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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센스 May 22. 2024

아빠처럼 태어났는데 엄마처럼 되어갔던 나

유전과 학습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 쪽의 가계도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아버지에 대해 말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어머니에 대해 말하는 것은 조금 부담감이 있었다.


어머니라는 사람의 복잡함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바라보는 어머니에 대한 느낌과 내가 바라보는 어머니에 대한 인식의 간극 중 어떤 부분을 말해야 할까 싶었다. 그래서 장점 3가지와 단점 3가지를 말하는데 조금 더 뜸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먼저 조금 더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시작했다. 외할머니는 엄마 형제들에게 통제하고 잔소리를 많이 하는 성향이었고, 젊고 화려한 느낌이라고 했다. 외할아버지는 다정다감하고 적극적이고 부지런하고 사람들한테 베푸는 것 좋아한다고 했다. 성격이 급하다고 했다. 외할머니가 성격이 셀 것 같았는데 두 분이서 있을 때 봤을 때는 할머니가 할아버지한테 다 맞춰주는 것 같았다고 덧붙였다.


 어머니를 한마디로 말하면 외유내강이라고 했다. 어머니의 장점으로는 1) 멘탈이 강하다 2) 희생적이다 3) 사람들과 관계가 좋다 가 있고, 단점으로는 1) 소통이 안된다 2) 극단적이다 3) 자기 행복을 덜 챙긴다 가 있다고 했다. 희생적이니까 상대적으로 자기 행복을 덜 챙기는 것 같다고 했다.


어머니의 단점을 말할 때 망설였다. 사람들이 보는 엄마와 내가 느끼는 엄마 중에서 일단 내 관점에서 단점을 말해보겠다고 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엄마와 소통이 안된다고 느꼈다. 나는 조잘조잘 다 말하고 내 얘기 너무 편안하게 잘하는 성격인데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 시도하다가 엄마가 안 들어주는 것 같다고 느껴서 그때부터 엄마한테 말하기를 포기해 버렸다. 성인이 돼서도 힘든 일이 있으면 엄마한테는 말을 안하고 아빠한테만 오히려 말을 했다.


어린이나 청소년일 때는 혼자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까 엄마의 도움이 꼭 필요했는데 어떤 문제를 가지고 가도 잘 들어주지도 않고 해결하려고 도와주지도 않고, 원칙만 강조하니까 답답해서 엄마한테는 입꾹닫하기 시작했다. 괴로움과 우울함의 시작이었다. 난 도저히 학교에 적응하기 어려운 뇌구조로 태어난 데다가 계속 이사 가고 전학 가니까 어렸을 때부터 알던 동네 친구들도 주변에 없고 마지막으로 정착한 지역에서 제대로 된 친구도 사귀기 어려웠는데 불행하게 학교를 다녔다.


청소년기에 이미 매우 우울하고 위험하다는 것을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분명히 알았고 돌이켜 생각하면 병원도 다니고 상담도 받았으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중학생 때 어느 날은 정신건강의학과에 가보고 싶다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접 인지시켜 줬는데도 내가 엄마가 생각하는 표준과 정상에서 벗어날까 봐 두려웠는지 적기에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기회도 안 줬다.


순응적이고 평범하고 모난데 없고 예민한 구석도 없고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엄마는 본래 정반대의 모습으로 태어난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기를 어쩌면 일부러 거부했다. 특별하게 키우면 어느 날 내가 세상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봐 겁났나 보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나의 예민함과 섬세함을 최선을 다해 맞춰주려 했으면서도, 가장 순응적이고 평범한 아이가 걷는 길만 가도록 인도했고, 그 길이 내게는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던 지옥이었다.


어찌 됐든 엄마는 대부분의 날들에 친절하고 다정했고, 언어적인 소통을 제외한 모든 필요한 것들을 다 필요 이상으로 제공해 주니까 어머니와 편안한 사이었는데, 대화는 안 하고 그저 활동만 같이 했다. 대화는 피상적인 대화만 했다. 그나마 반응이 돌아오는 이야기는 사귀는 사람 얘기여서 남자친구 생기면 그 정도만 업데이트했다.


그러다가 2019년도에 엄마를 가장 친하고 편한 친구에서 혼자 빼버렸다. 나에게 친하고 편한 데다가 소통까지 되는 엄마를 완전히 대체해 버릴 사람이 마침내 생겼었고, 그 사람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보고 실망해서 엄마를 내 바운더리에서 슬쩍 빼버렸다.


어머니의 극단적인 면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듣고 선생님이 어머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인지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고 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 평소에는 엄청 다정하다가 내가 무엇인가를 잘못하거나, 어머니의 기분이 어느 정도 이상으로 상하면 아예 사람을 며칠 동안 없는 사람 취급하고 무시했다. 그렇게까지 혼날 정도로 잘못한 것은 없었는데, 어머니의 원칙에 어긋나면 기본으로 백대 이상씩 맞고 집에서 쫓겨났다고 했다.


온탕 냉탕을 왔다 갔다 했다.


지금은 어머니의 극단적인 모습을 더 이상 볼 일이 없다. 성인이 돼서는 어머니의 원칙이나 기준에서 벗어날 일이 없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모든 결정을 하겠다고 선을 긋기도 했다. 외할머니가 너무 통제적이고 사사건건 지시하는 스타일이어서 거기에 질렸다던 엄마는 나와 동생에게 작은 잔소리는 아예 안 했다. 딱 몇 가지 원칙만 지키면 됐다. 선생님이 엄마는 쉬운 사람이었네라고 했다.


그리고 외할머니와 제대로 딸과 엄마의 친밀한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딸과 대화해야 할지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외할머니가 어머니와 나의 관계에서 열쇠가 되는 주요 인물이겠다고 했다.


어머니의 특성 중 어떤 것이 나와 비슷하냐고 물었다. 2) 희생적이다 -> 그래서 3) 자기 행복을 덜 챙긴다 와 2) 극단적이다 가 조금 비슷한 것 같다고 했다.


선생님은 어머니의 특성으로 말한 것 중 “극단적이다”에 별표를 쳤다.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했다.


나는 누군가를 잘 만나다가 어떤 작은 모습에 실망해서 관계를 싹둑 잘라내고는 했다. 연인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그렇게 싹둑싹둑 잘라냈다. 내 기준에서 누군가가 내게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잘못하면 바로 손절했다. 어머니가 누군가를 손절하는 것은 못 봤는데, 연애할 때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만났던 사람을 미쳐버리게 만들었던 내 모습은 내가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어머니의 태도에서 영향받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특성과 어머니의 특성을 살펴봤는데 어떤 것 같냐고 물었다. 아버지의 특성을 닮은 것은 유전인 것 같고, 어머니의 특성을 닮은 것은 학습인 것 같다고 했다. 선생님이 자기도 그렇게 보인다고 했다.


내 연애가 어렵고 힘들었던 이유는 다정하지 않은 아빠 탓이 7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양육자였던 어머니에 대해 오히려 더 자세하게 들여다봐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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