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3가 지하철역에 내려 14번 출구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곧 펼쳐지는 생소하고 시끌시끌한 풍경. 길가에 쭉- 늘어선 귀금속 가게와 의료기기, 보청기를 파는 상점, 옷가게와 약국. 귀금속 가게 안에서는 한 젊은 커플이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반지를 고르고 있고, 그 앞에 펼쳐진 좌판에서는 만 오천 원짜리 시계를 놓고 어르신들 간 신경전이 펼쳐지고 있다. 횡단보도 앞 모퉁이에서는 계란빵과 땅콩과자를 파는 노점이 있고, 중국인 관광객 몇 명이 계란빵을 베어 문 채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중. 땅콩과자를 사 먹을까 하다가 단짝인 호두과자가 없길래 그만두었다.
오늘 아침 기온이 5도까지 떨어졌다더라, 그래도 낮에는 어제보다 좀 더 따뜻할 거래, 새로 산 옷이 지금 같은 계절에 딱 입기 좋네, 나도 같은 걸로 하나 살까. 아내와 이런저런 말들을 주고받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세운광장에 도착했다.
세운상가 앞, 좁고 길게 펼쳐진 광장은 '다시세운광장'이라는 새 이름을 달았다. 완만한 오르막에 인조잔디가 깔렸고, 다른 한 편은 사람들이 앉아 쉴 수 있도록 계단으로 구성된 공간. 따끈한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홀짝거리는 어르신들부터 발에 닿는 촉감이 신기한 듯 한걸음 한걸음 아장아장 걸음을 내딛는 아이까지. 80년이 넘을 세월의 격차를 보드랍게 감싸고 있는 광장. 그 맞은편으로는 수백 년 전부터 저 모습 그대로였을 종묘가 파란 하늘 아래 펼쳐져 있었다.
세운상가 계단을 올랐다. 도청장비와 도청탐지기, 몰래카메라와 위치추적기를 파는 가게. 사람들의 불안과 의심을 먹고사는 가게 옆으로 한 무리의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깔깔대며 호랑이 사진이 프린트된 촌스러운 커피잔을 들고 지나간다. 여기다 여기! 누군가의 목소리를 따라 우르르 '도나스'가게로 들어가는 그들을 눈으로 좇았다.
책방이라는 '공간'을 구상하는 입장에서 이 공간이 어느 '장소'에 있느냐는 고민은 빼놓을 수가 없다. 물론 온라인 채널을 함께 운영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함께일 뿐이지 주력은 오프라인이기 때문이다. 천천히 동네 골목길을 걷다 마주하는 반전, 유리창 너머로 살짝 엿보이는 공간에 대한 기대감, 손끝으로 느껴지는 생소한 문의 촉감, 문을 당기면서 딸려 나오는 다른 온도의 공기, 그것에서 느껴지는 책의 냄새와 커피의 향기, 차분하고 고요하지만 부산스러운 소음은 온라인으로 대체할 수 없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책장에 주-욱 진열되어 있을 저마다의 세상들을 오프라인에서는 살짝 들춰볼 수 있으니까.그것만으로도 오프라인에 책방이 있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주변에 대중교통이 잘 갖춰져 있어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편하게 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대중교통과 조금 거리가 있더라도 길이 너무 예뻐서 천천히 걸으면서 마음이 녹아내릴만한 곳이면 더 좋겠다. 책방 말고도 근처에 가볼만한 명소가 있어서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살짝 들를 수 있으면 좋겠다. 지치고 힘든 하루를 잘 버텨냈을 사람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집밥 느낌이 물씬 풍기는 밑반찬을 파는 반찬가게와 향긋한 빵을 굽는 빵집, 따끈한 어묵과 칼칼한 떡볶이가 있는 분식집이 주변에 있으면 좋겠다.아예 자그마한 재래시장이 근처에 있는 게 낫겠다.
사람들이 열광하면서 몰려드는 곳보다는 우연히 지나다가 이런 동네가 있었나, 싶은 곳이면 좋겠다. ~리단길보다는 그냥 고유의 길 이름 그 자체로 불릴만한 고즈넉한 동네면 좋겠다. 번쩍거리는 새 것도, 낡고 허름한 것도 아닌 손 때 묻어 반질반질하고 둥글게 닳아있는 정도면 좋겠다.
요즘 을지로의 힙한 가게들은 간판이 없다던데. 공구상가의 좁고 어두운 계단을 오르다 보면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난다던데. 그래서, 친구의 추천을 받거나 인터넷 블로그를 보며 알음알음 찾아가야 한다던데. 내 책방은 그냥 길가던 사람들이 쓱-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문턱이 낮았으면 좋겠다. 그 날의 목적지보다는 일상 속 잠깐 들르는 경유지 정도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