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에는 에너지가 있고 시간에는 기억이 있다. ”
수도자처럼 생각하기라는 책에 나온 기억에 남는 한 줄이다.
나의 학창 시절의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 같은 서울이지만 한쪽 끝과 끝에 가깝다. 그 장소가 내게 불러일으키는 에너지에서 최대한 멀어지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반영된 선택의 결과이다.
시간이 흘러 다른 기분과 에너지로 살고 있는데도, 한 시절을 나와 공유한 사람들은 나를 그때의 분위기로 기억한다. 어두웠던 시절을 스쳐갔던 사람과 재회해 함께 시공간을 나누다 보면, 다시 문득문득 그때의 내가 되어 움츠려든다.
어떤 사람은 그 무엇에 앞서 인정받고 싶어 하고 어떤 사람은 죽기보다 사랑받고 싶어 한다. 나 역시 자존심이며 자존감이며 나 자신을 지키는 것이며 모두 뒤로 한채 인정이나 사랑과 같은 것을 갈구해 오기도 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욕구는 나 자신을 지키고 싶은 욕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누구의 소리도, 말도 나를 찌르지 않을 고요한 공간. 고요한 새벽 시간에 집을 나서는 것을 좋아했던 이유는 아직 잠에서 덜 깬 조용한 아침을 잠시나마 홀로 누릴 수 있어서였고, 작은 공간이지만 오직 나만의 공간이 생겼을 때 안도했던 이유는 이 공간에서만큼은 원치 않을 때 나를 향한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듣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따금씩 그 고요와 안도감을 사랑받고 싶은 욕구 따위에 져버린 것도 나였지만.
이렇게 조용함을 사랑하는 내가 한때 결혼하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다. 결국 쉽사리 연락도 못하는 사이가 되어버렸지만, 시간이 흘러 생각해 보면 나는 그의 고요함에 안도했던 것 같다.
숨소리와 행동거지가 고요했고, 모자람 투성이인 내 공간에서도 굳이 문제 삼아 내 마음속에 소요를 일으키지 않았다. 예를 들면, 집에 놀러 와 청소상태가 어쩌니 저쩌니 이야기하는 대신 조용히 돌돌이로 바닥의 머리카락을 치워주는 행동 같은 것이었다. 그가 청소를 해주기를 전혀 바라지 않았기에 그 행동이 고마웠던 것은 비교적 사소했지만, 바닥의 머리카락이 거슬렸을 때 입 밖으로 꺼내 얘기하는 대신 그의 불편을 스스로 조용히 해결했던 배려심과 고요함은 몇 년이 지나도 곱씹아보고 더 높이 사게 되었다.
그런 고요한 사람이라면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도, 하루 종일, 몇 날 며칠 붙어있어도 괴롭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드물고 결국에는 대부분의 시간과 공간을 참아내며 보내는 대신, 내 영혼이 숨 쉴 수 있는 도망갈 곳, 틈은 반드시 필요하겠구나 싶다. 지옥은 다른 게 아니라 도망갈 곳이 없는 곳이구나, 원치 않는 빛과 소음에서 도망갈 수 있는 곳이 없다면 그곳이 내게 지옥이겠구나 싶었다.
돈으로 고요한 시간과 나만의 공간을 살 수 있다면 그에 필요한 돈은 꼭 따로 할애해 놓아야겠구나, 여러 욕구 중 하나를 꼭 포기해야 한다면 지옥에 있는 것보다는 평범한 곳에서 덜 사랑받고, 덜 인정받는 것이 나으니 조용한 시공간을 누리고 싶은 욕구만큼은 절대 지켜야겠다, 그게 결국 최소한의 나를 지키는 일이구나 깨닫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