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에 살고 방송국 다녀요
방송일에선 섭외가 반이라는 생각을 한다. 방송 콘셉트와 취지에 맞게 마땅한 진행자를 물색하고, 게스트를 섭외하는 것만으로도 방송 구색이 얼추 맞춰진다. 때로는 얼마나 개성 있는 인물을 섭외하느냐에 따라서 한 회의 재미가 당락 지어지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서울 방송은 유리한 면이 있다. 끼도 외모도 출중한 연예인들이 기본적인 출연자로 나오니까. 화려한 아이돌, 톡톡 튀는 유머를 가진 예능인, 저명한 지식인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시청자의 관심을 끌 수 있다.
그렇다면 연예인을 섭외하기 힘든 지역방송은 시청률 전쟁에서 무엇으로 승부할 수 있단 말인가. 서울방송에선 엄두 못 낼 ‘남다른 기획’만이 살아남을 길이다. 그래서 프로그램 개편 때가 되면 아이디어 회의를 한다고 몇 박 며칠을 머리 싸매고 회의실에 들어갔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커피 서너 잔은 기본이었다. 때로는 이 스트레스를 감당할 길이 없어 다량의 알코올을 섭취하기도 한다. 오죽하면 방송국에서 퇴근하면서 대리 기사님을 부르는 사태까지 발생하기도 한다. 무엇을 만들지 결정했다면 남은 것은 섭외와의 싸움이다.
고로 구성력과 더불어 섭외하는 능력은 방송작가 능력치를 시험하는 기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다시 방송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도 섭외였다. 어렵게 알게 된 휴대폰 번호로 전화를 걸기 전은 얼마나 떨리는지, 당사자가 눈앞에 없음에도 저절로 등이 굽어지고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섭외 고충을 함께 일하는 J 작가에게 말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방송) 시작도 끝도 결국에는 전화질이지, 뭐”
‘전화질’이라는 말 듣고 씁쓸한 웃음이 흘러 나왔다. 맞다. 목수기 톱질, 망치질로 먹고사는 것처럼 전화는 방송작가에게 중요한 일의 도구다. 때로는 글보다 전화질로 먹고사는 직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방송에 출연할 사람을 섭외하고, 방송이 나간 후 감사 인사를 드리는 것까지. 모두 방송 작가의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스텝이 적어 멀티를 요하는 지역 방송작가에게 전화질은 숙명이다.
J 작가는 방송국 내에서 가장 경력이 오래된 작가였다. 옆에서 지켜본 J 작가는 섭외의 왕이었다. 연륜에 맞게 섭외의 기술을 꿰고 있었다. 부담스럽지 않게 대화를 주도하고, 자연스럽게 섭외로 넘어갈 수 있도록 공손함과 능청맞음이 적절하게 배합되어 있었다. 목소리 톤은 또 얼마나 안정적인지. 절대 안 되는 일도 J 작가와의 통화를 거치면 ‘한번 해볼게요’ 단계로 넘어서는 기적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M 작가는 세상 모든 어르신들이 어머니고 아버지다. "어머니~" 하고 와락 안기부터 하는 건 M 작가의 필살기다.
이렇듯 작가마다 섭외 기술이 다르지만, 나의 경우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이다. 섭외해야 할 사람의 전화번호를 알아내면 먼저 문자로 용건과 이름을 먼저 보내 놓고 답장을 기다린다. 물론 예외는 있기 마련이어서 글씨를 읽을 줄 모르거나 문자를 잘 보지 않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는 하루 정도 기다렸다가 전화를 건다. 하지만 급하게 섭외해야 할 때가 왕왕 있다. 그럴 때는 무례를 무릅쓰고 다급하게 전화를 건다.
반대의 상황을 겪기도 한다. 나를 섭외하는 전화가 걸려 올 때다. 대부분 이메일로 강연 섭외 요청이 오지만, 무턱대고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부터 걸려오는 경우도 있다. 모르는 전화번호는 잘 받지 않거니와, 이런 경우 강연료와 강연 시간 등 충분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을 확률도 높다.
역으로 나도 섭외 제안을 받는 입장이니, 전화 섭외할 때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더 신중해진다. 게다가 방송 출연이 흔치 않은 일반일을 섭외해야 하니 조심스러움이 몇 배 더 크다. 기본값을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마음에 둔다. 된다는 확률을 낮게 잡을수록 실망도 줄어드니까.
어떤 날은 며칠 동안 전화만 돌리는 일도 허다하다. 이번에 맡게 된 코너는 <토종 씨앗>으로 농사짓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흔한 모종이 아닌 시할머니에서, 시어머니로- 친정어머니에서 딸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씨앗으로 농사짓는 할머니를 섭외해야 하는 미션. 나는 경남의 토종씨앗 모임과 전국의 토종씨앗 채집단 대표는 물론 생협 관계자들에게 협조를 구하고, 또 그들의 도움으로 알아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익숙하지 않은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입력하고 통화를 누를 때마다 심호흡을 크게 들이켰다.
‘차분히 설명할 것. 거절당해도 실망하지 말 것.’
통화연결음을 들을 때마다 마음에 새기는 말이다. 어렵게 출연자의 전화번호를 알게 되어도, 건강 문제로, 또는 출연이 부담스러워서 거절하는 일도 부지기수니까. 그렇게 2주 동안 토종 씨앗으로 농사짓는 세 분의 할머니를 섭외했다. 가뜩이나 추수철, 농사일로 바쁜 할머니에게 ‘시간’을 허락해달라고 하는 게 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민폐가 아닐까.’ 생각이 들면 마음이 비좁아지고 전화 걸기가 망설여졌다. 하지만 이게 나의 일이라고, 마음을 꿋꿋하게 다잡고 전화를 걸었다.
여유롭게 방송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섭외 리스트가 충분히 쌓여야 했다. 어렵게 세 분을 섭외했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매일 불안과 초조함을 느끼며 잠에 들었다. 방송 일을 시작하고 끊었던 밤 맥주를 다시 마시게 됐다. 맥주 한 잔을 들이켜면 초조하고 다급한 마음이 가라앉고 알 수 없는 여유가 부풀었다. 비록 내일이면 꺼질 패기지만, 맥주 한 캔은 하루치 긴장에 대한 약 처방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