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조건 너보다 낫다. 이유는 생략한다.
가만히 보다 보면 한국 사람들은 뭔가 수직적으로 명확한 걸 좋아하는 것 같다.
뭐가 되었던 순위로 줄 세우기를 시도한다. 내가 자주 가는 음악 커뮤니티는 각설이처럼 일 년에 한, 두 번씩 어떤 작곡가가 음악사 최고의 작곡가인가로 쓸데없는 배틀이 일어난다. SNS에는 계급도라는 이름 아래 티어를 만들어낸다. 시계부터 가방 심지어 파스타면까지. (물론 공신력은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계속 나의 존재가 어떤 티어에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어느사회에든 메인스트림을 형성하는 주류가 있다. 그리고 그 흐름에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는 비주류들도 있다.
재밌게도 한국 사회에서는 비주류는 언제나 주류를 냉소적으로 바라보지만 지들끼리 또 하나의 수직적은 구조를 형성하며 주류를 흉내 내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는 주류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게 재밌다.
그러니까, 이 사회에서는 비주류는 비주류라는 이유로 서로 이해받을 수 있지 않고 '내가 인정하는' '내가 속한' 비주류만이 이해받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경험은 너무나 많이 해서 예를 들자면 끝도 없는데 최근에 한 재밌는 경험을 이야기 하자면,
얼마 전에 우연히 음감회를 갈 일이 있었다. 사실 음악을 듣고 싶으면 집구석에서 들어도 되는데 굳이 바깥에 나가기로 한 이유는 맨날 듣는 음악 말고 새로운 음악을 듣고 싶어서였다. 맨날 먹던 국밥만 먹다 보면 다른 집 사람들은 뭘 먹고 사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어쨌든 그런 의미로 우연히 찾은 작은 음감회실에 방문했다.
음감회실의 운영은 음감회에서 준비한 음악과 음감회의 모인 사람들의 신청곡이 재생된다.
나는 당당하게 내 신청곡으로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음악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아주 냉소적인 반응을 맛봐야만 했다.
참 재밌는 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내가 아껴둔 내 아이돌의 음악을 대놓고 무시한 건 아니었다. 다만 사람이 말을 해야지 아는 게 아니라고 공기, 사람들의 반응 등으로 금방 알 수 있었다. 내 시야의 여성분의 표정 미묘한 텐션 그런 것들로 말이다.
근데 그 사람들의 반응이 이해가 되는 것이 그 음감회에 모인 사람들의 신청곡으로 이해했다. 신기하게도 그들의 음악 취향은 비슷했다. 매스 미디어에 자주 노출 되지는 않지만 SNS에서 알 사람들이 알음알음 아는 듯한 음악들. 다양한 악기를 쓰지 않는 미니멀한 구성과 튀지 않는 잔잔한 보컬. 모던락, 재즈, 보사노바... 뭐랄까 통틀어 비유하자면 어디 성수동에 라운지바 같은 데서 나올 것 같은 음악? 그들에게는 전부 다른 음악이었는지 몰라도 처음 듣는 내가 느끼는 그 음악들의 결은 비슷했다. 오히려 내가 선곡한 아이돌 음악이 그 음감회 중 제일 이상한 선곡이었다.
내 글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라고 하기에는 내 글을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나는 모 아이돌의 팬이다. 그러면서도 소련 음악을 좋아하는 좀 남들이 보기에는 종잡을 수 없는 취향을 갖고 있다. 그 사이에 공통점이라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라는 것 밖에 없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소중하게 모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냥 음악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의 선곡인 셈이다.
어쨌든 음악을 들을 줄 모르는 나는 아, 일단 한국 사회에서는 뭔가 흐름이 형성되면 거기서 우열을 나누며 또 쪼개고 쪼개는구나!라는 신박한 깨닫음을 얻었다. 음악이라는 넓은 세계에서 네가 좋아하는 음악 내가 좋아하는 음악. 또는 내가 모르는 음악 네가 모르는 음악이 있는 게 아니라 들을 줄 아는 사람의 음악과 들을 줄 모르는 평범한 사람의 음악이 있다니. 조금은 예상했지만 너무나 당연한 그 흐름에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비주류를 이루는 구성원들의 수직화에 대해서는 여러 번 말이 나오긴 했다. 가령 트레바리의 독서 모임이 광의의 의미에서 독서모임이 아닌 일정한 허들을 넘은 인증된 사용자들이 모이는 구별 짓는 공간이 된다는 논문(수평적 취향공동체를 통한 새로운 구별 짓기: 독서모임 커뮤니티 <트레바리>의 사례를 중심으로, 2021)등을 생각해 보면 그렇다. 소위 '인증'이라는 이름의 비주류 구성원들의 '인정'이 없으면 나는 그들과 같은 것을 좋아한다고 해도 바로 브론즈 티어로 낙인찍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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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수평적 공동체가 되려면 내가 가진 취향과 다른 취향의 사람의 이야기를 배우는 자세로 깊게 들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한국 사회는 그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고, 내가 가진 지식은 위대하며, 내가 가진 취향이 멋지다. 그러기에 남의 취향은 쉽게 무시하고 깊게 알려하지 않고 바로 선비질을 시전 한다. 왜냐면 어디서 인정받은 경험이 적은 한국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는 언제나 인정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받지 못한 인정을 아무리 작은 조직이라도 - 누군가를 재차 별한 과정으로 채우고 다단계처럼 끊임없이 인정을 채우기 위해 다른 차별을 만들어낸다. 연령과 성별 세대를 무관하고 말이다. 어릴 때는 그럴 수 있다. 세상을 배우는 중이니까 다만 이치를 알만한 30대 중반이 되어서도 그런 것들이 반복되고 있다면 이 뒤의 세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수평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아닌 뭐든지 자잘하게 쪼개서 급을 나누는 방식뿐일 것이다.
어쨌든 음악을 모르는 브론즈 티어의 경험은 아주 신선했다. 어릴 때의 나였으면 무시당했다는 마음도 있었을 거고 나 혼자 동떨어진 사람이 된 듯한 마음에 우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확실하게 배운 것은, 더 이상 나는 세상과 소통하려고 애쓸 필요 없으며 이 경험을 소중히 하여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나은 사람이 되어줘야겠다.라는 깨닫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