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에게 보내는 열여덟 번째 편지
외부에서 나를 비춰줄 빛을 찾지 말고 내 안에 있는 빛을 찾으면 스스로 밝게 빛난다는 말, 너무 멋있는 것 같아! 하긴, 외부에서 나를 비추면 어떻게든 그림자가 생기기 마련인데, 만약 내가 자체발광을 한다면 그림자도 없겠다, 그치?
나아야 어제는 날씨가 32도까지 올라간 하루였어. 하루는 비가 억수로 쏟아 지다가, 바로 다음날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는 햇살로 가득하니, 보스턴 날씨는 역시 가늠하기가 너무 어렵네.
이사한 집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러 backbay에 다녀왔어. 번화가라 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 화장품을 사러 갔는데 까만 파운데이션이 있어서 놀랐어. 그리고 지나가는 길에 무심코 마네킹을 봤는데 통통한 체형의 마네킹이 있어서 두 번 놀랐고. 또, 집에 오는 길에 본 놀이터 이야기까지 하고 싶은 얘기가 참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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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파운데이션, 남자 손톱 네일
10년이 넘도록 늘 화장을 하고 다녔어. 심지어 등산이나 워터파크에 갈 때에도 방수가 되는 화장품으로 멋지게 나를 꾸미곤 했으니까. 미국에 와서도 사람들을 만날 때면 어김없이 화장을 했지. 그런데 나에게 화장은 피부를 조금 더 하얗고, 뽀얗고, 매끈하게 만들어주는 용도였어. 최근엔 까매진 내 피부를 생각하지 않고 너무 하얗게 화장했다가 남편에게 웃음거리가 된 해프닝도 많아.
어제 화장품 가게에서 까만 파운데이션을 보면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 첫째로는 미국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 그리고 따라온 생각은 왜 나는 그렇게 새하얀 피부만을 고집했을까? 였어. 왜 그것만이 답인 마냥 추종한 거였을까. 이렇게 많은 선택권이 있는데 말이야. 마치 까막눈으로 반 평생을 산 느낌이었어.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선택권을 늘 나에게 보여주고 있었는데, 막상 나는 내 편견으로 인해 반에 반 밖에 모르고 살았던 거야.
앞으로는 무조건 하얀 거 말고, 내 피부톤 하고 딱 맞는 걸로 사서 바르고 다닐 거야. 까만 피부면 어때? 어쩌면 이 피부는 밖에서 많은 시간 나 스스로와의 싸움을 하며 운동을 했던 시간들의 결과 일수도 있는 거잖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사랑스럽게 나를 볼래.
축구하는 여자, 통통한 마네킹
미국에 살며 좋은 점 중 하나는 운동의 성별 경계가 없다는 거야. 축구, 야구, 하키, 농구 등 남자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즐기는 여자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고, 길거리에서 유모차 끄는 남자, 요가와 필라테스하는 남자, 화장하고 치마 입는 남자들도 아주 많이 볼 수 있어.
그리고 어제 지나가면서 봤던 통통한 체형의 마네킹. 처음에는 생소했어. 깡마른 체형에 가녀린 여자 마네킹만 늘 봐왔던 내게 "무조건 마른 것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듯싶었거든. 다른 나라 사람들은 많이 안 그러는 것 같은데, 유독 한국인들을 만나면 살 빠졌다, 말라서 좋겠다, 왜 이렇게 이뻐졌냐 등 겉모습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아. 물론 나도 그랬지.
하지만 앞으로는 마음 가짐을 아주 조금씩이라도 바꿔보려고 해. 마른 사람을 보며 무조건 아름다운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열심히 운동하고, 또 열심히 먹고 행복하게 잘 살면 되는 거 아니겠니. 나는 나 대로 건강하게 나다운 아름다움을 만들어 가려고 노력할 거야.
