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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줄 생각은 없었어]


[상처 줄 생각은 없었어]


-정체성이란 단어조차 강요처럼 느껴지는 안테바신인 나에게 커다란 숙제가 생겼다.





외국에서 십여 년을 살았었다. 여전히 두 나라를 왔다 갔다 하며 살고 있지만 만약 누군가 나에게 고향이 어디인지 묻는다면 아직도 명확히 대답하지 못하겠다.


안테바신(Antevasin-경계에 선 사람들)이라는 단어를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Eat, Pray, Love/ 엘리자베스 길버트, 2007)라는 책을 읽다가 발견한 날, 나는 내 삶이 이 단어가 가진 뜻과 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산스크리트어인 이 말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마치 이방인의 시선으로 두 나라에서 살고 있는 나를 너무나 잘 드러내는 말 같아 볼 때마다 내 것 같았다.


몇 년 전 어느 날, 그날은 아이 학교에서 연극 발표회가 있던 날이었다. 우리의 한껏 들뜬 마음을 옷으로 다 표현해 낼 것처럼 정성껏 차려입었다. 남편은 묵직한 DSLR까지 꺼내어 어깨에 걸고 사진 찍기 좋은 자리를 맡겠다며 서둘러 집을 나섰다. 연극이 시작되고 내 눈은 서둘러 아이를 좇았다. 출연하는 모든 아이들이 다 나와서 노래를 하는 장면인데 딸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를 찾다 가만히 살펴보니 뭔가 이상하다. 금발의 파란 눈을 가진 아이들은 죄다 맨 앞줄에 나와 서서 튀는 옷차림에 화려한 춤 동작과 함께 노래를 하고 있다. 뒷 줄로 갈수록 머리색이 짙어지고 옷차림은 무채색이 된다. 우리 아이는 다람쥐 역이었는데 얼굴엔 갈색칠을 하고, 다람쥐 털옷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채, 맨 뒷줄, 다닥다닥 붙은 아이들 사이에 서서 팔도 제대로 못 벌리고 춤을 추고 있었다.


갑자기 이 부유하고 안정된 바닷가 마을 사람들의 은은하게 세련된 옷차림과 그들의 새하얀 피부색이 눈에 들어오고, 내 짙은 화장과 빼 입은 옷차림이 너무나 아시안스러워 보이면서 그 자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읽은 미씨**라는 네이버 해외 맘 카페에서 읽은 글이 생각났다. 발레에 재능이 있는 아이의 진로 문제에 대한 고민 글이었는데 답글의 대부분은 이랬다.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곳이 문화예술계 쪽이니 마음의 상처를 받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들어가야 한다’, ‘유색인종에게 주인공은 미스티 코플랜드(발레계의 흑진주라는 별명을 가진 수준급 발레리나) 정도의 실력자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체형과 체력의 차이를 극복하기 힘들 것이다. 하이스쿨에 가면 확실히 한계가 보인다.... 등등.


그 사이 한 댓글이 인상적이었는데 대부분의 아시아인들이 받는 건 ‘인종차별이 아니라 언어 차별’이라는 것이었다. ‘네가 진정으로 실력이 있고, 무지에 의해 행해지는 차별에 대항할 영어 실력이 있다면 뭐가 문제이겠는가’라는 식의 논조에 영어 열등감으로 폭발하는 댓글은 차라리 건강해 보였다.


상당히 많은 댓글이 대물림받은 외모가 아닌 내 영어, 그러니까 내 실력 때문에 차별을 받는 건 정당해 보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우리가 이곳에서 차별을 받고 사는 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의 논리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들의 뼛속 깊은 무기력함과 수용성이 공포스러웠다. 저렇게나 기죽어 살 일인가 싶어 서글펐다. <구조적 차별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2020, p.74)> 은 차별이 아닌 것인가? 불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이렇게 질서 정연한 일일 것인가 말이다.


