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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상 모두의 언니 Jul 18. 2023

까만 파운데이션에 놀라고 통통한 마네킹에 끄덕였다

동생에게 보내는 열여덟 번째 편지

외부에서 나를 비춰줄 빛을 찾지 말고 내 안에 있는 빛을 찾으면 스스로 밝게 빛난다는 말, 너무 멋있는 것 같아! 하긴, 외부에서 나를 비추면 어떻게든 그림자가 생기기 마련인데, 만약 내가 자체발광을 한다면 그림자도 없겠다, 그치?




 나아야 어제는 날씨가 32도까지 올라간 하루였어. 하루는 비가 억수로 쏟아 지다가, 바로 다음날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는 햇살로 가득하니, 보스턴 날씨는 역시 가늠하기가 너무 어렵네.


 이사한 집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러 backbay에 다녀왔어. 번화가라 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 화장품을 사러 갔는데 까만 파운데이션이 있어서 놀랐어. 그리고 지나가는 길에 무심코 마네킹을 봤는데 통통한 체형의 마네킹이 있어서 두 번 놀랐고. 또, 집에 오는 길에 본 놀이터 이야기까지 하고 싶은 얘기가 참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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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파운데이션, 남자 손톱 네일



 10년이 넘도록 늘 화장을 하고 다녔어. 심지어 등산이나 워터파크에 갈 때에도 방수가 되는 화장품으로 멋지게 나를 꾸미곤 했으니까. 미국에 와서도 사람들을 만날 때면 어김없이 화장을 했지. 그런데 나에게 화장은 피부를 조금 더 하얗고, 뽀얗고, 매끈하게 만들어주는 용도였어. 최근엔 까매진 내 피부를 생각하지 않고 너무 하얗게 화장했다가 남편에게 웃음거리가 된 해프닝도 많아.


 어제 화장품 가게에서 까만 파운데이션을 보면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 첫째로는 미국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 그리고 따라온 생각은 왜 나는 그렇게 새하얀 피부만을 고집했을까? 였어. 왜 그것만이 답인 마냥 추종한 거였을까. 이렇게 많은 선택권이 있는데 말이야. 마치 까막눈으로 반 평생을 산 느낌이었어.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선택권을 늘 나에게 보여주고 있었는데, 막상 나는 내 편견으로 인해 반에 반 밖에 모르고 살았던 거야.


 앞으로는 무조건 하얀 거 말고, 내 피부톤 하고 딱 맞는 걸로 사서 바르고 다닐 거야. 까만 피부면 어때? 어쩌면 이 피부는 밖에서 많은 시간 나 스스로와의 싸움을 하며 운동을 했던 시간들의 결과 일수도 있는 거잖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사랑스럽게 나를 볼래.



여러 브랜드의 화장품을 파는 곳 "SEPHORA"에서 본 가지각색의 파운데이션




축구하는 여자, 통통한 마네킹



 미국에 살며 좋은 점 중 하나는 운동의 성별 경계가 없다는 거야. 축구, 야구, 하키, 농구 등 남자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즐기는 여자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고, 길거리에서 유모차 끄는 남자, 요가와 필라테스하는 남자, 화장하고 치마 입는 남자들도 아주 많이 볼 수 있어.


 그리고 어제 지나가면서 봤던 통통한 체형의 마네킹. 처음에는 생소했어. 깡마른 체형에 가녀린 여자 마네킹만 늘 봐왔던 내게 "무조건 마른 것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듯싶었거든. 다른 나라 사람들은 많이 안 그러는 것 같은데, 유독 한국인들을 만나면 살 빠졌다, 말라서 좋겠다, 왜 이렇게 이뻐졌냐 등 겉모습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아. 물론 나도 그랬지.


 하지만 앞으로는 마음 가짐을 아주 조금씩이라도 바꿔보려고 해. 마른 사람을 보며 무조건 아름다운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열심히 운동하고, 또 열심히 먹고 행복하게 잘 살면 되는 거 아니겠니. 나는 나 대로 건강하게 나다운 아름다움을 만들어 가려고 노력할 거야.


