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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센스 Apr 30. 2024

핫가이의 두 번째 데이트 신청을 거절했다

사랑받기 위해 나를 바꾸고 싶지 않다

괜찮은 연하남과의 두 번째 데이트 약속을 취소했다. 외모도 매력적이고 잘 꾸미고 지적이고 가치관도 바른 것 같았다. 대화도 잘 됐고, 생각과 감정을 말로 표현도 잘하고 로맨틱한 성격이라 사귀면 부족한 느낌도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삶의 철학과 가치관이 매력적이면 끌리는 편인데, 가치관이 매력적이고 믿음이 가서 대화하다 보니 ‘오, 괜찮은 사람이네. ’ 싶어서 더 만나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모도 과분할 정도로 괜찮다고 느꼈다.


이렇게 훈훈하게 생긴 애가 나와의 첫 데이트가 너무 즐거웠고 대화 나눴던 게 너무 좋았다고 해서 기분이 좋았다. 자존감이 올라갔다. 최근에 연속으로 거절당하거나 차여서 나도 모르게 조금 내려갔던 자존감이 다시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두 번째 데이트 신청을 받고 다음날은 솔직히 기분이 너무너무 좋아서 붕 떠있었다. 그래도 전과 달리, 연애에 조심성이 조금 생겨서 이성적으로도 생각해 보았다. 사람이 괜찮다면 조건적인 면은 여전히 관대할 수 있는데, 사람으로서 나와 잘 맞을까 신중하게 생각했다.


1년 간 내가 만났거나 썸 탄 모든 사람들을 알고 있는 친한 오빠한테 이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다. ”너랑 안 맞을 것 같은데?“라고 했다. 너는 조용히 책 읽는 것 좋아하는데 취미로 클럽에서 디제잉 하는 애가 잘 맞을까라고 했다. 좀 비슷한 사람이 맞지 않을까라고 했다.


말할 때 조곤조곤하고 대화도 잘 통하고 술도 거의 안 마시고 건전하다고 했다. 사람이 말하는 것을 보면 그래도 대충 그 사람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데, 아무리 클럽에서 헐벗은 여자들을 많이 본다고 해도 진심으로 한눈팔거나 바람피울 사람 같지는 않았다.


나도 그 부분이 나랑 맞을까 싶었지만, 믿음이 있고 디제잉도 엄청 자주 하는 것이 아니라서 데이트하는데 크게 상관없을 것 같았다. 나에 대해서 잘 아는 친구 의견이니까 충분히 고려해 볼 만했지만 내가 그에게 믿음이 있다면, 조금 라이프스타일이 달라도 더 알아가 볼 수는 있었다.


마음에 진짜로 걸리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일단 그의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팔로잉 목록을 살펴봤다. 여자 비율은 얼마나 되는지, 어떤 사람들을 팔로우하는지 보았다. 얘 뭐야 할 정도로 많지는 않았지만 헐벗은 인플루언서들이 조금 있었다.


이런 이유로 썸을 시작하기도 전에 단념한 남자들이 전에도 몇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 아주 귀여운 수준으로 몇 있었지만, 내 남자친구라면 신경 쓰이고 싫을 것 같았다.


볼륨 있는 여자의 몸을 좋아하는 취향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몸을 드러내는 사진을 주로 올리는 계정을 공개적으로 팔로우하는 것은 최소한 나에게는 문제가 있다. 그런 취향은 즐기더라도 혼자서 조용히 즐겼으면 한다. 사귀고 나서 굳이 언팔로우하라고 말하는 것도 피곤하게 느껴졌다.


굳이 인스타그램에서 팔로잉을 확인해 본 데는 이유가 있었다. 마음에 걸리는 점이 한 가지 있었는데, 만나지 않을 이유를 찾고 싶었던 것 같다.


고민 끝에 카톡을 보냈다. 미안한데 데이트 취소해야 할 것 같다고, 나는 조용하고 단순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이라서 우리는 라이프스타일이 좀 안 맞을 것 같다고 했다. 자기는 우리가 잘 맞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조금 놀랐다면서, 어떤 점이 안 맞을 것 같냐고 물어봤다.


클럽에서 새벽까지 디제잉하는 것이나 나에 비해 액티브한 스포츠 좋아하는 것 등에 대해 말하며 둘러서 이야기하려다가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너랑 사귀게 되면, 내가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는 압박을 받을 것 같다고 말했다. 네가 압박 줄 거라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럴 것 같다고 했다.


역시나 enfj 답게 눈치 백 단이라서 내게 정곡을 찔렀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 취향 말한 것 때문에 그런 것이냐고 물었다. 그게 맞았다. 그 부분이 내게 레드 플래그였다.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다가 외적인 여성 취향이 있냐고 물어봤는데, 볼륨 있는 몸 좋아하고 여성스러운 스타일 보면 환장한다고 대답했다. 외국인이라서 영어로 말했다. 볼륨 있는 몸을 좋아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여성스러운 스타일 보면 환장한다(I go crazy for the feminine styles)에 문제가 있었다.


환장한다는 단어 선택도 그랬고, 일단 내가 평소에 과하게 여성스럽게 옷을 입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추구하는 스타일이랑 좀 다르구나 싶었다. 그 자리에서 이야기했다.