모두 같은 높이일 필요는 없어
쇼핑을 끝내고 집으로 오는 길에 아이들 놀이터를 구경했어. 조금 힘들어서 쉴 곳이 필요하기도 했고, 미국 놀이터는 어떻게 생겼나 궁금했거든. 솔직히 한국의 화려하고 스펙터클한 놀이터에 견줄 바가 못 되는 것 같아. 하지만 왠지 이곳의 놀이터는 더 자유로워 보였어. 놀이 기구들은 다양한 종류로 아이들의 취향을 존중해 주는 듯싶었고, 같은 종류의 기구도 높이를 다르게 해서 꼭 키가 맞아야 탈 수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키에 맞는 걸 선택해서 탈 수 있게 했어. 마치 "기준에 맞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하는 듯.
한국은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바닥을 모두 우레탄으로 바꾸고 있다고 들었어. 하지만 어제 이곳에서 아이들은 온몸에 모래를 뒤집어쓰고, 미끄럼틀을 타다가 마신 모레를 퉤퉤- 뱉기도 하더라. 어린 시절 나는 모래 위에서 뛰어놀며 두꺼비집도 만들고, 신발을 신은 채 모래 마사지도 해주곤 했는데 말이야. (그런 날이면 우리 엄마는 뒷목을 잡으셨지만)
뭐가 좋은진 모르겠어. 하지만 아파트 단지 내 아무나 들어갈 수 없게 만들어 놓고, 바닥을 고퀄리티 우레탄으로 만들어 놓은 한국 놀이터보다는, 흙 밟고 뛰어놀고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곳이 내 개인적으로는 더 '놀이 터' 스러운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해.
물론 세상이 너무 흉흉한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말이야.
내 취향에 맞춰 살 권리
얼마 전, 건축가 유현준 교수의 책을 읽으며 머리를 띵-하고 맞은 내용이 있었어. 한국에서는 아파트가 화폐 역할을 한다는 거야. 모두 비슷한 구조와 사이즈, 모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고팔며 투자를 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는 거였어.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해. 그래서 한국 부동산 불패라는 이야기도 있잖니.
하지만 미국은 다른 것 같아. 상가용 오피스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주거용에 있어서는 신축 아파트부터 패밀리 하우스, 싱글 하우스 등 모두 각자 나름의 개성이 강해. 다운타운이라고 아파트만 있는 것도 아니고, 외곽이라고 패밀리 하우스만 있는 것도 아니야. 모두가 공존하며 제 자리를 지키고 있어.
동네에 따라 주거 모습이 달라지지 않아. 재산이 많다고 무조건 고층의 펜트 하우스도 아니야. 도서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전형적인 부르주아 백인 부부도 미국식 하우스에 살고 있더라고. 아파트 펜트 하우스 몇 채를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사람인 듯 싶은데 말이야.
그냥 각자 살고 싶은 곳에 사는 것 같아. 취향껏 선택해서 만족하며 사는 느낌. 여기서는 거래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쉴 곳이라는 의미가 강한거겠지?
모두의 주거 형태가 한 가지 모습일 필요는 없잖아. 편하고 고층뷰가 좋으면 아파트에 살고,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조금 더 세상과 소통하며 살고 싶으면 미국식 하우스에 살면 되는 거니까. 너는 이곳에서 사는구나, 나는 이런 곳에서 살아. 그냥 담백하고 깔끔하게 그 정도.
오늘 글이 조금 길었네. 미국에 살며 아주 미세하게 조금씩 내 가치관들이 변하는 듯싶은데, 어제가 바로 그런 변곡점 중에 하나였던 것 같거든. 스티븐 잡스가 예전에 했던 얘기 중 내가 좋아하는 말이 있어.
Connecting the dots
점들이 모여 선이 되듯이 과거와 현재의 점들이 모여 미래의 나를 만든다는 뜻이야. 나는 아직 선이 그려진 상태는 아닌 것 같고, 매일 한 점씩 찍고 있는 중이야. 그래서 나아와 함께 하는 이 교환 일기가 너무 소중해. 그 "Dot(점)"들을 기록해 두고 언제든 열어볼 수 있게 해 주니까.
마지막 사진은 어제 돌아다니며 봤던 다양한 광고 모델들의 모습이야. 마르고 큰 눈, 오뚝한 코, 하얀 피부의 광고 모델들만 보다가 내 옆집에 살고 있을 것 같은 모델들의 사진을 보니 나를 가두고 있던 내 편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름다운 몸매 라인보다, 빛나는 점들을 이은 멋진 인생 라인을 만들어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