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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완전한 마음, 여래장(如來藏)

by 안규민 Mar 12. 2025


6. 본래 완전한 마음, 여래장(如來藏)


다실의 시간은 규정할 수 없는 중심으로부터 끊임없이 흔들리고 일그러지는 유의미한 허망함이며, 그 자체로 이미 초월적인 성격을 지닙니다. 이미 초월적이라면 다시 초월해야 할 완전성에 붙잡힐 까닭은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형상을 ‘허망’하게 보지 않고 ‘환상’으로 취급하며 현재로부터 초월하여 완전함에 도달하려는 입장이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생성과 소멸의 인과율에 맞서려는 욕망입니다. 인과율을 극복하게 된다면 모든 형상에 앞서 처음부터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고정불변의 영원성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에 도달하려는 순간 초월성은 상대적 거리를 가지게 되며,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닌 새롭게 얻어내야 할 대상에 속하게 됩니다. 상대적으로 새롭게 나타나는 것은 절대적일 수 없으며, 영원한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름과 형상의 허망함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과거와 미래가 서로에게로 흘러들며 언제나 새로운 의미로 현재를 지속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실에는 초월해야 할 인과가 없습니다. 우주의 역사가 매 순간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며 스스로를 초월해 있기 때문입니다.


범아일여(梵我一如)(1)

여래장(如來藏)(2)


1) 범아일여(梵我一如) : 개별적 자아(我)를 우주의 근본적 실재(梵)의 개념과 묶어 그 둘을 동일한 영원불멸의 실체로 규정하는 사상이다. 범아일여의 해탈은 바탕과 그 위에 그려진 그림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개별적 그림들이 모두 하나의 근원적 바탕에서 나왔으므로 ‘바탕’과 바탕에 그려진 ‘그림’은 서로 다르지 않다. ‘나’의 본질은 무한하게 그림을 허용하는 궁극적 실재로서의 마음이며, 그려진 모든 그림(대상)의 바탕이자 원인으로서 그림을 알아차리는 ‘이치’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이 알아차리는 마음을 다시금 알아차려 근원적 바탕의 마음으로 환원하여 그림을 향한 집착을 버려야한다. 문제는 모든 존재가 하나의 근원에서 나온다면 그 근원은 개별성을 용납할 수 없으면서도, 모든 개별적인 것들이 동시에 하나의 근원을 공유한다는 기이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점이다. 또한 하나의 근원이 모든 실재라면 '하나의 근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불필요해질 것이므로, 범아일여 사상은 스스로의 성립을 부정하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 범아일여 사상가들은 이원론적 분별 그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것을 핵심 주제로 삼으며 말한다. 개체와 근원간의 분리가 착각이므로 그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은 이원론적 초월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이원론적 분별을 거부함으로써 ‘분별된 것과 분별되지 않은 것’이라는 더욱 교묘한 차원의 이원론을 요구한다. 분별을 제거하기 위해 ‘분별되지 않은 근원적 관점’을 내세우는 것은 이미 개체와 근원이 동등하지 않다는 이원론적 관점에 기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분별된 것과 분별되지 않은 것으로의 분별을 멈추고 개별적인 것들의 차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된다면, 하나의 근원을 내세우는 비이원론적 입장을 포기해야만 한다. 결국 범아일여는 이원론적 사고를 전제로 비이원론을 제시해야만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문제는 실참에 있어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알아차림을 알아차리는 가운데 일어나는 합일의 체험은 감각과 감정과 생각에 오염된 마음(末那識)의 작용이 기억을 형성하는 마음(阿賴耶識)의 작용을 ‘영속하는 자아’로 집착하여 만들어낸 허구적 관념이다. 하나의 근원적 바탕으로서의 마음에 도달하기 위해 깊은 명상 속에서 알아차림을 알아차릴 때, 마음은 마주 보는 두 개의 거울과 같이 자신의 반사적 성질을 대상으로 삼아 스스로에 대한 알아차림을 지속하게 된다. 이때의 마음은 대상이 없는 현재를 자신의 연속성으로서 파악한다. 이러한 근원적 자아의 경험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의 경험을 하나로 연결하여 자신을 알아차리는 마음Diachronic Self이 현재적 자신Synchronic Self에게 연속성을 투영하여 착각을 일으키는 상태이다. 변화하는 대상이 없으므로 남아 있는 것은 자신을 무한히 되돌아보는 알아차림뿐이다. 그리하여 마음은 시간의 역사를 넘어 자신만이 처음부터 존재해 온 듯한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그렇게 시간의 한계에 갇힌 대상들 너머에 순수하게 지속하는 근원자로 등극한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오직 하나의 알아차림이 무한히 펼쳐진다. 마음은 자신을 우주와의 합일로, 무한한 시간으로, 영원한 존재로 여기게 된다. 이것은 한때 서양 철학이 제시했던 이데아론과 심신이원론에서 나타나는 오류와 유사한 문제점을 보인다. 플라톤은 세계를 이데아라는 절대적 실체의 그림자로 간주했으며,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 아래 의식하는 자아를 물질과 분리된 불변의 실체로 설정했다. 이와 같이 범신론적 문제와 더어 이데아론에서 근대 철학 이르기까지 낱 폐기된 개념적 오류들이 범아일여 사상에서 총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현상과 자아가 연기적 조건 속에서 생멸한다는 무자성(無自性)의 이치를 올바르게 사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여래장(如來藏) : '고정된 실체'란 자아의 고유한 본질과 기원을 지니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불멸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에 반해 열반은 존재와 시간의 고정된 본질이 부정된 공성(空性)의 원리를 따른다. 열반은 인과에 고정된 시간성을 취소하여,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동시적 연기성의 현전함이다. 이는 열반이 특정 시점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미 실현되어 있는 불생불멸의 상태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열반의 역설적 구조는 '인과동시(因果同時)'의 시간론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무명(無明,어리석음)이 실현된 경우에도 역시 세계의 역사는 처음부터 선형적인 인과에 의해 전개되어 온 것으로써 나타난다. 그러나 무명이 인과동시의 이치를 깨닫고 열반에 도달하면, 그 순간부터 우주의 시간은 다시 처음부터 열반이 실현된 역사로서 드러난다. 열반은 '아무것도 불멸하지 않는다'는 자각을 통해 오히려 불멸을 성취한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열반의 역설을 설명하는 조건적 기반이 바로 '여래장'이다. 여래장은 무명의 마음이 인과동시의 이치를 깨달아 열반으로 향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는 열반의 잠재성을 무명의 입장에서 조명한 개념이다. 인과의 속박과 시간의 흐름 속에 갇혀 있는 무명의 상태에서도 여래장은 열반에 속한 무명이 스스로를 구원할 가능성으로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열반은 단순히 특정한 깨달음의 순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새롭게 조명하며, 모든 시간을 처음부터 다시 열어 보이는 자기 초월성을 지닌다. 이 불멸성은 고정된 실체에 대한 집도 충돌하지 않는다. 여래장은 열반의 무한함이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를 잃기도, 자각하여 얻기도 하는 자유로운 가능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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