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고백하건대 나는 십 대 초반부터 패션잡지의 열렬한 구독자였다.
당시엔 보그걸, 엘르걸(아마 지금은 폐간된 걸로 안다) 등의 십 대-이십 대 독자용 패션잡지가 있었다. 매달 용돈을 쪼개어 그것들을 사서 기숙사의 친구들과 돌려보는 것이 몇 안 되는 낙이었다. 잡지 속의 예쁘고 화려한 옷들은 십 대 여자애들의 혼을 빼놓기 충분했다. 우리는 그 잡지 안의 모든 정보를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며 옷과 화장품뿐만 아니라 그런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동경을 키웠다.
하지만 패션잡지를 한 번이라도 들춰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잡지에 나오는 옷들 옆에 적힌 정보를 보면 그것은 평생 한번 손이나 스쳐볼까 싶은 터무니없는 가격표를 달고 있다. 아마 십 대일 모델이 입은 깜찍한 원피스를 보고 너무 예뻐서 구석을 보면 어김없이 모델이 입은 원피스, 프라다, 250만 원 따위가 적혀있다. 어린 시절부터 궁금했었다. 정말 이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은 이 잡지의 타깃인 십 대들이 250만 원짜리 원피스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제는 패션잡지의 열렬한 구독자는 아니지만, 가끔 병원 대기실 같은 곳에서 패션잡지를 집어 들면 여전히 다를 바가 없다. 코트. 막스 마라. 240만 원. 구두. 입생 로랑. 70만 원. 핸드백. 구찌. 300만 원. 이런 식이다. 어릴 땐 어른이 되면 그런 것들을 턱턱 사는 사람이 되는지 궁금했었는데, 어른이 되고도 그런 것들은 여전히 요원할 뿐이다. 내가 나이를 더 먹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얼마 전 하퍼스 바자에 쓰인 칼럼을 읽었다. ‘우아한 가난의 시대’. 아마 <쇤부르크 씨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에서 따왔을 제목은 그야말로 아이러니의 극치를 보여준다. ‘가난’이 ‘우아한’으로 수식되는 것이야 말로 패션잡지의 수사법 그 자체 아닌가. 예전 ‘보그체’라며 비웃음을 사곤 했던—시크하고 모던하며 아방가르드한 스타일—외래어 범벅의 수사법과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우리 세대가 집단적으로 망각하고 있는 것은, 가난이다. 사실 우리는 돈이 없다. 놀라울 정도로 말이다."
여기서 정말 놀라운 건 이 글을 쓴 사람이 정말 놀랍도록 진짜 가난을 모른다는 것이다. 겨우 연말정산 기간에나 놀라는 정도의 돈 없음을 가난이라고 부르다니, 그야말로 도둑맞은 가난이 아닌가. 가난이란 연말정산 기간에만 반짝 위기감을 주는 종류의 귀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가죽처럼 벗을 수 없는 것이고, 눈을 뜨건 감건 숨 쉬는 것처럼 항상 지속되는 상태이다. 실평수가 한 평도 안 될 방에 침대와 책상과 샤워부스가 같이 놓여있는 공간에 살다 보면 연말이 아니라 매일이 가난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그다음에 오는 말은 더 기만적이다.
"요는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흔들리지 않는 독자적인 삶의 양식을 가져야 한다는 거다. 좋은 것들을 선택할 수 있는 취향과 안목, 그리고 약간의 용기가 있다면 풍족하지 않은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할 수 있다."
좋은 것은 오로지 가진 자만 선택할 수 있다. 가난은 단지 돈 없음이 아니다.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부재다. 가진 알량한 돈으론 뭘 살지 애당초 선택할 수 없다. 그러니 애당초 삶의 양식이란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난’ 그 자체가 삶의 양식이니까. 돈이 없어 삼각김밥으로 밥을 때우는 사람에게 고추장 비빔밥 삼각김밥을 살지 참치마요 삼각김밥을 살지 선택하는 것이 '취향과 안목'은 아닐 것이다.
패션잡지의 그 수많은 브랜드 옷, 가방, 신발들. 그런 것들이 패션잡지 에디터들의 현실감각을 망쳐버렸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건, 이 칼럼을 쓴 사람은 가난을 모른다는 것이다. 월급통장이 간당간당할 때까지 비싼 옷을 사고 유기농 식료품으로 한 끼를 만들어 먹고 나서 통장을 보니 너무 적은 돈이 남았다고 그걸 가난이라 부르진 않는다. 그건 현명하지 못한 소비의 당연한 귀결일 뿐이다. 탕진을 권하는 사회에서 그에 일조하는 사람들이(패션잡지가 소비주의의 선봉부대임을 부인하진 않겠지) 감히 가난까지도 라이프스타일로 미화하려들다니, 실로 오만하기 짝이 없다.
이제 나는 왜 패션잡지의 모든 것이 그토록 터무니없이 비싼지 알 것만 같다. 그 패션잡지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백 몇십만 원짜리 코트나 원피스를 사면서도 그것을 탕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 그러고도 잔고가 간당간당하게라도 남을 사람들에게만 패션잡지는 의미가 있다. 그러니 이 칼럼이 하퍼스 바자에 실린 것도 썩 놀랍진 않다. 그들에게 가난이란 그저 ‘생각보다 부족한 통장잔고’에 지나지 않을 테니.
그렇다면 잘못은 역시 감히 이 칼럼을 읽을 자격도 통장잔고도 되지 않는 내가 이 칼럼을 읽어버린데 있는 것이 틀림없다. 저런, 죄송합니다. 아마 그 세계의 가난과 우리 세계의 가난은 의미가 다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