                                                                                                            (사진출처: pinterest)



그리고 지금은 한국이다. 작은 아이의 유치원에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친구들이 있다. 삼국지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이름과 같다. 호기심이 생겼다. 아이들은 밝고 등하교 길에 보는 그 엄마는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다. 어느 날, 용기 내어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이 엄마, 베트남 인이다. 엄마들 무리에서 항상 벗어나 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도 친해지고 싶었다. 호주에서의 내 처지와 많이 비슷해 보여서 끌렸다. 친구가 되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나눌 수 있는 대화는 많지 않았다. 아이들의 이름을 어떻게 짓게 되었는지 물어보자 그냥 웃었다. 남편이 지은 이름이라고만 했다. 자세한 설명은 들을 수 없었다. 한국말로 해야 하는 대답이 부담스러운가 싶어진 나는 그때부터 질문은 삼가고 내 얘기를 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길어지자 웃어야 할 타이밍에 웃지 않는다. 못 알아듣고 있구나 싶었다. 다시 조금 미안해졌다. 그리고 아쉬웠다. 그 아쉬움이 얼굴에 드러난 탓이었을까? 그 무렵부터 그녀는 나를 피해 다니는 것 같았다. 가면 같은 웃음만 내보이다 이내 시야에서 사라지곤 했으니까.


순간 예전에 아이가 외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가 떠올랐다. 교실 앞에서 하교하는 아이를 기다리며 서 있을 때면, 본인의 과거 해외 거주 때 이야기로 친근감을 표현하며 나에게 호기심 넘치는 얼굴로 상냥하게 다가왔던 많은 엄마들. 하지만 힙한 서양인 엄마들의 동양인 친구 만들기 이상의 관계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버린 나는 더 이상 그들의 친절이 반갑지 않았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을 텐데, 영어 한 마디 못하던 아이를 무거운 마음으로 학교에 보내던 그때의 나는, 막 새끼를 낳은 어미개처럼 예민해져 있었다. 본심과 상관없이 우리는 상처를 주고받은 사이가 되어버렸다. 나도 그 서양인 엄마들도 그리고 베트남인인 엄마도. 실은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던.


내 이삼십 대의 대부분 그러니까 부모님을 벗어나 독립적인 나로 살게 된 순간부터 나는 다른 나라에서 살았다. 두 번째 성장, 즉 정신적 성숙은 그곳에서 이루어졌으니 나에겐 고향과 다름없는 소중한 곳이다. 그런 나에게도 그 연극 발표회의 기억은 소름 돋는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지만, 아이에게 그날의 무대는 아직도 친구들과 함께 한 소중하고 기분 좋은 추억의 한 장면일 뿐이다.


하지만 언젠가 나는 이 이야기를 아이에게 다시 꺼내어야 한다는 걸 잘 안다. 아이는 그곳 학교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 우리가 받은 게 무엇인지, 연극을 담당한 선생님의 마음과 눈에는 어떤 것들이 담겨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 차별과 폭력의 이유와 목적과 결과에 대해 꼭 한 번은 잘 풀어봐야 한다.


나는 아이가 상처받지 않도록 이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소위 선진국에 사는 아시아인으로서 스스로 낙인을 찍는다던지, 혹은 그 속에서 지게 될 그림자를 외면하면서 살지 않게 하고 싶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살며 한국인으로서의 위치를 문화적 우위로 받아들인다던지 혹은 배척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정체성이란 단어조차 강요처럼 느껴지는 안테바신인 나에게 커다란 숙제가 생겼다.


하지만 성차별, 나이차별, 학벌 차별, 지역차별, 종교차별, 인종차별, 소수자, 퀴어, 페미니즘, 채식주의자, 된장녀, 맘충, 동물권, 갑을관계, 장애인 등등. 이런 단어들이 좋은 뜻인지 나쁜 뜻인지도 잘 모른 채 마구 뒤섞여 쓰이는 것이 별로 이상하지 않은 세상 속에 살면서, 과연, 우리는 그저 평범하고 선량한 시민일 뿐 이라며 선긋기 하는 일이 가능하기나 한 걸까? 상처 줄 생각이 없었다면 조금 더 민감하고 용감해져야 할 일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로 시작한 내 장정이 아이에게 등불이 되었으면 좋겠다. 차별받지 않으려 발버둥 치던 나날들이 이제는 나를 차별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있나 보다. 그리고 나아가 나의 가족뿐 아니라 우리 주위의 사람들 속에도 켜켜이 따스하게 스며들기를 바라본다.


안테바신이면서 동시에 낭만 거북이로 나를 지칭하며 살고 있다. 바다에서나 육지에서나 내 속도대로 살아가고 싶다. 그 어느 쪽에서도 소외되지 않고 이방인이라 칭하지 않으며, 나 답게 행동해도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그 속에서 꿈꿀 수 있는 낭만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차별은 단순히 지폐나 동전이나, 햄버거나 영화의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 인종이나 피부색을 이유로 그를 공공의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할 때, 그가 당연히 느낄 모멸감, 좌절감, 수치심의 문제이다.

(아서 골드버그, 미 대법관)"  바로,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이지혜,  2019,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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