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처럼 살 순 없어도 에세이는 쓸 수 있지
“어쩌면 에세이는 작가의 커다란 TMI가 아닐까 싶어요.”
오랜만에 만난 아영에게 말했다. 에세이는 이제 못 쓸 것 같다고. 우리 앞에 준비된 맥주 캔은 따지도 않았지만 나는 벌써 취한 사람처럼 속내를 덤덤하게 털어놨다. 그러자 아영은 냉큼 책 한 권을 건넸다. 언니, 이 책 한번 읽어봐요. 강한 사연, TMI가 없어도 글 쓸 수 있다니까요.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하다면> 하루키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여행을 하며 쓴 책이었다. 굴곡 있는 사연이 없어도 근사하게 글을 쓸 수 있다고, 재밌을 수 있다고. 아영은 자신이 얼마나 감탄하며 책을 읽었는지 강조했다. 그리고 우리는 하루키의 팔자에 대해서 논했다. 봄이면 러닝 하기 좋은 도시를 찾아, 공항으로 향하는 하루키의 체력을. 세계 곳곳을 쏘다니며 글 쓰는 작가의 풍요를.
바로 다음 날 위스키를 마시게 된 건 우연이었다. 낮에는 책을, 밤에는 술을 파는 마산 ‘화이트 래빗’에서 달님을 만나기로 했고. 하필이면 가게 입간판에 ‘위스키’가 적혀 있었다. 커다란 백팩에는 하루키가 쓴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이 들어있었으니, 거침없이 주문했다. 낮 2시 10분에 먹기에는 딱 봐도 무리인 위스키를.
사장님은 위스키 입문자가 마시기 좋을 거라면 달 모어 15년 산을 건넸다. 이걸 마시면 하루키처럼 쓸 수 있을까. 한 모금 삼키자 속이 타들어 갈 것처럼 뜨거웠다. 함께 건네주신 해바라기 씨앗으로 속을 달래며 책을 펼쳤다. 위-스-키. 발음만 해도 고급스러운 단어가 곳곳에 박혀 있는 하루키의 책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지성이 흐르는 문장 사이로 위스키 향이 실제로 났다. 이걸 어떻게 몇 잔이고 마실 수가 있지.
유려한 문장들을 눈으로 훑다가 멈춰서 노트북을 꺼냈다. 하루키처럼 살 순 없어도, 내 이야기를 쓸 수 있잖아. 아무리 하루키라도 대한민국 경남 창원에서 아이 셋 키우며 동네 공원을 배회하는 여자 이야기를 나보다 잘 쓰진 못하겠지. 글 쓸 결심이 선 나는 앞에 앉은 달님에게 제목을 넌지시 말했다.
“제목 이거 어때? 하! 루키루키~”
하루키와 레드벨벳 <루키>의 오마주라고 하기에는 많이 조악한 제목. 달님은 대답 대신 가만히 손으로 엑스자를 만들었다. 싱거운 농담을 안주 삼아 나는 마지막 남은 위스키를 쭈욱 털어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