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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미 Nov 07. 2021

리포터의 조건

창원에 살고 방송국 다녀요


      

 어느 날,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가 딸이 사진 하나를 발견하고는 깔깔 웃었다. 사자 갈퀴처럼 부푼 파마머리를 하고 브이를 하는 내 모습이었다. 파란 등산복을 입고 해맑게 웃는 모습.      


“이거 엄마 맞아?”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돌아보는 딸의 손에서 잽싸게 사진을 뺏었다. 마치 하늘에 떠다니는 뭉게구름처럼 몽실몽실한 파마. 마치 브로콜리, 동충하초를 연상케 하는 헤어 스타일.      

 산행 리포터로 활동했던 시절에 찍은 사진이었다. 처음 방송국 일을 시작할 때는 자료 조사 및 섭외를 담당하는 ‘스크립터’ 일을 했다. 어느 날 담당 피디인 용 피디는 리포터를 제안했다.


 리포터. 한 번도 꿈꿔 본 적 없는 직업이었다. 물론 용 피디가 그런 제안을 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용 피디는 “가을 산 정말 멋지죠?” 같은 진부한 멘트를 날리는 리포터 말고 독특한 개성을 가진 리포터를 원했다. 그래서 방송 처음 해보는 일반 시민을 섭외하기도 하고, 급기야 막 방송 일을 배우기 시작한 내게도 제안을 한 것이다. ‘으하하하’ 복식 호흡을 하며 내는 듯한 웃음소리가 독특하고 가끔 날리는 멘트가 재밌다는 것도 이유였다.  


 다만 내가 굉장히 평범한 외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 망설여지는 점이었다. 용 피디는 방송은 비주얼이 중요하니, 개성을 한번 만들어 보자고 했다. 대체 하루아침에 없던 개성을 뚝딱 만들 것인가. 마스크팩을 얹어 얼굴 부기는 좀 가라앉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팔다리를 길어지게 만든다던가, 콧대를 쭉 세우게 할 수는 없었다.

 

 용 피디는 헤어에 힘을 주자고 했다. 그래서 촬영 당일. 나는 마산 창동의 한 미용실에서 하루짜리 파마시술을 받았다. 미용실 의자에 앉자, 원장님은 “어떻게 해드릴까요?”라고 물었다. 여느 티브이 출연자들처럼 우아한 ‘드라이’를 예상했겠지만 다른 대답을 해야 했다.        


“원장님. 세게 볶아 주세요. 완전 튀는 파마로.”    

 

 그렇게 해서 두 번 파마 시술을 했다. 한 번으론 안 나오는 컬이라고 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아주 가관이었다. 보자마자 단번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초원을 달리는 사자의 갈퀴가 연상됐다. 뽀글뽀글 강하게 볶은 파마는 걸을 때마다 둥실둥실 흔들리는 게 느껴질 만큼 풍성한 컬을 자랑했다.       


 인위적으로 만든 개성은 창동 시내 거리에서는 뜨악한 스타일이었지만, 산에서는 통했다. 화왕산의 흔들리는 억새밭에서 유유히 걸어 다니는 사자 머리. 10여 명이 함께하는 산행에서 나를 찾기란 쉬웠다. 파마 덕분에 남들보다 두 배는 머리가 커 보였고, 덕분에 존재감도 확실했다. 남들과는 다른 리포터의 개성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내가 리포터로 출연한 ‘갈 데까지 간다’는 TV 프로그램 <얍 활력천국>에 들어가는 6분 분량의 코너였다. 산에서 하룻밤 텐트 치고 자고 오는 일명 ‘비박’이 소재였다. 지금은 산에서 불을 지펴 취식을 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었지만, 2000년대 초만 해도 가능했다. 용 피디는 산을 좋아하는 자신의 욕망을 프로그램에 그대로 투영시켜 코너로 만들어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산도 타고, 일도 하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이었다.      


