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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다 Aug 11. 2023

임원에게 보내는 영어 리포트를 쓰라고요?

눈칫밥 먹으면서 원어민 동료에게 영어 검수를 받다

퇴근길

막상 취업을 하고 실무에 바로 뛰어드니, 영어 이메일 작성 실력을 늘리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쓰는 영어의 단어의 양은 무궁무진하지만, 한정된 직장생활이라는 상황에서 사용하는 단어의 수는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회화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상대방의 억양에 익숙해지는 시간만 어느 정도 필요했지, 시간이 지나니 금방 말을 알아듣고 답변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했습니다.


반면, 영어로 리포트를 쓰는 것은 달랐습니다. 이메일은 문법 표현이 틀려도 약간 양해가 가능한 반면, 리포트는 공식적으로 경영진에게 전달되는 문서이기 때문에 문법이나 표현을 완벽하게 적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수치를 뒷받침하는 분석 내용을 적어야 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데이터를 분석하고 영어로 적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리포트를 쓰는 날은 일주일 중에서 저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날이었습니다.


금요일 저녁이면 자유롭게 맥주를 마시며 보드게임을 하던 사무실 분위기

스타벅스 다음으로 얻은 첫 사무직 직업은 유럽에서 가장 큰 독립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에서 한국 채널 관리 팀과 영국의 고객사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하는 APAC Account Executive였습니다. 제가 하는 일 중 하나는 한국 채널팀이 리포트에 쓴 영어를 검수한 뒤, 영국의 클라이언트에게 전달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래도 한국 채널팀에는 한 번도 외국에 나가보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보내주는 리포트는 완벽하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영국에 있는 동료들이 쓰는 영어를 접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리포트를 살짝만 고쳐서 내보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검색을 하거나 현지인 동료들에게 물어봐서 누가 봐도 문법이 틀린 문장들만 고치고, 적당히 완벽하지 않은 리포트를 보내도 영국의 클라이언트들이 이해해 줬기 때문에 큰 마음의 부담 없이 일을 했었습니다.


1,000명이 근무하던 런던 오피스

문제는 글로벌 1위 럭셔리 패션 기업으로 이직한 이후로 나타났습니다. 런던 오피스에 근무하는 직원 1,000명 중에 한국인은 오직 저 하나뿐이었습니다. APAC 팀이라는 지역 전문성을 인정받고 작은 보호막 안에 갇혀 일하던 전 직장과 달리, 이직한 회사는 적당히 한국인이라는 핑계로 완벽하지 않은 영어 실력을 양해받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속한 팀은 퍼포먼스 마케팅 팀으로, 비즈니스에서 가장 큰 매출을 가져오는 팀이었기 때문에 최소 매니저 직급부터 이사 직급까지 포함한 50명에게 발송되는 영어 보고서를 매주 써야만 했습니다.


영어 보고서를 내보내는 화요일만 되면 알지 못할 두통에 시달릴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모든 문법이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남들이 쓴 리포트를 보고, 거기에 나온 단어들과 구문들만 베껴 적는 방식으로만 리포트를 작성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온전히 전하지 못하는 마음에 매일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써낸 리포트는 영어 원어민 동료에게 문법을 검수받은 다음에야 내보낼 수 있었습니다. 자기 일도 바쁜데 제 영어 리포트를 검수까지 해야 한다니 동료에게 미안하면서도 맨날 눈칫밥을 먹으며 부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또한 리포트를 쓸 때는 영어뿐만 아니라 데이터를 가공하는 방법, 해석하는 방법, 전문 용어를 비전문가에게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방법까지 생각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리포트를 내보내야 하는 화요일은 제가 일주일 중에서 가장 싫어하는 날이 되었고, 제 영어를 검수해 주는 동료가 휴가를 가면 어쩌지 하고 매일 전전긍긍하는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리포트는 써도 써도 왜 계속 써야 하는지, 주간 리포트 외에도 캠페인 리포트, 카테고리 리포트, 월간 리포트, 분기 리포트 등 매일 같이 써야 하는 리포트들이 넘쳐났습니다. 매주 평균적으로 2-3개의 리포트들을 적으면서 점진적으로 영어 실력이 늘었지만, 그때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회사에서 경력과 기술을 쌓아도 나중에 영어가 결국 발목을 잡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꾸준히 기술적으로는 좋은 성과를 냈지만 영어가 완벽하지 못하니까 승진할 자격이 없다며 스스로 자존감을 깎아먹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강점을 보기보다는 약점을 확대해서 자기 비하를 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6년이 지난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까마득한 옛날이야기 같습니다. CEO에게 보낼 상반기 리포트를 작성하라는 요청을 받아도 데이터를 뽑고, 해석하고, 보기 좋게 형식을 입히는 데까지 3시간에 채 걸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영어 리포트 작성 실력이 상승한 비결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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