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의 불이 켜지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종종 마음 한구석에 묵직한 돌덩이 하나가 남는 기분을 느낀다. 뤽 베송의 <도그맨>을 보았을 때도 그랬다. 사회의 가장 낮은 곳, 상처받은 약자를 조명했다는 이야기에 감동하면서도, 그 감동의 실체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나의 이 감정은 과연 그의 삶에 대한 깊은 공감일까, 아니면 내 삶의 안전함을 확인하며 그의 기이한 불행을 흥미롭게 ‘소비’한 대가일까.
문득 19세기의 서커스 천막이 떠올랐다. 그곳에는 ‘프릭(freak)’이라 불리던 이들이 있었다. 남들과 다른 신체, 남들과 다른 사연을 가진 이들은 구경거리가 되어 박수와 동전을 받았다. 관객들은 호기심과 연민이 뒤섞인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안도했다. ‘나는 저렇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들은 프릭의 고통을 통해 자신의 정상성을 확인하고, 그들의 불행을 오락으로 소비했다.
시간이 흘러 21세기가 되었다. 우리는 인권과 존엄을 이야기하며 과거의 야만성을 비판한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낡은 서커스 천막은 사라졌지만, 그 안을 채웠던 관음증적 시선마저 사라졌는가. 어쩌면 우리는 그저 더 세련되고 우아한 서커스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뿐인지 모른다. 푹신한 벨벳 의자와 거대한 스크린, 압도적인 사운드를 갖춘 영화관이라는 이름의 서커스장으로.
현대 영화들은 "게이", "트랜스젠더", "드랙퀸" 등 사회적 소수자를 스크린의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가시성’을 확보하고, ‘진정한 조명’을 통해 사회적 편견에 맞서겠다는 선한 의도를 내비친다. 물론 그 의도는 숭고하다. 보이지 않던 존재를 보이게 하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진보다. <문라이트>와 같은 걸작은 스크린이 어떻게 한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 우리 모두를 연결할 수 있는지 증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류 상업 영화의 문법은 종종 그 선한 의도를 길 잃게 만든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획자는 ‘다름’이 얼마나 팔기 좋은 상품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소수자의 복잡다단한 인간적 고뇌보다는, 그들의 정체성에서 비롯된 트라우마와 고통, 기이함이 더 자극적이고 홍보하기 좋은 소재가 된다. 결국 카메라는 그들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보다, 안전한 거리에서 그들의 ‘특이함’을 관찰하는 구경꾼의 시점을 유지한다.
그렇게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대신, 손쉬운 연민과 감동을 파는 상품이 된다. 관객은 2시간 동안 소수자의 고통을 안전하게 체험하고, 눈물 몇 방울과 함께 ‘나는 차별하지 않는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만족감을 얻어간다. 이것이 과연 서커스 천막 안에서 동전을 던지던 관객의 마음과 본질적으로 얼마나 다른 것일까.
결국 문제는 스크린 속 그들이 아니라, 스크린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온다. 나의 시선은 연대인가, 관음인가. 나의 눈물은 공감의 증거인가, 소비의 흔적인가. 영화는 우리에게 타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을 열어주지만, 그 창을 통해 무엇을 볼지는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영화관의 불이 꺼지고 다시 이야기가 시작될 때,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나는 한 인간의 우주를 마주할 준비가 되었는가, 아니면 그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우아한 서커스 객석에 앉아 새로운 구경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그 답을 찾는 과정이야말로 우리가 영화를 보고, 타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