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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한 Jun 21. 2024

마당의 손님들

호구 일대기


1.


삶은 불행하고 힘들어도 나름의 뒤틀린 재미들이 있을 수 있다.


집구석에 있으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 보니 나는 요리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는데 그것은 마당의 손님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마당에 내가 밥 주고 있는 고양이들 20마리. (보다 더 될 수 있다.)


그들은 내가 언제 맛있는 것을 뿌리는지 잘 알고 있다. 그 시간만 되면 저 문 너머의 호구 놈이 밥을 줄 시간이다! 하고 삼삼오오 모인다. 

나, 호구 놈은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꾸준히 메뉴를 다양화하며 고객들의 입맛을 맞추려고 노력했다만 애들이 많아지다 보니 호구 놈의 주머니 사정에 점점 부담이 가해졌다. 게다가 세상과의 단절을 시도했더니 시간이 남아돈다. 

요새 나는 냉장 닭 안심을 대량으로 사 삶아주고 있다. 인간의 먹을게 동물의 먹을 것보다 싸다니... 역시 외식보다는 집밥이 싼 법이다.



2.


봄은 사랑의 계절이어라.

아니 사실, 고양이들에게는 사시사철이 사랑의 계절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마당의 젖소 친구가 나를 보고 하악질을 한다. 

사실 고양이들이 엄청나게 많으면 고양이들의 털로 밖에 애들을 구분할 수 없... 다고 믿고 싶은데 그건 나만 그런 것 같다. 가족들은 얼굴로 잘 구별하더라; 어쨌든.


마당의 하악질 하는 친구가 왜 하악질을 하나 했더니 어느 날 저 멀리서 아이들 셋을 데리고 등장했다.

심지어 사이즈를 보니 제법 큰 친구들이다. 3개월쯤?

날이 좋을 3월 무렵에 낳아서 지금까지 키웠나 보다.

내가 닭을 주면 물고 새끼들을 숨겨둔 곳으로 사라진다.



3.



내가 아이들에게 밥 주기 시작할 무렵부터 드문드문 보이는 - 그러니까 우리 집에서 밥 먹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사람 눈에 잘 안 띄고 가까이 오지 않는 - 턱시도 녀석이 있었다. 

그 아이는 멀리서 봐도 구내염이 심해 보여서 내 마음을 언제나 애타게 했는데, 지금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맨 처음 만날 때보다는 털이 제법 가지런해졌다. 잘 먹으면 어쨌든 낫는다!



그 녀석이 최근 우리 집 마당에 자주 보인다.

나와의 거리감도 제법 가까워졌다.

물론 엄청 가까이 오진 않지만 내가 안부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 서로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이게 웬일이냐! 역시 치킨을 삶는 보람이 있다! 자주 먹으러 와라!!!!라고 내심 흐뭇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보니 나에게 매일 하악질 하는 젖소 녀석과 꽁냥 거리고 있더라.

그리고 매번 그 녀석이 밥 먹고 자러 가는 곳이 젖소 녀석이 아이를 숨겨두는 장소다.



마당의 친구들은 대체적으로 중성화가 되어있어 아빠를 추론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데

새끼들의 태비를 보니.... 그렇다... 

이 녀석 숟가락 들 힘이 생기니 바로 사랑에 힘썼던 모양이다.



4.



마당 친구들이 머릿수가 많다 보니 밥값이 만만치 않다.

게다가 나름 신경 쓴다고 집 안에 있는 친구들과 같은 밥을 먹이고 있는데 - 주머니는 힘들어도 잘 먹이고 있다. 가 나름 나의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마당 손님들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집냥이 놈은 잘 먹는 중국산 치킨 트릿은 마당 친구들은 안 먹는다. 맛이 없다는 이유로.

고오오오급 국내산 닭고기로 만든 치킨 트릿 아니면 갓 삶은 닭이 아니면 먹는 둥 마는 둥.. 그냥 구경만 하는 손님들.

그에 비해 건강을 생각해 엘라이신이 섞인 쿠키를 주었는데 - 집냥이 놈들은 수상하다고 안 먹은 반면 마당 친구들은 오 특식! 하면서 순식간에 와구와구 먹더라.



아, 

비싼 사료도 의미가 없구나.

그냥 사료가 아니면 고급진 간식은 다 좋아하는 건가.

아니면 그냥 비싸면 다 좋아하는 건가.



살짝 현자타임이 온다.



5.


그래도 내가 어느 날 비명횡사 하지 않는 한은 건재하여, 그들의 식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호구 놈이 될 예정이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 친구들의 복지와 건강을 위해서라도.

어미 고양이도 밥자리를 물려주지 않고 오래오래 나를 등쳐먹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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