나는 그다지 페미닌한 스타일 아니라고 했다. 옷 입는 스타일에서부터 성격까지 모든 것을 아우르는 말이었다. 난 리더십 있는 스타일이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 좋아한다고 했다. 옷도 주로 캐주얼하게 입는다고 했다.


이 사람이 나를 진심으로 좋게 생각한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표현도 확실했고, 가치관도 대체로 잘 맞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와 가치관이 안 맞다고 느끼는 사람은 외국인이거나 생각하는 것이 열려 있는 편이라면 거의 없는 것에 가깝다. 진지하게 연애하고 결혼할 사람 찾는 사람이라면 나의 라이프스타일을 싫어할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회사 다니면서 월급 받아서 투자하고 책 읽고 글 쓰고 산책하고 독서모임 가고 요가하고 유튜브 듣다가 자는 루틴을 반복하고, 술은 가끔씩 적당히 마시고 집에 늦게 안 들어가고 연애할 땐 연애가 우선순위이고, 결혼하면 가정이 우선순위일 것이다. 체력 좋고 밖에 있는 것 좋아해서 웬만한 야외 활동은 함께 즐길 수 있고, 연인의 취미는 웬만하면 흡수해서 같이 하려고 한다.


대화할 때는 상대방이 편안하게 자기 생각 얘기할 수 있는 좋은 질문 던지고 잘 들어주고, 내 이야기는 짧게 한다. 말을 하면 보통 재밌는 썰 얘기해서 웃게 해 주거나 가벼운 농담 하거나 생각 많이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인사이트가 있는 말을 한다.


여자든 남자든 한참 나이 많은 사람들이든 동생들이든 나랑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재미를 느끼는 사람은 소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있을 때 재밌다고 느낀다. 그래서 대화하고 나서 나를 더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성을 볼 때 이 사람이 가진 루틴과 대화할 때의 즐거움을 빼면 취향과 취미, 외적인 것이 남는다.


나보다는 훨씬 외적인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얼마 전에 친한 오빠가 너는 네일아트 안 하냐고 물었다. 젤네일 굳힐 때 UV 라이트 쬐는데 피부에 안 좋을 것 같아서 안 한다고 했다. 손톱 위에 뭔가가 두껍게 올라가 있으면 답답하기도 하다.


여성스러운 옷도 불편하다. 치마 입으면 허리가 껴서 소화도 잘 안 되는 것 같고, 다리에 천을 덧대고 있지 않으면 바람이 슝슝 들어와서 컨디션도 더 안 좋게 느껴진다. 데이트 갈 때나 여름, 두꺼운 스타킹 신는 한겨울에는 치마나 원피스도 입는데, 부츠 신거나 운동화 신어서 과하게 여성스러운 느낌은 없앤다. 패션적으로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공주 같은 스타일은 내 미적 취향과 안 맞다.


페미닌한 스타일 얘기했던 것 때문이 맞다고 하니까, 나는 너를 너 자체로 좋아한다면서, 너를 바꾸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나도 안다. 그래도 이미 그 얘기를 들은 이상 노력하게 될 것 같은 나를 잘 알고, 그게 싫다. 그리고 괜히 여성스러운 차림으로 주로 다니는 여자들을 의식하게 될 것 같은 것도 싫다. ‘아, 얘가 이런 스타일로 옷 입은 사람을 보면 좋아하겠구나. ’라고 생각할 생각만 해도 끔찍하게 싫다.


내 스타일을 고수하면서, 나한테 항상 예쁘다고 하는 남자친구를 떠올리며 주변에 어떻게 꾸민 여자가 있어도 ‘내가 제일 예쁘다고 하고, 내 스타일이 제일 좋다고 하는 남자친구가 있어. ’하며 늘 마음속으로도 당당하고, 나를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고 싶지 않다.


아나운서나 승무원 스타일, 공주님 스타일을 좋아하는 남자의 취향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남자가 수트나 제복 입으면 멋져 보이듯, 여자가 여성스러움을 한껏 살린 스타일로 입으면 예뻐 보이고, 이에 신경세포가 반응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그것을 잘되고 싶은 여자 앞에서 입 밖으로 꺼내면 문제가 생긴다.


엑스 중에 한 명 역시 자기가 좋아하는 패션 취향을 말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고, 내가 그렇게 입으면 티 나게 좋아하고 칭찬했다. 그런 선택적인 칭찬이 반복되다 보면 관심받고 싶은 남자 앞에서, 그를 만날 때 나의 스타일이 나도 모르게 그의 취향으로 변하게 된다.


그렇게 될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고 싶다. 내가 나 자체의 모습 그대로 편안할 수 있게 소탈한 스타일이 좋고, 편안해 보이는 쿨한 패션이 좋다고 말하는 남자를 만나고 싶다. 나는 행복하기 위해서 비싸고 화려한 옷, 불편한 신발이 필요 없고, 오히려 그런 것들이 내가 좋아하는 활동들을 하는데 방해되는데, 그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내 라이프스타일을 바꾸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라이프스타일이 안맞다는 말도 결국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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