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기산 May 04. 2020

그날의 음악실, 나의 마스터플랜

 학교 4층에 있었던 음악실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의자들을 뒤로 밀어놓고, 앞뒤로 다섯 걸음 정도 움직일 수 있던 무대 옆에 엠프를 놓으니 제법 무대 같았다. 2001년 당시, 가장 잘 나갔던 힙합클럽 '마스터플랜'은 가보지 않았지만 이런 느낌일 거라 생각했다.


 낄낄거리는 얼굴과 무표정한 얼굴이 섞여 있는 아이들 사이에 우리 반 애들도 있었다. 수군대는 소리는 모스부호 같이 띄엄띄엄 정적과 맞물리며 마이크 잡은 손을 더 떨리게 했다. 동아리 누나에게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보냈다. 파나소닉 CD플레이어의 플레이 버튼을 누르니 전설적인 랩퍼 나스의 'NAS IS LIKE'의 비트가 나오기 시작했다. 한 달 동안 이 순간을 준비했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천천히 몸을 흔들면서 내가 썼던 가사의 첫마디를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힙합동아리에 들었던 정확한 이유는 생각나지 않는다. 딱히 힙합을 좋아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사실 중학교까지 관심사는 반에서 스타크래프트 1위를 쟁취하거나, 쟁취한 왕좌에 도전해오는 녀석들을 물리쳐 명예를 지키는 게 전부였다. 내게 중학교는 그런 시절이었다.


 다만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부질없어 보이는 왕좌보다, '인기가 많아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머리도 기르고 엄마를 졸라서 산 잠뱅이 청바지 같은 걸 입고, 거울 앞에서 포즈도 취해보면서 입학을 준비했었다. 마치 데뷔를 앞둔 연습생의 마음으로 고등학교에 가서는 나도 '잘 나가' 보고 싶었다.


 아무튼 입학하고 하루하루 설래이며 보냈던 3월,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스타크래프트 얘기를 하고 있는데, 한 무리의 선배들이 칠판 앞에 섰다. 힙합동아리라고 했다. 신입부원을 모집할 건데, 랩퍼와 비보이로 나눠 오디션을 본다고 했다. 나는 무조건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랩퍼로 합격했다. 노래방에서 2배속 모드로 95점의 기록을 보유했던 필살기, 드렁큰타이거의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로 당당히 합격했으나, 정통 본토 힙합을 추구하던 친구들은 기쁨에 들떠있는 나를 언짢은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쇼미더머니 파이널 우승자의 표정으로 교실에 돌아왔고, 여자애들은 "너 이제 랩퍼야?" 라고 물어봤다.


 동아리에서 친해진 병곤이는 어릴 때부터 힙합을 좋아했고 지식도 해박했다. 나는 나스와 제이지, 맙딥과 우탱클랜 같이 힙합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뮤지션들의 음반을 빌려 들었다. 병곤이는 시디를 빌려주며 아티스트는 어떤 사람인지, 집중해서 들어봐야 할 트랙은 어떤 건지 등을 친절하게 알려줬다. 그게 시작이었다. 나는 원시적인 드럼 비트와 유려한 플로우의 랩으로 어루어진 흑인음악에 빠졌다. 인기를 얻고 싶은 불순한 의도로 들어갔던 힙합동아리에서, 평생 떼어놓기 어려운 취향을 만나게 되었다. 흑인만의 소울, 그들의 음악! 나는 정말이지 랩퍼가 되고 싶었다.


 곧 기회가 왔다. 5월, 학교에서 공연을 하기로 했고 1학년에게도 얼마간의 무대가 주어졌다. 가슴이 쿵쾅 뛰었다. 친하게 지냈던 병곤, 성태와 3인조 팀을 만들었다. 동부 힙합을 이끌던 나스의 명곡 'NAS IS LIKE' 반주에 직접 가사를 써서 공연을 하기로 했다. 딱히 내세울 거리가 없던 열일곱이어서, 주제는 앞으로의 포부와 꿈에 대해 쓰기로 했다. 이른바 '자기계발 랩'.


 평일에 가사를 쓰고 주말에는 공원에 모여 CD플레이어를 틀어놓고 연습을 했다. 벤치에 앉아 무말랭이 무침 만드는 법에 대해 토론하는 할머니들과, 바람 빠진 축구공을 쫒다니는 흙투성이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뮤직비디오에서 본 랩퍼의 손짓을 흉내 내며, 뉴욕에서 온 비트 위에 경기도 일산에 거주하는 고등학생의 포부를 담은 랩을 연습했다. 연습이 끝나면 우리는 편의점에 앉아 컵라면 국물을 앞에 두고, 에미넴과 닥터드레 이야기를 하며 보냈다. 공원에 불던 봄바람과 햇빛은 참 따듯했다.


