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랜맨 Jul 03. 2020

길을 잃은 당신에게 쓰는 편지

<오늘 나에게 다섯 통의 편지가 왔다>, 머쓰앤마쓰  |  무엇보다책방

저는 10년 차 직장인입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좋아하는지도 모른 채 눈 앞의 길을 따라 무작정 걷고만 있다는 기분, 저도 계속 느껴왔던 감정이기에 충분히 공감이 됩니다. 자신의 목표를 명확히 설정해두고 역량을 키워서 그 분야에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전문가가 되었다는 이야기.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사람이 꾸준히 자신의 취향을 파고 들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고,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게 되어서 너무나 행복하다고 말하는 이야기. 요즘 SNS나 책에서 많이 보이는데요. 그런 것을 볼 때면 딱히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고, 관심 있는 것이 있다 해도 그것을 깊게 파고들 열정도 기운도 돈도 없는 저 같은 사람은 뭔가 잘못 살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합니다. 나는 왜 내가 좋아하는 것조차 모르지? 퇴근 후나 주말에라도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천천히 찾아보면 될 텐데, 왜 쉬고 싶다는 핑계로 축- 널브러져만 있는 거지? 당장 회사에서 어떤 업무를 할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커리어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렇게 당장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만 신경 쓰다가 뭔가를 새로 시작하기에 너무 늦어버리면 어떡하지?

'문과라서 죄송하다'라고 외치는 시기에 상경계열도 아닌 어문계열, 더구나 그 4년간 공부한 언어마저 듣고 쓰고 읽고 말할 줄 모르는 사람. 그게 바로 접니다. 당시 전공 무관으로 사람을 뽑으면서 외국어를 덜 보는 곳을 찾아, 힘겹게 영업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5년을 보냈어요. 이후 갑작스럽게 공석이 생긴 영업지원 부서로 자리를 옮겨 2년, 그 후에는 마케팅 부서로 발령이 났죠. 이렇게 한 회사에서 9년을 다녔습니다. 남들은 커리어를 관리하면서 전문성을 키운다는데 저는 서로 연관성 없는 쪼개진 이력들뿐이었죠. 그때 든 생각은 더 시간이 지나기 전에 회사를 옮겨야겠다, 다른 갈 곳이 없어지면 회사가 아무리 불합리한 일을 시켜도 무조건 해야만 할 것 같다, 는 두려움뿐이었습니다.

몇 번의 입사지원과 면접을 거치며 거절을 하기도 거절을 당하기도 한 끝에, 작년 말에 다른 회사로 옮기게 되었어요. 지금은 모바일 서비스 기획을 하고 있습니다. 영업사원에서 지원직으로, 마케터로, 이제는 기획자가 되어버린 거죠. 경력직으로 옮기면 뭔가 내가 잘하는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할 줄 알았는데, 또 죄다 처음 하는 일들 뿐입니다. 책과 인터넷으로 공부해가면서 더듬더듬하고 있어요. 이 상황을 함께 일하는 팀장님께 솔직히 말씀드렸습니다. 복잡한 제 마음과 다르게 대답은 간결했어요.

"우리는 J과장의 그 경험을 산거예요."

전 아직도 제가 무엇을 원하고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한 가지는 알 것 같아요.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아니면 당장 눈 앞에 해야 할 새로운 일이 닥쳤을 때.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경험이, 과거의 내가 스르륵- 나타나서 뭔가 해결책을 줄 수도 있다는 걸.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명확한 목표점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데, 나만 지금 뒤처지고 있다고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출발하지 않았다면 아직 게임은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위의 글은 '세 번째, Ye의 편지'에 대한 답변을 내 나름의 이야기를 담아 써 본 것이다. 직장생활 4년 차인데 길을 잃은 느낌이고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겠다던 고민. 나도 같은 고민을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는 중이기에. 읽을 리는 없겠지만 한 번 편지를 남겨보고 싶었다.


이 책은 무엇보다책방에서 독자가 보낸 한 통의 편지에 다섯 명의 작가가 서로 다른 시선과 생각으로 답장하는 기획으로 진행된 동명의 이벤트를 통해 주고받은 편지를 엮어 펴낸 것이다. 6월 초 독립출판 플리마켓인 책 보부상 행사장에 가서 발견했는데, SNS로 먼저 접하고 재미있는 기획이라고 생각했던 터라 그 자리에서 바로 구입했다. 요즘은 책을 읽는 속도보다 사들이는 속도가 더 빠르다 보니, 정작 읽은 것은 지난 주말이 되어서였다. 서울숲 공원의 나무 그늘 아래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놓고. 공감되는 질문들도, 신선한 답변들도, 좋은 문장과 재미있어 보이는 책 추천도 많이 담겨 있어서 누운 자리에서 금세 읽었다.


직접 답장을 써보니 알겠더라. 누군가의 고민에 글로 대답을 한다는 것이, 쓰고 고치고 다시 쓰고 고치면서 얼마나 큰 정성과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내야 하는 과정인지. 그러기에 이 책에 담긴 12통의 편지와 그 편지에 대한 답장 60통에는 얼마나 소중한 것들이 담겨있는 건지.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열정이나 무기력에 동화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의외로 보람과 확신이 없이도 성실히 일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도전보다는 안정을 사랑하는 분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의 정의나 사회가 정한 시선에 빼앗기지 마세요. 누구에게나 삶은 다 다른 것이잖아요.

예전에는 자아가 단단한 사람이 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주관이 뚜렷하고 호불호가 명확한 사람이 멋져 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자아의 외벽이 유연한 사람, 이렇게도 저렇게도 살아볼 수 있고, 다른 것을 쉽게 수용하거나 옳다고 믿었던 것을 도로 밀어낼 수도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자아가 튼튼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방황도 실패도 가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길을 잃었을 때는 한 곳에 머무르라고 배워왔습니다. 어른이 찾으러 와줄 때까지 한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리라고요. 하지만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 의하면, 길을 잃었을 때는 한 길로 계속 걸어야 그 끝이 나온다고 합니다. 삶에는 구하러 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길을 잃었다 생각하는 순간에도 직진하세요. 한 길의 끝까지 가보세요. 길의 끝은 반드시 또 다른 길입니다.

(p.46)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의 반려 물건은 무엇인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