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맨날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자아 없는 남자가 내 이상형이라는 말인데 생각해 보건대 회사 입장에서도 자아 있는 직원은 쓸모가 없을 것 같다. 근데 사실 자아 없는 직장인은 회사 입장에서도 반갑겠지만 나를 위해서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게는 위에서 방향을 잘 못 잡아서 피드백이 늦게 들어와 뒤집어엎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크게는 조직이 개편을 많이 하거나 뭐가 되었던 관리자급이 방향이 없을수록 프로젝트의 변동을 계속 겪게 된다. 문제는 이런 일을 좀 자주 겪으면 어차피 내가 하는 일이 언젠가는 뒤집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일하고 싶은 의욕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혹자는 책임자급의 사람들이 어쩌고 저쩌고 하겠지만 어차피 관리자도 회사의 녹을 받는 입장이라 월급만 받으면 되고 회사가 굳이 지정한 방침을 어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신입 때는 매너리즘에 젖었다. 아니면 약간의 수고로 조금 더 진보되고 개선된 방법으로 이슈를 해결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해 왔지만 (그리고 모든 신입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이제 와서는 어차피 주인님(회사)의 방침은 바뀌지 않을 것이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궁리를 하는 것 만이 - 직장생활을 견디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자아 없는 직장인이란 회사에서 원하는 인재상이기도 하겠지만 나에게도 그렇게 크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그렇다고 자아 없는 직장인이 위기가 없는 것은 아니라서, 방침이나 사업 실패 등으로 조직이 개편되거나 날아가는 것을 보면 현타가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특히나 내가 몸 담은 분야는 시대의 흐름을 크게 타는 분야다 보니 서비스가 론칭되고 사라지고 - 그에 따라 팀의 인원들이 퇴사하고 바뀌고 하는 경우를 너무 쉽게 볼 수 있다.
최근 나에게도 팀이 바뀌는 정도의 그렇게 큰 일은 아니지만 - 단순한 위의 말 한마디로 내가 이때까지 했던 일들을 전부 다시 방향을 잡아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이 짤을 보고 얼마나 큰 위로를 얻었는지 모른다.
누가 만드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만큼 직장생활에 대해서 강렬한 통찰이 있을까?
중요한 건 꺾여도 계속하는 마음. 자아를 삭제하고 언제든지 업무라는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인 것 같다. 일견 불합리해 보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서로 월급으로 이어진 관계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이렇게 담백한 관계는 또 어디서도 찾기 어려운 깔끔한 관계이다. 무언가 서로에게 끈적하고 발전을 원하는 감정을 갖는 순간 서로의 그 쿨한 관계는 사라지는 것이다. 물론 회사는 겉으로는 나에게 나의 끈적하고 집착 강한 - 애사심이라는 애정을 바라겠지만 사실 그게 생기는 순간 우리의 관계는 엉망진창으로 갈지언정 발전은 없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감정의 방향은 절대 같을 수는 없으니까.
딱 이 정도의 쿨한 관계로 지내자.
자아 없는 (웬만큼 합리적인 선 안에서는) 주인님의 명을 잘 이행하는 직장인으로 남아 줄 테니 주인님은 녹봉과 깔끔한 복지 정도로 서로 오래 계약관계로 지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