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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미 Jul 08. 2022

등원 후, 아이스라떼 (시럽 한 번 추가 잊지 마세요)

하루키처럼 살 순 없어도 에세이는 쓸 수 있지



 제때 화내는 사람이 부럽다. 무례한 말에 곧장 응수했던 적이 인생에 몇 번이나 있던가. 대부분은 말문이 막힌 채로 있다가 돌아서서 오는 길에 후회한다. 왜 바로 화내지 못했냐고, 왜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냐고. 집에 와서 속앓이를 하다가 친구나 남편에게 털어놓을 뿐이다.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닥친다면, 참지 말고 꼭 화를 내야지. 무례한 사람에게 일침을 날려야지. 다짐해도 그때뿐이다.


 글로나마 속을 풀 수 있다는 건 다행인 일이다. 인생의 부조리, 눈뜨고 당하는 차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구구절절 장황하게 늘어놓아도 빈 종이는 나무라지 않는다. 빈 화면은 지겹다고 그만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쓰고 덮어두면 그만이다. 나 같이 소심한 사람에게는 말하는 것보다 써서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게 화낼 수 있는 방법이다.


 글로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나의 사적이고도 오랜 역사다. 특히 말이 안 통하는 사람에게 글을 보내는 건 효과가 있었다. 사춘기 때는 남동생과 많이 싸웠다. 우리는 서로 교차할 수 없는 평행선 같은 남매였다. 나는 방과 후에 영화관과 영상실을 찾는 예술충이었고, 동생은 발목 줄인 바지를 입고 친구들과 시내를 활보하는 ‘좀 노는 애’였다. 서로 노는 방법이 달랐을 뿐인데 우리는 격렬하게 부딪혔다.


진득한 대화 같은 게 통할 리 없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편지에다가 써서 동생의 가방에다 넣어두었다. 하지만 동생은 학교에서 가방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편지를 아주 늦게 발견하곤 했다. 가방에서 오랜 시간 숙성된 꾸깃한 편지를 읽은 동생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누나는 사람 조지는 방법이 다른 사람이구나.’


 남편과 결혼 후, 동생은 이 이야기를 술자리에서 털어놓았다. 그러자 깊이 공감하는 표정으로 남편이 잔을 내밀었다.


“처남, 그때는 편지였나? 지금은 신문에다가 쓴다.”

“더 업그레이드 됐네요.”


 이럴 때 동생과 남편은 아주 죽이 잘 맞는다. 어쨌든 두 사람이 나의 평생 뮤즈가 될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다.  


 술 먹고 속풀이 해장이 필요한 것처럼, 글쓰기는 내 삶의 독을 빼는 일이다. 이왕이면 나라는 거대한 자아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세상으로 뻗어나가고 싶은 바람이지만, 언제나 딱 이만큼이라고 한계를 확인받는 기분이 든다. 글 쓸 때마다 내 비좁고 편협한 속을 확인받는 것은 잔인하지만, 나를 알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좀 낫다. 자, 여기까지 참을성 있게 읽은 사람이라면, 아래의 밴딩이 소갈딱지 같은 일화를 읽는 일도 가능한 대인배라고 생각하여 털어놓는다.


 며칠 전의 일이다. 거래처 사장님 어머니의 부고를 접하고, 저녁에 택시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세 아이 밥을 챙겨주고, 씻기고 나니 내가 씻고 준비할 시간이 빠듯했다. 퇴근한 남편과 바통 터치하고 빠르게 택시를 잡았다. 퇴근 시간이라 차가 조금 밀렸다. 도착한 장례식장에서 상주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밥을 먹었다. 어려운 장소였지만, 허기가 몰려왔다. 밥을 먹고 있는데 지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장례식장에서 밥을 너무 잘 먹는 것도, 좀 그렇지 않니?”


 농담이라고 던진 말이었는데 돌부리에 툭 걸려 넘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웃으며 ‘여기 국이 맛있네!’하고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지인은 같은 의미의 말을 한 번 더 했다. 그때부턴 속이 상했다.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왜 한마디 받아치지 못했지 싶었다. 차려주는 밥을 깨작깨작 먹어야만 장례식장의 매너가 완성되는 것인가. 어렵게 시간을 내서 장례식장의 손님으로 참석해서 밥 한 그릇 잘 먹는 게 무슨 실례되는 일이란 말인가. (반찬을 더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글을 쓰고 나니 속이 좀 시원하다. 아마도 세상 쿨한 지인은 높은 확률로 잊어버렸을 것이다. 어쩌면 정말 웃기려고 한 말일지도 모른다. 직접 말해주지 않으면 평생 눈치도 못 챌 일. 면전에 대고 ‘이제 그만해.’ 받아치지 못하고 뒤늦게 글로 마음을 푼다. 내 마음이 태평양 같았다면 이런 글을 쓰지도 않을 것이다. 개미 털보다 더 작은 내 속에 치얼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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