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미 Nov 12. 2021

방송작가의 자리

창원에 살고 방송국 다녀요

        

 어느덧 방송 일을 그만둔 지 10년이 흘렀다. 방송 일을 그만둔 이유는 다양했다. 위염과 장염을 달고 살 정도로 신경 쓸 게 많았던 방송 일의 특성, 노동량에 비해 턱없이 적은 원고료, 잦은 파업과 척박한 노동환경. 거기에 오롯한 내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더해져 확실히 마음을 먹었다.   


'다시는 방송일 안 해.'


 하지만 ‘절대’와 ‘다신’이라는 말은 인생에선 자신해선 안될 말이었다. 어느 날, 친하게 지내던 진행자 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언니는 명랑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수미야, 다시 방송 일 안 해볼래?’ 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정중하게 거절할 수 있을까? 적당한 말을 고르는 동안 언니는 계속 솔깃하는 말을 던졌다.


‘재택근무 가능’,

‘월 수입 200 보장’,

‘짧은 방송 분량’,

‘좋은 스텝’


 그중에 가장 솔깃하는 말은 ‘예전 일하던 빡센 환경과는 다름’이라는 말과 ‘4개월 단기 알바’라는 말이었다. 건강 문제로 휴식기를 가지는 작가의 대타로 일하는 것이니 4개월만 일하면 된다는 말이었다. 차츰 마음이 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좀 힘들더라도 4개월만 하면 끝나니까 해 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혼자 글 쓰는 시간이 길었던 터라 새로운 사람들과 협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던 참이었다.

   

 ‘그럼 죽었다 생각하고 4개월만 해볼까?’     


 그렇게 10년 만에 다시 방송국에 발을 디뎠다. 방송사 로고가 적힌 건물이 멀리서 눈에 들어왔다. 오래전 잊고 있던 감정이 올라왔다. 스물세 살, 처음 방송국 문을 열고 들어간 날. ‘방송국’이라는 세 글자가 주던 설렘을. 깔끔한 세트장과 무거운 ENG 카메라를 들고 분주히 움직이는 스텝들을 보면서 느꼈던 알 수 없는 벅참. 이번에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일을 하게 될까.

 

 새로운 방송국의 문을 열었다. 취재를 나가는 기자와 카메라 스텝을 스쳐 안내데스크 앞에 섰다. 안내 데스크에 서서 방문자 기록 쓰는 종이에 방문 사유를 <면접>이라고 썼다. 그리고 사내 카페에 앉아 함께 일할 사람들을 기다렸다. 나는 어떤 PD와, 작가, 스텝과 함께 일하게 될까. 우리는 어떤 얼굴로, 어떤 목소리로 대화하게 될까. 괜스레 첫인상이 신경 쓰인 나는 휴대폰 화면을 들어 비친 얼굴을 들여다봤다.


 무사히 면접을 치른 나는 일주일 후, 줄줄이 선 농기계를 배경으로 한 세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망의 첫 촬영은 야외에서 진행됐다. 스텝들은 카메라를 세팅하고, 분장을 하고, 프롬프터에 원고를 입력하고, 제각기 분주했다. 오랜만의 촬영장이 어색한 나는 K 작가님을 졸졸 따라 움직였다.


새벽 6시 40분에 차를 타고 도착한 합천은 창원보다 기온이 더 떨어졌다. 따뜻하게 입고 오라는 전 날 K 작가님 메시지 덕분에 나는 목도리까지 두른 채였다. 모든 스텝과 출연자가 모인 10시쯤 녹화가 시작됐다. 해당 회차의 원고를 쓴 K 작가님은 의자 두 개를 가리켰다. 우리는 여기에 앉아 촬영을 지켜보면 된다고. K 작가님이 노트북 화면과 프롬프터를 연결하는 동안 나는 의자 두 개를 다소 감격한 눈으로 쳐다봤다.     

 

 10년 전 내가 맡은 프로그램도 야외 촬영이 기본적이었다. 4~5시간씩 연이어 진행되는 야외 촬영에서 앉아있는 사람은 출연자뿐이었다. 거의 모든 스텝이 서서 촬영 현장을 지켜봤다. 구성작가인 나는 별 탈없이, 사고 없이 녹화가 끝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늘 긴장된 상태였다. 적당한 타이밍에 출연자를 모셔오고, 필요한 소품이 들어가는지 점검하고, 원고에서 빠진 내용이 없는지 확인하는 일이 촬영 현장에서 방송 작가의 일이었다. 아마 의자가 있었다고 한들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땐 왜 스텝들의 의자가 없냐고 반문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여기가 작가님 자리예요.”     


 K 작가가 가리키는 흰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촬영 현장을 돌아봤다. 대부분의 스텝들이 앉아서 일하고 있었다. 짧게는 네 시간, 길게는 다섯 시간씩 이어지는 촬영을 대비해 다들 따뜻한 옷을 입고, 틈틈이 준비해온 김밥이나 물을 마셔가며 일했다. 다만 프리랜서 외주 감독의 의자가 없다는 게 눈에 띄었다.

 현장에서 모든 스텝의 의자를 준비하기 힘들었겠지만 누구는 서서 일하고, 누구는 앉아서 일하는 건 어떤 기준으로 나뉘는 걸까. FD부터 카메라 감독, PD와 작가, 진행자까지. 모든 사람이 '방송'이라는 목표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일할 뿐인데. 누가 주인이고, 누가 타인인지 의자 하나로 구분이 갔다.


 촬영을 마치고 근처 국밥집에서 뜨끈한 국밥을 먹었다, 아침부터 돌돌 떨었던 몸이 뜨거운 국물 한 모금과 막걸리 한 잔에 풀리는 것만 같았다. 한 분이 오랜만의 촬영에 대한 소회를 묻자 나는 대답했다. 현장에 작가석이 있어서 놀랐다고, 그게 감동적이었다고. 진지한 나와 달리 다들 깔깔거리며 웃었다. 마치 세상 당연한 일에 감동한 아이를 보는 것처럼. 

 나는 상상했다. 촬영 현장에 작가가 앉을 의자를 놓아달라고 요구하는 어느 얼굴 모를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언젠가 '방송작가'라는 이름을 달고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을 미래의 얼굴도. 





 




          

매거진의 이전글 리포터의 조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