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장염은 영어로 Appendicitis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 나는 런던으로 어학연수라는 것을 떠났었다. 좀 더 진정성 있게 풀어보자면, 대학 졸업으로부터의 도피 및 6개월간의 진한 술파티, 축구 직관과 여행, 끝없는 연애 생활, 그쯤 하도록 하자. 어쨌든 그 해 2월 말, 생소한 도시에 도착해 지하철과 버스 타는 법을 익히고 어학원에 나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주일을 보낸 후 나는 맹장염에 걸렸다.
불행한 이야기는 맹장염에 걸려본 적이 없어 3일간 찜질팩을 배에 넣고 일상생활을 했다는 것이고, 다행인 부분은 허리를 펴기 어려울 정도가 되자 응급실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 맹장염을 주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맹장염을 뜻하는 영어단어는 내 평생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영어단어가 되었다) 응급실이야 원래 그렇겠지만서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이방인에게 런던의 응급실은 문자 그대로 지옥이었다. 경험이 많지 않아 보이는 어린 응급실 간호사는 채혈을 하러 와서 내 작은 체구를 보고 일차적으로 당황했고, 겨우겨우 혈관을 찾아 찔러 넣은 바늘 옆으로 피가 질질 새는 모양새를 보더니 기어코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검사가 끝나고 난 후 수술 일정을 알리러 온 의사는 웃으면서, '아주아주 아주아주 작은 수술을 할 건데, 별 건 아니고 배를 요만큼 찢어서 카메라를 넣은 다음 맹장을 똑 떼어낼 거예요. 별 거 아니죠?'라고 이야기했는데 나는 마치 웃으면서 말하는 저승사자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빠는 엉엉 우는 나를 전화기 너머에서 달래며, 맹장 수술은 별 거 아니지만 낯선 곳에서 혼자 수술을 받는 게 불안하니 빨리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전해 들은 수술 담당 의사는 상큼한 표정으로, 그 상태로 비행기를 탔다간 맹장이 뻥 터질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악몽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나를 응급실 대기실에 앉혀 놓았을 때는 세월아 네월아더니 수술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는데, 외국인이기에 잔인하게 비싼 수술비 결제를 위해 내 카드를 받아간 남자는 내가 수술실로 끌려갈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수술을 앞둔 와중에 카드의 행방까지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고, 덕분에 마취가 내 몸 전체를 장악하기 직전까지 간호사의 손을 부여잡고 '내 카드 좀 찾아주세요.'를 외쳐야만 했다.
그건 그저 간단한 맹장염 수술이었다. 다행히 급성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당시의 나에게는 가장 불행한 사건이었다. 난독증을 불러일으키는 영어 동의서와 낯선 병원의 풍경, 내 언어의 실종, 가족의 부재와 실재하는 고통, 수술 자체에 대한 불안이 한꺼번에 덮쳐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어 나는 의자에 앉아, 침대에 누워 울고 또 울었다.
수술이 무사히 끝나고 약간의 휴식 이후 어학원에 다시 나갔다. 첫날 아침 클래스에서 인사를 나누며 그동안 왜 학원에 나오지 못했었는지를 이야기하는데, 듣고 있던 선생님이 말했다.
"Every cloud has a silver lining."
나는 의미를 물었고, 그녀는 풀어서 설명했다.
"구름이 엄청 많을 때도 해가 뒤에 숨어 있다는 뜻이에요. 해가 뒤에 있으면 빛이 다 보이지는 않지만 구름 가장자리에 라인처럼 조금씩 빛이 보이니까. 아무리 불행한 일이 있다고 해도 언제나 그 뒤에 긍정적인 일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말이죠. 다시 건강해져서 다행이에요."
생각해보니 그랬다. 혼자 응급실 대기실에서 울고 있을 때 아이들을 데리고 온 듯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나에게 말을 걸었었다. 혼자인지, 무슨 일인지, 울면 힘든데 밥은 먹었는지 물었다. 병실로 올라가는 휠체어가 올 때까지 그녀는 내 곁에 있었고 이름과 전화번호를 주었으며 어떻게 알았는지 내 수술이 끝났을 때 과자와 음료수를 사 들고 병실에 찾아왔었다. 병원에서 만난 생판 모르는 외국인을 위해 그녀는, 할 수 있는 모든 친절을 베풀었다. 보통은 진통제만 주고 집에 보내는 일이 부지기수라는 영국의 병원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수술을 받았고, 겁을 잔뜩 집어먹은 나를 안심시키고자 담당 의사는 쾌활하게 농담을 해주었으며, 수술 내용을 설명하러 온 의사는 제정신이 아닌 한국인을 위해 쉬운 단어들을 골라 천천히 이야기했다. 구름 뒤편으로부터 빛이, 잔잔하게 새어 나오던 날이었다.
그 후 6개월간의 런던 생활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 중 하나가 되었다. 도시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났으며 우중충한 하루를 슬퍼하기보다 5분의 햇빛을 기뻐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배웠다. 나는 그때 병원에서 손목에 감겨 있었던 환자 태그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아픔이 덮쳐올 때, 어딘가에 빛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위해서. 예상치 못한 불행이 내가 있는 곳을 휩쓸 때도, 크고 작은 행운이 내 손끝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