스포츠 브랜드 앞에 도배되어 있던 축구하는 여자 광고컷, 통통한 몸매의 마네킹





모두 같은 높이일 필요는 없어



 쇼핑을 끝내고 집으로 오는 길에 아이들 놀이터를 구경했어. 조금 힘들어서 쉴 곳이 필요하기도 했고, 미국 놀이터는 어떻게 생겼나 궁금했거든. 솔직히 한국의 화려하고 스펙터클한 놀이터에 견줄 바가 못 되는 것 같아. 하지만 왠지 이곳의 놀이터는 더 자유로워 보였어. 놀이 기구들은 다양한 종류로 아이들의 취향을 존중해 주는 듯싶었고, 같은 종류의 기구도 높이를 다르게 해서 꼭 키가 맞아야 탈 수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키에 맞는 걸 선택해서 탈 수 있게 했어. 마치  "기준에 맞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하는 듯.


 한국은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바닥을 모두 우레탄으로 바꾸고 있다고 들었어. 하지만 어제 이곳에서 아이들은 온몸에 모래를 뒤집어쓰고, 미끄럼틀을 타다가 마신 모레를 퉤퉤- 뱉기도 하더라. 어린 시절 나는 모래 위에서 뛰어놀며 두꺼비집도 만들고, 신발을 신은 채 모래 마사지도 해주곤 했는데 말이야. (그런 날이면 우리 엄마는 뒷목을 잡으셨지만)


 뭐가 좋은진 모르겠어. 하지만 아파트 단지 내 아무나 들어갈 수 없게 만들어 놓고, 바닥을 고퀄리티 우레탄으로 만들어 놓은 한국 놀이터보다는, 흙 밟고 뛰어놀고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곳이 내 개인적으로는 더 '놀이 터' 스러운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해.


 물론 세상이 너무 흉흉한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말이야.


미국의 흔한 놀이터 뷰





내 취향에 맞춰 살 권리


 얼마 전, 건축가 유현준 교수의 책을 읽으며 머리를 띵-하고 맞은 내용이 있었어. 한국에서는 아파트가 화폐 역할을 한다는 거야. 모두 비슷한 구조와 사이즈, 모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고팔며 투자를 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는 거였어.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해. 그래서 한국 부동산 불패라는 이야기도 있잖니.


 하지만 미국은 다른 것 같아. 상가용 오피스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주거용에 있어서는 신축 아파트부터 패밀리 하우스, 싱글 하우스 등 모두 각자 나름의 개성이 강해. 다운타운이라고 아파트만 있는 것도 아니고, 외곽이라고 패밀리 하우스만 있는 것도 아니야. 모두가 공존하며 제 자리를 지키고 있어.


 동네에 따라 주거 모습이 달라지지 않아. 재산이 많다고 무조건 고층의 펜트 하우스도 아니야. 도서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전형적인 부르주아 백인 부부도 미국식 하우스에 살고 있더라고. 아파트 펜트 하우스 몇 채를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사람인 듯 싶은데 말이야.


 그냥 각자 살고 싶은 곳에 사는 것 같아. 취향껏 선택해서 만족하며 사는 느낌. 여기서는 거래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쉴 곳이라는 의미가 강한거겠지?


 모두의 주거 형태가 한 가지 모습일 필요는 없잖아. 편하고 고층뷰가 좋으면 아파트에 살고,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조금 더 세상과 소통하며 살고 싶으면 미국식 하우스에 살면 되는 거니까. 너는 이곳에서 사는구나, 나는 이런 곳에서 살아. 그냥 담백하고 깔끔하게 그 정도.


미국의 주상복합 아파트(좌), 신축 아파트(우)




오늘 글이 조금 길었네. 미국에 살며 아주 미세하게 조금씩 내 가치관들이 변하는 듯싶은데, 어제가 바로 그런 변곡점 중에 하나였던 것 같거든. 스티븐 잡스가 예전에 했던 얘기 중 내가 좋아하는 말이 있어.


Connecting the dots



 점들이 모여 선이 되듯이 과거와 현재의 점들이 모여 미래의 나를 만든다는 뜻이야. 나는 아직 선이 그려진 상태는 아닌 것 같고, 매일 한 점씩 찍고 있는 중이야.  그래서 나아와 함께 하는 이 교환 일기가 너무 소중해. 그 "Dot(점)"들을 기록해 두고 언제든 열어볼 수 있게 해 주니까.


 마지막 사진은 어제 돌아다니며 봤던 다양한 광고 모델들의 모습이야. 마르고 큰 눈, 오뚝한 코, 하얀 피부의 광고 모델들만 보다가 내 옆집에 살고 있을 것 같은 모델들의 사진을 보니 나를 가두고 있던 내 편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름다운 몸매 라인보다, 빛나는 점들을 이은 멋진 인생 라인을 만들어 가보자!

광고 모델이라고 꼭 가녀린 인형같은 사람일 필요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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