 힙합은 갱스터 문화의 정수다. 나 역시 엄마가 준 급식비를 횡령해서 눈여겨봐 왔던 힙합 체인 목걸이를 샀다. 문제는 싸구려 도금 때문인지 차고 나면 목에 쇠독이 올라 부어 있었다. 샤워할 때마다 따끔거렸지만 육체의 고통보다 힙합을 추구하는 정신력이 월등히 강했던 때라, 벌겋게 까진 목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고 다녔다. 이 목걸이를 차고 바다 건너 미국 랩퍼들처럼, 애들 앞에서 내 랩을 보여주고 싶었다.


 침대에 누우면 곧 있을 무대가 과거처럼 떠올랐다. 손에 쥔 마이크의 감촉, 나를 보고 있는 우리 반 애들의 얼굴들, 옆에 선 병곤과 성태의 모습이 지나간 기억처럼 생생하게 보였다. 그리고 끊임없는 걱정과 의문들, 그러니까 가사를 까먹진 않을까라든가 좋아했던 진아가 공연을 보러 올까 같은 생각들이 떠오르다 사라졌다. 초등학교 학예회에서 H.O.T의 명곡 '캔디'의 장우혁 역할로 무대에 서 본 이후, 사람들 앞에 나가는 건 처음이었다.


 공연은 토요일이었다. 4교시가 끝나자 우리는 챙겨 간 옷을 가지고, 4층 남자화장실에 가서 떨리는 마음으로 갈아입었다. 음악실에는 동아리 사람들이 분주하게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곧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공연을 보러 아이들이 몰려왔다. 친하게 지냈던 우람이와 택현이는 보이지 않았다. 이 자식들은 분명 스타크래프트를 하러 PC방으로 간 게 분명했다. 나는 진정한 관심의 대상이었던 진아가 왔는지, 얼굴들을 찬찬히 헤아려봤다.


 슬프지만 진아도 없었다. 진아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공연을 준비한 원동력의 6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65퍼센트 정도 맥이 탁 풀렸다. 어쨌든 35 퍼센트 정도 되는 힙합에 대한 열정으로 마음을 추스르고 무대로 올라갔다. 이미 전 순서에 2학년 선배였던 민석이 형이 라킴의 명곡 'When I B On Tha Mic'에 작사한 곡으로 분위기를 띄워놓아 관객은 고조되어 있었다. 우리를 아는 친구들은 "잘생겼다~"라는 식의 조롱과 응원이 섞인 호응을 보내기도 하면서, 어설픈 빅사이즈 힙합 옷을 입고 뻘쭘하게 서 있는 3인조를 반겼다.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많이 떠올리고 기다려왔나. 17년 인생에서 가장 많이 생각하고 기다려왔던 4분이었다. 마이크는 참 무거웠고 차가웠다. 제대로 나오는지 확인하려고 마이크에 "아아~"하고 소리를 내보았는데, 작은 음악실에 내 목소리가 숨길 곳도 없이 꽉 채워졌다. "가사 틀리면 바로 티 나겠구나" 식은땀이 주룩 흐르면서 우리가 준비한 곡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설픈 첫 무대. 우리는 가사도 틀리고 박자도 많이 놓쳤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더 큰 소리를 질러주며 민망함을 덮어줬다. 신났다. 고등학교의 30평 남짓한 음악실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신촌에 있던 힙합의 성지 마스터플랜 무대에 선 느낌이었다. 흥분한 우리는 랩이라기 보단 악에 가까운 샤우팅으로 가사를 질러댔으나, 힙합 신내림을 받은 우리에겐 한 달 동안 고대해 온 기대감의 살풀이와 같은 시간이었다.


 정확히 3분 55초. 우리의 무대가 끝났다. 온몸에 차곡차곡 쌓아놨던 기대와 긴장, 흥분과 설렘의 감정들이 둑이 터지듯 쏴아하고 다 빠져나갔다. 행복하고 뿌듯했다. 뒤풀이로 갔던 무한리필 닭갈비집에서 닭갈비를 우물우물 씹으면서 랩을 한다는 게 신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추가로 시킨 쫄면 사리를 돌돌 말아먹으면서도, 음악실에서의 3분 55초를 몇 번이고 생각했다. 나는 랩퍼가 되기로 결정했다.


 10년 후 마이크 대신 마우스를 잡는 직장인이 되었지만, 그날 이후 새롭게 만난 친구들과 팀을 만들고 몇 번 더 무대에 올라갔다. 모두 나름의 기억과 에피소드가 있지만, 첫 무대의 느낌은 대체 불가한 경험이었다. 무말랭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연습했던 공원과 봄바람의 냄새, 내 무대를 보고 있던 우리 반 친구들의 모습, 급식비를 횡령해 샀던 나의 토템이자 쇠독을 안겨주었던 체인 목걸이, 나무 무대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숨이 탁 막히는 열기로 가득 찼던 그날의 음악실. 여전히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한 나의 첫 무대의 감촉들로 남아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눈물바다에서 스노클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