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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ie May 17. 2021

젊은 달, 한 달

영월에서 한 달 사는 직장인

  코로나가 1년 이상 머물면서 사람들은 사무실 출근 집 퇴근이라는 루틴에서 벗어나 ‘재택’이라는 새로운 옵션을 받게 됐다.


  모이는 것이 답이 아니고 꼭 굳이 사무실이 아니어도 되는 삶이 느닷없이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장 대신 파자마, 꽉 조이는 스키니 대신 느슨한 조거팬츠를 입고 출근시간이 되기 5분 전 즈음 부스스 눈 비비며 일어나 자신의 공간에서 노트북을 켜도 출근이 인정되는 것이다.


  재택근무, 유연근무가 가능한 삶이라고 하면 so called 선진국, 외국, 특히나 실리콘밸리 테키들만의 얘기같았다. 따뜻하고 경치좋고, 매일밤 파티인 발리 같은 동남아의 섬에서 일하고 즐기고 돈도 버는 디지털 노마드? 그렇게 일하면 효율이 오르나? 발리는 게다가 물가도 비싼데. 연봉 높은 개발자들이나 할 수 있겠지. 


  나는 저런 특출난 재주 없는 평범한 문과 직장인이니 서울 중심부를 떠나면 사회에서 뒤쳐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미디어와 콘텐츠에서 일하다보니 한 사회에 발 딛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강박이 있어서 서울 한복판을 떠나는 건 남의 일 같았다. 디지털 노마드는 결국 신문 경제면에서 소개될 법한 잘나가는 개발자들의 화려한 모습 중 하나일 뿐이었고 나와는 좀 다른 삶의 모습이었다.



  사실 나는 꽤 오래 도시에서 재택 근무를 했다. 2014년 영국에서 귀국하면서 당시 회사는 원격근무라는 한국에서는 조금 낯선 조건의 계약을 제시했고 졸업 후 별다른 직업 계획이나 대책이 없던 나는 덥썩 받아들였다. 출퇴근 시간도 자유롭고, 주어진 태스크만 끝낸다면 근무 시간은 사실 무의미했다. 프로젝트성? 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내 업무를 기한까지만 다 마쳐준다면 그 외 시간에는 무엇을 해도 상관없는 조건이었다.


  그때 한국에 와서 이렇게 일을 한다고 하면 

 “아 프리랜서세요?” 라거나 “그럼 회사는 언제 가세요?” 라는 질문을 항상 받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저는 회사에 다니고 있고요, 정규직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우리나라처럼 52시간을 꽉 채워 일하지는 않습니다. 본사에는 출장이 잡히면 가는데 굳이 가지 않아도 됩니다.” 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대답했다.


  지금쯤 되니 부모님도 내 근무 형태에 대해 이해하지만, 처음에 한국에 들어와 새벽에 컴퓨터 앞에서 뭔가를 두드리고 낮에는 자거나 카페에 가서 책을 읽고, 다시 집에 들어와 방 한구석에서 휴대 전화로 알 수 없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나를 보면서 부모님은 “너 언제 취업할래?”라던가 “너도 이제 번듯한 일을 해야지”하면서 내가 아직까지 놀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셨다. 


  일을 하고 월급을 받지만 주변의 이런 반응에 나는 움츠러들었고, 내가 하는 일은 제대로 된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비대면 이메일, 공유 문서로 업무를 다 처리하고 가끔 얼굴도 모르는 거래처와 통화만 하니 사람을 만나는 일도 줄었다. 


  소속 없이 일하다보니 자유가 무한정이었다. 가끔 무작정 여권을 들고 공항에서 항공권을 구입해 한 일주일 정도 대만 친구네에 가서 일을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공허하긴 마찬가지였다. 


  내가 지금 이래도 되나? 싶기도 하고. 신문에 나오는 발리의 디지털 노마드는 항상 환하게 웃고 있는데 왜 나는 이렇게 쓸쓸하고 답답한거지. 내가 발리를 못가고 방구석에만 있어서 그런가? 해외로 갈 때 가더라도 좀 더 떠나는 기간이 길어야 하나? 발리는 비싸다고 하니까 태국에 에어비앤비라도 알아봐야 하나? 이런 생각도 들었다.



  몇 년 전 새로운 회사 일도 겸업하게 되었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외국계도 아니고 정말 외국 법인, 게다가 근무 시간도 유연할 수밖에 없는 업종 (저널리즘)이다 보니 사무실은 생겼지만 굳이 가야 할 이유 없이 또 집에서 머무르는 ‘풀타임 근무자’가 되었다.


  점점 나는 사무실 생활을 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탕비실에서 동료들과 얘기를 한다던가, 점심시간의 외출, 동료들과의 저녁 회식, 등등 한국에서 하는 일반적인 회사 생활을 하는 친구들에게 “내 꿈은 그냥 평범하게 회사 출퇴근하면서 월급 받는 것”이라면서 자조적으로 웃기도 했다.



  코로나가 꽤 길어지면서 이상해 보였던 내 업무 조건은 이제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모임을 꺼리거나, 사적 모임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고, 회사에서는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재택 근무를 권장했다. 

친구들은 몇 년 전 내가 하던 고민과 답답함 (집에서는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일과 집이 구분되지 않아 답답하다, 집이 좁다 등등)을 똑같이 하기 시작했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거봐,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며 미리 재택해본 올드멤버의 팁을 몇 개 전했다. 이를테면 “아무리 그래도 세수는 하고, 옷은 갈아입어라” 라던가, “시간 재서 어느 정도 지나면 좀 움직이고 물 마시고 화장실도 다녀와라”같은 것들.



  이제 남들도 내 일하는 모습에 어색하게 여기지 않지만 8년차에 접어든 재택에서 나는 새로운 도전을 해보려고 한다.


  재택을 한다한들 나는 항상 도심에 있었고, 해외에 잠깐 나갔다 오더라도 타이페이, 홍콩, 도쿄, 파리처럼 큰 도시에만 머물렀다. 도시에 있어야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나는 도시에서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발리의 화려함이 사실 끌리지 않았던 것도 그곳이 아무리 날씨가 좋고 풍경이 아름답다 한들, 내가 익숙한 ‘도시’가 아니었다.


  주변에서 종종 “너는 정말 도시 사람같아”라는 말을 듣는다. 쉴 때는 카페에 가고, 대형 쇼핑몰에서 여가 생활을 하며 지하철 역 숫자로 거리를 계산하는 사람. 완전 서울 토박이는 아니지만 서울과 근교 위성도시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그런 삶에 익숙해진 탓일 수도 있다. 어찌보면 도시 촌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도시의 특성인 판에 박힘이 나에게는 안정적인 예측 가능함이었고, 그 안에서 나는 안락함을 느꼈다. 이런 예측성이 없는 공간에서는 당황하게 된다. 처음 대형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빌라로 독립을 했을 때도, 비록 서울 안이었지만 내 ‘예측가능한 삶’에서 벗어났다는 점 때문에 적응에 꽤 애를 먹었다.


  그런데 이 삶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내가 기반이 없는 혹은 내가 사전 정보가 없는, 내가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내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궁금함이 생겼다. 내가 주도하는 나의 공간이 아니라 외딴 곳에 떨어졌을 때 나는 여전히 ‘사람구실’ 하면서 살 수 있을까? 만약에 그렇다면 서울에서 더 치이지 않고 좀 편한 곳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그래서 5월 16일, 서른 셋이 되는 날 나는 영월에서 한달 살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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