딩 지붕에 올라 먼지를 털어내던 때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렸는데 이제 혼자서도 거뜬히 스틱을 조종해 자유자재로 이동하며 작업한다. 공중으로 몸이 떠올라 있다는 감각이, 중력의 힘을 거스르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상상력을 자극해 등골이 서늘했다. 리프트가 바람에 조금만 흔들려도 소스라치며 주저앉아 한참 동안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기계를 신뢰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이 단단하고 거대한 철근 덩어리가 안전하게 나를 지탱해준다는 사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이 감각에 익숙해지자 두려운 상상을 잊을 수는 있었다. 



빌딩 그룹에서 경험하는 것들은 그처럼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쇠막대를 하나하나 이어 스케폴을 설치한 후 흔들리지 않도록 지지대로 바닥에 단단히 고정하고, 바닥을 고르게 하기 위해 나무판자와 고무판들을 덧대어 쌓고, 어깨와 배와 허벅지로 위드 웨커의 무게를 견디며 거세게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가는 날의 소음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는 스스로의 변화를 지켜보며 나는 내 몸과 감각을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특별히 몸의 어느 부위가 취약한지, 관절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무게를 견디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를 취하고 어떻게 힘을 분산시켜야 하는지 새로운 작업을 하며 하나씩 알아가고 있었다. 책과 사유로 정신을 고양시키는 것만큼이나 몸에 대한 감각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과정 또한 자아가 성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전부터 낮까지는 몸의 다양한 근육을 쓰고 오후면 선선한 바람 아래 책과 음악으로 충분히 뇌의 신경을 자극하고 깊은 밤 별똥별을 맞으며 우주를 생각했다. 몸과 정신과 우주의 균형을 유지하는 삶이 이 마을에서는 가능했다.



아나스와 쇠얀과 함께 메인 빌딩 지붕에 몇 년은 묵은 듯한 먼지와 잔해를 청소하다 창틀에 적힌 낙서를 발견했다. 1900, 1908, 1910이라는 숫자와 함께 누군가의 싸인이 적혀있었다. 120년 전 누군가가 이름을 새겨넣은 나무 기둥은 낡고 많이 바랬지만 여전히 이 우아한 대저택을 지탱하고 있었다. 왕족의 여름 별장에서 마을 귀족에게로, 부유한 건축가에서 스반홀름 마을을 세우기 위해 호기롭게 도시를 떠나온 장발의 청년들에게로 넘어오는 동안 여름이면 담쟁이 넝쿨이 뒤덮이는 이 큰 집은 조용히 이름들을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수백 여년의 이름과 이야기가 새겨져 있는 이 저택의 지붕 속을 깨끗이 쓸고 닦으며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새겨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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