 용 피디는 자신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영상을 찍고, 연출을 도맡았다. 연출이랄 게 크게 없었다. 그냥 산을 오르고, 가끔 인터뷰를 하고, 노는 모습을 찍을 뿐이었다. 노는 건지 일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아리송했다. 하지만 초보 산행 꾼인 나는 방송은 둘째 치고, 그냥 산을 타는 것만 해도 고달팠다. 겨우 두 장 짜리 원고를 달달 외웠지만 숨이 차서 멘트도 순조롭게 나오지 않았다. 멘트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버벅거리는 멘트 덕에 용 피디는 ‘노래’라는 카드를 꺼냈다. 분량 뽑아내기에 노래만큼 좋은 것도 없었다.      


 화왕산 정상에 서서 심수봉의 ‘사랑밖에 난 몰라’를 불렀다. ‘오늘은 울었지만, 내일은 행복할 거야’ 열창했다. 내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산을 오르는 산꾼들과 흔들리는 억새밭과 이름 모를 사람들의 웃음과 땀이 인서트로 들어갈 것이었다.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가장 먼저 잠자리를 골랐다. 땅에 솟아오른 돌멩이는 치우고 등이 배기지 않게 돗자리를 깔고 침낭을 설치했다. 산의 밤은 금방 찾아왔다. 노을을 즐길 새도 없이 까만 밤이 됐다. 어둠이 찾아오자 급격히 추워졌다. 훅 떨어지는 온도에 맞서듯 사람들은 술을 마셨다. 용 피디는 품에 소중하게 지니고 있던 테킬라를 조금 나눠주었다. 마치 8,849m 히말라야에라도 온 것처럼, 우리는 독주를 비장하게 나눠 마셨다. 망할 낭만이 가득한 밤이었다. 낮에는 어색했던 사이도 밤에는 친근하게 느껴졌다. 용 피디는 촬영용으로 가져온 조명을 나이트에 온 거처럼 현란하게 흔들고, 모두들 낮에 흘린 땀을 술로 채우듯 가져온 술을 모두 비워냈다. 이것은 일을 빙자한 분명한 놀이였다.      


 지금야외에서 캠핑이나 차박 열풍인 시대에 살지만 그때만 해도 비박은 흔하지 않은 여가생활이었다. 내가 겪은 비박의 가장 신기한 점은 아무리 먹어도 아침에 붓지 않는다는 것이다. ‘리포터라는 명분을 까마득히 잊고 왕왕 마시고 먹던 나는 다음  거울을 보고 놀랐다. 대충 쌍꺼풀 하나는 없어졌을 만큼 부었거니 했는데 말짱했다. 아침부터 시래깃국으로 태연하게 해장하던 산꾼들은 ‘산에서 마시는 술은 숙취가 없다 입을 모았다. 처음 느낀 산의 신비였다.      


 이렇게 찍은 방송이 2주, 길게는 3주씩 방송되었다. 화왕산, 설악산, 거제 망산을 거쳐서 전국의 산들이 방송을 통해 소개되었다. 이렇게 리포터로 티브이에 출연한 내 모습을 보고는 몇몇 연락이 왔다. 몇 년 전 연락이 끊긴 고등학생 동창이었다. ‘네가 티브이에 나오다니, 반갑고 기쁘다’가 아니라 ‘네가 대체 왜 거기서 나와???’ 하는 뜨악한 반응이었다. 나는 멋쩍게 웃었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친구의 어머니는 실물보다 덩치가 더 커 보이는 화면빨 덕분에 ‘수미가 많이 커졌더라.’는 반응을 보내오셨다. 그리고 실제로 나를 보시고는 예전 그대로라고 안심하셨다. 화면 속 움직이는 나는 정말로 덩치가 1.5배는 더 커 보였다. 파마머리가 한 몫했다.


 리포터 생활은 길게 가지 않았다. 언제라도 들이대는 카메라에 뻔뻔하고 자연스럽게 대응해야 하는데 나는 쉽게 굳었다. 사석에서는 아무리 까불며 이야기해도 카메라를 들이대면 표정이 얼었던 것이다. 덕분에(?) 리포터 생활은 막을 내렸다. 하산 후의 나를 기다리는 건 구성작가의 삶이었다.     



이 정도 머리 볶아야 리포터를 한다 믿었던 시절의 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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