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oema Oct 30. 2024

동화_밤의 군대들

밤의 군대들


밤이 몰려온다. 서쪽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하나둘씩 창문에 붙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책상 옆 창문에, 누군가는 침대 옆 창문에, 그리고 누군가는 퇴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제 곧 몰려올 것이다. 아이들은 그 순간을 기다리며 하늘과 시계를 번갈아 보았다.


신기한 바람이었다. 그 바람에 언제부터 그렇게 불어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지금 어른이 된 사람들도 그들의 어른들에게서 들었고, 그 어른들도 그들의 어른들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이 마을의 비밀이었기에, 설사 누군가 이곳을 떠나 이사를 간다 해도 이 마을의 밤에 대해서는 모두가 함구했다. 그렇게 신비한 바람이었다. 오직 아이들만을 위한 바람. 오직 밤에 부는 바람. 새벽 나라에서 오는 신비한 바람.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늘 그 바람을 그리워했지만, 이 바람의 마술은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 바람이 불어오기 전이면, 꼭 휘잉휘잉하고 휘파람 소리 같은 게 났다. 그러면 기다리다가 꾸벅꾸벅 졸던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나 창문에 바짝 다가앉은 채 창을 열었다. 이제 올 것이다. 아이들은 할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오늘의 염원을 담아, 오늘의 슬픔을 담아, 오늘의 일상을 담아 가능하면 짧은 문장으로 만들어야 했다. 바람은 많았지만, 빨랐고, 가벼웠다. 느릿느릿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얼굴을 훑고 지나갈 것이다. 아이들은 100미터 달리기를 앞두고 시작소리를 기다리는 선수들처럼 두근두근하는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휘잉휘잉

시작되었다.

밤의 군대가 몰려올 것이다.

수없이 많은 바람이 하늘에서 흘러 내려와 이 마을을 쓸고 다닐 것이다.

아이들은 그 바람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잘 담아야 했다.

쉭-하고 얼굴을 쓸고 지나가는 바람에.

그 찰나의 순간에.


짝꿍에게 못되게 굴어 사과가 하고 싶은 아이는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바람은 짝꿍의 이름을 잘 듣고는 짝꿍이 사는 집으로 재빨리 방향을 틀었다. 그러고는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민 짝꿍의 머리를 기분 좋게 흩트려주었다. 짝꿍은 아이가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즉시 깨달았다. 이게 이 바람의 비밀이었다. 마음을 전해주는 바람. 신비한 바람. 

짝꿍 역시 자신에게 온 바람에게 이제 괜찮다는 마음을 실어 보냈다. 이 마음을 실은 작은 바람이 모퉁이를 돌아 재빨리 아이에게 가서 코끝을 간질여주었다. 아이는 자신의 마음이 전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일 학교에 가면 정식으로 사과를 할 것이다. 그렇게 둘은 다시 서로를 보며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저녁 식사 시간 엄마에게 투정을 부린 꼬마는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담았다. 바람은 잠시, 아주 잠시 멈칫하는 듯 속도를 늦추더니 창문 안으로 들어왔다가 살짝 열린 안방으로 몸을 욱여넣고 엄마의 얼굴에 미풍을 불어주었다. 잠들기 전까지 계속 기분이 좋지 않아 꿈자리가 좋지 않았던 엄마의 꿈이 갑자기 파스텔색 몽글몽글한 꿈으로 바뀌었다. 엄마는 기분 좋게 깊이 잠들었다. 바람은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밖으로 쌩 하고 나갔다. 꼬마는 자신의 뒤통수를 건드리고 나간 바람을 느끼며 아침에는 엄마를 꼭 안아주어야지 생각했다.


그렇게 모든 아이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담을 무렵, 한 아이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동안은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혹은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달라는 말을 하곤 했다. (바람은 친절하게 고양이의 등을 밀어 집까지 잘 데려다주었다. 아이는 그렇게 느린 바람은 처음이었고, 자신을 위해 애써 속도를 늦춰 주었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 깊이 고마워했다. 그러고는 일주일 내내 바람아 고마워 바람아 고마워라는 말만을 전했다. 이 말을 들은 바람은 아이 앞에서 작은 회오리바람을 만들어 보이며 기쁨의 춤을 추었다) 그러나 오늘은 망설여졌다.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싶었다. 보고 싶다고. 그렇지만 걱정하지는 말라고. 나는 이제 잘하고 있다고. 이제 다 컸다고. 이 말을 모두 전하고 싶었다. 사실 이것보다 더 많은 말이 하고 싶었지만, 아이는 작은 바람에 이 말을 다 싣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을 고르고 또 골랐지만 무리였다. 하고 싶은 말이 끊임없이 생각났다. 아이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한 마디만 하자. 엄마에게 가 닿을 한 마디만. 엄마 사랑해. 


그런데 그때,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모든 아이들의 창문을 스치고 그들의 마음을 전해준 바람들이 모두 이 아이의 창문으로 불어오기 시작했다. 솜사탕 만한 조그만 바람들이, 밤의 군대가 모이기 시작했다. 아이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나씩 짊어지고 가기 위해, 바람들은 부지런히 아이의 창문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작은 바람이 자기 쪽으로 오는 것을 느낀 아이는 눈물이 났다. 그래서 눈물을 꾹 참고 하고 싶을 말을 모두 꺼내기 시작했다. 작은 바람들은 동동거리며 창문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아이는 기다리는 바람을 위해 서둘러 마음을 꺼냈고, 바람들은 그 마음을 하나씩 품고 작은 회오리 춤을 췄다.


아이의 눈물이 마르고, 모든 말을 다 했다고 느낀 순간, 바람들은 무리를 지어 둥글게 원을 그렸다. 아이 앞에서 큰 회오리바람으로 모인 바람들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잠시 빙글빙글 돌더니 이내 흩어져 하늘로 슉하고 올라갔다. 이제 아이의 마음은 엄마에게 전달될 것이다. 아이는 퉁퉁 부은 눈을 하고는 미소를 지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밤의 군대가, 바람의 군대가 그렇게 몰려왔다가 사라졌다.

이제 새벽이 올 것이다. 

아이들은 깊은 잠을 자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일, 또 밤의 군대가 몰려올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번역] 들라크루아의 일기_1822102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