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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조 Nov 02. 2019

짐 싸기의 미학

두 번째

짐 싸기. 


방에 비하자면 터무니없이 작은 가방 안에 중요한 것들을 알맞게 추려 넣는 일은 항상 간단하지 않다. 나는 오래도록 여기서 저기로 떠돌며 산 편이라 짐 싸기에 그럭저럭 익숙한 편인데도 매번 새롭게 난관에 봉착한다. 대체 겉옷 하나가 왜 이리도 두꺼운지, 챙겨야 할 자잘한 것들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매번 투덜대기 일쑤다. 그리고 양쪽 다 배를 불룩하게 내민 캐리어를 온몸의 무게를 실어 억지로 잠글 때면 거의 졸도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 


뭐 넣은 것도 얼마 없는데? 책을 아마 책장 한 칸만큼 챙겼을 것이다. 

정말 필요한 것만 넣지 않았나? 과연 여행길에 굽 있는 부츠 따윌 신을 거라고 맨 정신에 생각한 걸까? 

그래도 까먹은 건 없겠지?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해서 가방을 여는 순간 마법처럼 꼭 잊고 온 물건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들은 가장 쿨한 짐 싸기 비법은 속옷과 충전기만 챙기고 나머지 필요한 건 모두 현지에서 조달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두둑한 현금이나 신용카드를 함께 챙긴다는 전제가 따라붙겠지만 말이다. 대체로 평균적이거나 평균에 못 미치는 예산으로 여행을 떠나는 (나같은)사람이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한 바리바리 싸갈 수밖에 없다. 


근래 짐을 쌀 일이 꽤 자주 있어서, 짐을 매번 챙기고 다시 가져와 풀고 또 챙기는 일련의 과정을 좀 고민해보게 됐다. 어떻게 보면 짐을 싼다는 것은 인생을 물질적인 면에서 요약정리하는 셈이다. 멀리 떠나든 가까운 곳에 잠깐 다녀오든 물건의 우선순위를 매기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떤 물건들은 내가 가져가지 않으면 어디서도 구할 수 없고, 또 어떤 것들은 목적지에서 그럭저럭 비슷한 것을 구할 수 있다. 대체 가능한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구분된다. 내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순간이다. 때때론 내가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그저 애착이지 필요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그리고 짐을 싸다 보면 내가 무엇에 낭만을 갖고 사는지를 외면할 수 없이 마주하게 된다. 여행 가이드도 아닌 두껍고 무거운 양장 소설책, 관광객의 고된 일정을 소화하기엔 적절하지 않지만 가을날씨엔 완벽한 원피스, 그 원피스에 정확히 어울리는 굽 있는 신발, 터무니없이 크고 무거운 향수병… 목록은 끝이 없다. 


내 여행엔 과분한 낭만들을 필수품들 사이에 구겨 넣는 일. 그렇게 구겨 넣다가 비로소 그것들이 이 가방 안에는 들어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결국 남겨두고 떠나게 되는 일이 늘 벌어진다. 짐 싸기는 그래서 매번 나를 시험에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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