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솜이 Mar 23. 2022

행복에 관한 죄책감


세상이 혼란하다. 거기에 발맞추듯 나는 요즘 전에 없던 수준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나야 늘 생각이 많고 걱정도 고민도 많은 사람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고 나 스스로도 선을 긋게 된다. 생각이 너무 많으면 안 되는데, 어떻게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걱정스러운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는데 걱정하지 않는 것은 내가 그것들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 같아서 괴롭다.


그래서 나는 요즘 행복하지 않다. 물론 행복해지려 애쓰기도 했다.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좋아하는 것을 먹고 즐거운 기분이 드는 일에 몰두도 해봤다. 방도 더 산뜻하게 꾸며보고 해가 잘 들게 낮 동안에는 커튼도 걷어 놓고, 지난주에는 백화점에 가서 손과 얼굴용 비누와 수분크림을 새로 샀다. 향긋해진 채로 따끈하고 포근한 이불속에 파묻혀서 나는 십 분 정도 울다가 잤다. 그것들은 나를 잠시나마 기분 좋게 만들어줬지만 나를 슬프지 않게 해주진 못했을뿐더러, 소모적인 방식으로 행복을 좇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부채감마저 불러 일으켰다. 내가 이럴 자격이 있나. 잠들기 직전까지 괴로움은 끊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머리만 대면 곧잘 잠드는 좋은 수면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 정도.


무지성의 행복을 지향하는 것이 올바른가에 대한 내 안의 잣대가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다. 바다와 강과 호수가 죽어가고, 공장식 사육을 당하는 소, 닭, 돼지, 양, 염소 등등의 가축들이 매일 주저앉고 두들겨 맞고 피 흘리며 비인도적으로 살해당한 뒤 식탁에 오른다. 벌건 고깃덩이를 보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슬퍼져서 울음을 터트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인간이라는 것이 죽도록 미안했다. 할 수만 있다면 엎드려서 사죄라도 하고 싶다. 나 하나가 모든 인간을 대변할 수 없고,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라도.


지구의 한편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이 나라의 어딘가에선 혐오를 앞세워 권력을 거머쥔 이들이 배가 터지도록 먹고 산다. 세상의 그늘진 곳에는 끼니를 굶는 이들이 있고, 하루하루 사는 것이 힘겨워 숨을 끊는 이들이 있으며 무력감과 좌절감에 점철되어 비틀대는 나도 있다. 며칠 씩이나 이어졌던 산불로 타 죽은 나무를 생각하면 뱃속부터 뜨겁게 아파온다. 빙하가 녹아 삶의 터전을 잃는 것은 펭귄이나 북극곰만의 일이 아니다.



매트릭스에서는 기괴할 정도로 뒤틀린 인간의 생존 방식에 대해 스미스 요원이 인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며 신랄하게 비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인간은 한 곳에 정착하면 그 주위의 모든 자원과 식량을 모조리 바닥내다 못해 근처의 환경까지 전부 파괴시킨다. 그리고 그 땅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곳이 되면 이제 다음 서식지를 찾아 이동한다. 지구상에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살아남는 종족이 딱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바이러스라는 것이다. 숙주를 찾아 기생하고, 그것을 파괴하고 나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며 생존하는.


우리는 어떻게 우리를 극복할 수 있을까. 가장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이 모든 사실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잔혹한 방식으로 살아남고 있는지, 풍요와 발전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에 가려진 이 세대의 혜택이 전부 슬플 정도로 희생당한 비인간 동물들과 자연환경의 무덤 위에 세워진 반석이라는 사실을. 인류가 지구에게 있어서 거대한 암 덩어리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면, 그다음엔 자연스럽게 실천이 뒤따르기 마련이지 않을까?


인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존재인 것 같다. 희망이라곤 없을 것처럼 무자비하게 굴지만, 얼마든 변하고 얼마든 또 나아간다. 나는 매일 좌절하고 매일 슬퍼하지만 꽤 많은 곳에 나와 같은 생각을 나눈 이들이 많다는 걸 잊지 않으려 애쓴다. 나의 고민은 적어도 외롭지 않은 고민이다.



나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다정해졌으면 좋겠고, 지금보다 더 자비롭고 관용적이게 살기를 바란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무섭도록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내가 아니면 어떡하지?' 라던가 '당신은 언제든 내가 될 수 있다'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당신의 슬픔은 내가 대신 품어줄 수 없는 오직 당신만의 것이지만, 그것이 충분히 나를 슬프게 한다는 점에서 결코 나와 무관해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슬픔을 공유할 수 있다. 내 것이 아닌 고통은 물론이고, 사람이 아닌 존재의 슬픔과 고통에도 기꺼이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내게 있어서 무섭고 원망스러운 존재임과 동시에 사랑해 마지않는 가족이자 친구들이다. 나는 사람이 싫지만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 이 냉소적이고 파괴적인 세계를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 어떻게든 함께 살아남고 싶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을 위해, 나는 우리가 우리를 그만 아프게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결국 내가 택할 수 있는 방식은 끊임없는 공부와 실천뿐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좌절하고 포기하는 건 싫었고 외면하고 모르는 척하는 건 더 싫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싶지 않았다. 두 눈 질끈 감고 고개 돌려버리고픈 순간이 오더라도 나의 눈과 귀와 코, 두 손과 발이 그곳으로 향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싶다. 세상 따위 더러워 버리고 싶어도 더러워 버려진 세상에 남을 힘없는 이들을 모르는 체 할 수가 없어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 모든 문제에 맞서 보기로 했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정세랑 작가님의 책, '옥상에서 만나요'에 실린 단편, '웨딩드레스 44'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내 우울은 지성의 부산물이야."


나의 이 모든 우울은 공부하면 할수록 해소되긴커녕 심화될 것이란 슬픈 예감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이 슬픔이 내게 내재된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연민과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다 발견한 세상의 조그만 균열에 대한 작은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나의 질문들은 이제 내 삶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

 삶에는 지금  차례의 혁명이 지나가는 중이다.








*커버사진: 김미루, Bodies (IA) 4(2010)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